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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단 May 26. 2020

바다,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 벅찬

PC게임 <대항해시대2>


  책을 한 권 들고 통신탑 옆으로 갔다. 여기가 섬에서 가장 높은 곳. 주변을 둘러보면 사방이 바다다. 어느 한쪽만이 아니라 360도, 고개를 돌리는 곳 모두 쪽빛 바다가 펼쳐져 있다. 하늘빛과 바다빛이 똑같아 어디를 봐도 푸르디푸른 대한민국 영토. 외로운 섬, ‘독도’다.


  2014년, 독도에서 맞는 새해 첫 일출 아이템을 위해 12월 29일 섬에 입도했다. 독도경비대장은 취재진의 편의는 얼마든지 봐주겠지만 식사만큼은 알아서 해결해달라고 당부했다. 음식을 주면 줬지 고생하고 있는 군인들의 밥을 뺏어 먹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회사 헬기에 즉석밥, 과자, 커피, 과일 같은 식량을 어마어마하게 구겨 넣었다.


  부식 때문에 헬기가 너무 무거워 착륙이 힘들었다는 베테랑 기장님의 너스레와 함께 섬에 도착했다. 미모의 방송국 여기자가 오는 게 아닐까 기대하며 헬리포드 바로 앞까지 마중 나온 경북지방경찰청 소속 독도경비대원들 30여 명은 시커먼 아저씨 3명만 헬기에서 내리자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래도 고독한 섬 생활 중에 나타난 뉴페이스들이 반가운지 오가며 마주칠 때는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면서 조금씩 가까워졌다.

   


  현역 의경들이 생활하고 있는 엄연한 군대인데도 분위기가 상당히 좋아서 놀랐다. 일과와 훈련이 빡센 부대일수록 내무생활은 편하고, 생활이 널널할수록 심심한 고참들이 후임병들을 쓸데없이 괴롭힌다는 군생활의 아포리즘은 진리였나 보다. 허나 아무라 분위기가 좋아도 군대는 군대. 더군다나 20살의 불타는 청년들이 지내기에는 너무나 심심하고 무미건조한 섬 생활이다. 나 같은 중년 아저씨한테야 이곳이 고요한 낙원이지만 이 친구들에게는 평화로운 지옥일 게 분명하다.


  단조로운 일상에 시각, 청각자극도 별로 없고 주변에는 마음만 먹으면 뛰어내리기 딱 좋은 바다가 원 없이 펼쳐져 있으니 서로서로 조심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경비대장도 그런 대원들의 기분을 십분 이해하는지 마냥 엄격하기보다는 막내 삼촌 같은 푸근함으로 대원들을 대하는 게 눈에 보였다.

  식사 같은 경우도 그랬다. 격오지로 분류된 근무지이다 보니 내륙에서 근무하는 보통 대원들보다 급식 예산이 2배 정도 책정되어 있어 슬쩍 봤는데도 밥이 꽤 훌륭했다. 출장기간 내내 3분 카레와 컵라면 같은 레토르트로만 끼니를 때우는 우리가 안쓰러웠는지 마지막 날 점심, 대원들이 먹는 식사 자리에 초대받았다.


  식판에 배식을 받자마자 충격에 휩싸였다. 메인 메뉴 ‘망고를 곁들인 토마토 살사 타코’에 서브 요리는 ‘아보카도 연어 퀘사디아’ 그리고 ‘굴을 섞은 문어 세비체’가 반찬 칸에 귀엽게 담겨 있었다. 당황과 황당의 어디쯤에서 어버버 하며 맛을 보았다. 안타깝게도 다 처음 먹어보는 메뉴라 오리지널의 맛과 비교해 어떤지, 이 친구들이 어느 정도의 퀄리티로 완성시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라틴의 향기가 물씬 풍겨오는 훌륭한 요리였다.


  설마 독도에서 멕시코 음식을 먹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몇 명 안 될 걸 아마, 대한민국 국민 중 독도에서 타코랑 퀘사디아 먹어본 사람? 음식을 만든 취사병 친구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입대하기 전 호텔조리학과를 다니다 왔다는 그의 말에 따르면 일반 부대처럼 급양관리관 등 어른(!)들이 영양 위주로 짜준 식단이 아니라 소대원들의 요구와 희망사항대로 모든 메뉴를 정한다고 한다. 때문에 20살 남자들이 최애하는 스타일로 모든 요리가 구성된다. 주간 식단표를 보니 치킨마요범벅, 치즈핫도그, 간장떡볶이, 불돈까스덮밥 등 하나같이 화려했다. 이쯤 되니 오히려 40대 후반의 독도경비대장 쪽이 걱정됐다.


  “대장님은… 매일 이런 식사 괜찮으신가요? 거의 분식에 가까운데.”

  “허허, 뭐 별 수 있나요. 야들은 먹는 게 유일한 낙인데.”



  첫날은 그래도 여기저기 살펴보고 인사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둘째 날부터는 그야말로 멈춰진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독도 투어라고 해도 10분 정도면 끝이라 기념사진 몇 장 찍고 나면 할 게 없다. 워낙 작은 섬이니 어디 갈 곳도 숨을 곳도 없고.

  일은 1월 1일 딱 하루만 하면 되기에 다른 날은 휴가나 다름없었다. 일정도 없고 관리감독자도 없으니 하루 종일 뒹굴어도, 늦잠을 퍼질러 자도 상관없다. 두 후배는 주로 유튜브를 보거나 여자 친구와의 카톡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


  뭘 할까 고민하다 출발 직전 집에서 챙겨 온 책을 읽기로 했다. 새벽 일찍 출발하느라 불 꺼진 거실 책장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한 권 집어 와서 무슨 책인지도 모른다. 럭키박스라도 되는 냥 두근거리며 꺼낸 책은 눈앞에 펼쳐진 바다처럼 반짝이는 에메랄드빛 표지의 <해변의 카프카> 하권. 분명 읽었으니 책장에 있을 텐데 다행히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뺨을 스치는 바닷바람과 귀를 간질이는 파도 소리 사이에서 한 장씩 페이지를 넘겼다.


  환상과 실제를 오가는 모호한 분위기. 사랑 집착 용서 분노 치유 상실의 감정들이 몽환적인 작품세계 속에서 폭발적으로 뒤섞인다. 하루키 선생님 아니랄까 봐 너무나 섬세한 문장들이라 ‘하늘에서 물고기가 비처럼 떨어지는 묘사’를 읽을 때는 글이 마치 실제인 양 느껴져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볼 정도였다.

  음악과 마찬가지로 책도 어디에서 읽는지에 따라 그 맛이 확연히 달라진다는 걸 처음 알았다. 주변에 정말 아무것도 없어서 ‘세상의 끝’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독도 한가운데 앉아, 세상의 끝자락을 겁먹은 아기 물소처럼 조심조심 나아가고 있는 다무라 카프카 소년의 방랑기를 지켜보는 건 안개 가득한 꿈결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초현실적인 소설을 읽는 현실주의자.



  추억이란 당신의 몸을 안쪽에서부터 따뜻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당신의 몸을 안쪽에서부터 심하게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이기도 합니다.  

  - <해변의 카프카> 무라카미 하루키


  가장 눈에 밟힌 문장이다. 추억의 양면. 애틋하면서도 아픈 기억들. 눈앞에 펼쳐진 바다와 참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의 근원이자 생명의 종착지. 풍요의 상징이면서 재난의 아이콘. 바다란 얼마나 신비로운 곳인가.

  나흘 내내 바닷소리만 듣고 바다 내음만 맡으면서 바다만 보고 있노라니 소년 시절 어린 마음에 ‘모험심’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가슴 깊이 각인시켜 주었던 추억의 작품이 불현듯 떠올랐다.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기에 더욱 닻을 높게 올려 먼바다로 향하던 모험의 나날.




 


  <삼국지> 시리즈로 유명한 일본 코에이는 ‘한 시대를 풍미한’ 이라는 표현이 이보다 더 어울리는 작품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게임을 1993년 세상에 선보였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희대의 걸작 <대항해시대2>.

  게임을 시작하면 오프닝에 등장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른 바다, 그 위를 수십 척의 범선이 함대를 이뤄 장엄하게 나아간다. 불과 16색만 사용해 만들어진 단출한 그래픽인데도 보고 있으면 왠지 가슴이 콩닥거린다. 미지의 세계로 향하던 중세 뱃사람들의 유전자가 여태껏 이어지기라도 한 걸까?


  게임 자체로서의 재미와 작품성은 물론이거니와 <대항해시대2>에는 다른 게임에서는 보기 힘든 추억담들이 존재한다. 이 작품 덕분에 당시 세계지리 시험에서 만큼은 고득점을 얻었다는 학생들이 실제로 속출했기 때문이다.

  방과 후 1~2시간 정도로 비교적 라이트하게 플레이한 나 또한 지중해 지도 정도는 눈감고도 그려낼 수 있고 어느 나라에 어느 항구가 있어 특산품은 무엇인지 주요 교역 루트, 공업 발달 상황, 종교, 기후 등을 자연스럽게 익혀버렸을 정도니까 말이다. 게임이 실제 학업과 시험 성적에 도움이 된 전무후무한 케이스가 아닐 수 없다.



  3면이 바다인 반도 국가의 후예들답게 당시 컴퓨터를 갖고 있는 남학생이라면 너도나도 작품 속으로 뛰어들었다. 게임을 시작하면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여섯 명의 주인공 중에 한 명을 고른다. 전형적인 탐험가나 해적, 해군 같은 건 바다를 무대로 한 게임이니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역업자’나 ‘지도제작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바로 그 지도제작자가 나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세계 지도 한 장을 만들기 위해 인생을 건다는 건 지금까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삶이다. 흥미로운 그의 여정을 한 번 따라가 보고 싶어 졌다. 이렇게 해서 네덜란드의 청년 지리학자 ‘에르네스트 로페스’와 모험을 함께하게 됐다.


  친구 메르카토르 (바로 그 메르카토르!) 의 부탁으로 정확한 세계 지도를 만들기 위한 여정. 배를 정비하고 선원을 배치한 뒤 모든 항해 준비를 마치고 암스테르담 항구를 나선다. 고작 10명의 선원을 태운 귀여운 범선, 카라벨 라티나가 북유럽의 찬 공기를 가득 머금은 북해를 향해 유유히 미끄러지는 순간 주인공의 테마곡이 스피커에서 잔잔히 흘러나왔다. 3박자 왈츠의 따뜻하면서도 경쾌한 곡. 지도를 만들기 위한 세계 일주를 응원하는 듯한 산뜻한 선율과 함께 시작된 모험에 설레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물론 여정이 항상 즐겁지만은 않았다. 항해가 길어질수록 선원들의 불만은 커져갔고 괴혈병이 돌기까지 했다. 배에서 쥐떼가 나와 귀중한 식량이 축나기도 했고 짙은 안개에 휩싸여 선단의 가장 후미에 있는 배 한 척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슬픔도 겪었다. 밤바다에서 들려오는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홀린 선원들이 바다에 빠져버리거나 잔악한 해적에게 쫓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항해는 이어졌다. 이 해협을 건너면 어떤 땅이 기다리고 있을지, 저 태풍을 견뎌내면 어떤 민족이 우리를 반길지 모든 게 미지의 영역이면서도 희열이었다. 그때 알았다. 다른 무엇이 아닌 ‘커다란 배를 타고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는 것’ 그 자체가 <대항해시대2>의 가장 큰 재미와 즐거움이라는 것을.


  사실 로페스는 주인공 여섯 명 중에서도 가장 비인기 선수다. 해상 포격전이나 백병전, 마을 약탈까지 하며 짜릿한 재미를 추구하는 주인공도 있고, 죽은 약혼자와 오빠의 복수를 위해 해적이 되는 드라마틱한 여성 캐릭터도 있다.

  이렇게 강렬한 사람들 사이에서 지리학과 시간강사 로페스 선생의 여정은 밍밍할 정도로 순한 맛이다. 하지만 그러하기에 다른 것에는 일절 신경 쓰지 않고 항해 본연의 숨결만을 느낄 수 있어 오히려 좋았다. 배에 대포나 무기, 수출입 교역품을 실을 필요가 없으니 물과 식량만 꾸역꾸역 채워 넣고 오대양 육대주를 넘나드는 모험의 나날.



  길고 긴 여정 끝에 세계 지도를 완성시킨다. 클라이언트인 메르카토르는 로페스가 만든 지도를 판매해 엄청난 수익을 올려 부자가 되고 왕립 아카데미 회원 자격을 얻어 학계의 명예까지 손에 넣는다. 그런데 정작 로페스에게는 아무런 낙수효과가 돌아오지 않아 부관과 선원들은 분노하지만 당사자는 덤덤하다.

  “아무렴 어떤가. 난 항해를 좋아하는 데다가 이렇게 여행할 수 있는 것도 모두 그자 덕분 아니겠나.”

  동료들과의 ‘슬기로운 항해생활’이 더 행복하다는 로페스의 여정은 이렇게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망망대해 한복판에서도 타코를 만들어 먹는 독도경비대원들과 달리 썩은 염장고기와 돌덩이 같은 비스킷 몇 개로 하루 종일 고된 뱃일에 시달렸을 15세기 유럽의 선원들. 그들에게 바다는 도박이었을 것이다. 인도에서 후추와 향신료를 잔뜩 싣고 무사히 포르투갈로 살아 돌아오면 일확천금의 인생역전! 하지만 태풍에 휘말려 죽을 확률이 훨씬 높은 지옥의 항해. 그야말로 모 아니면 도. 인간에게 바다는 이토록 이중적인 곳이었다.


  보잘것없는 작은 배에 올라 수많은 위험을 이겨내고 새로운 문명과 조우하던 시절. ‘모험’이라는 말이 너무나 잘 어울렸던 그 시대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아 그려낸 작품.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열악하다 못해 모바일 게임보다도 못한 유치한 그래픽이지만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로망을 소년 소녀들에게 물씬 느끼게 해 줬던 게임. <대항해시대2>는 '바다' 라는 게 우리 곁에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기억될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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