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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단 Jun 04. 2020

몸을 움직여! 머리를 흔들어!

아케이드게임 <댄스 댄스 레볼루션>

시작은 단순했다. 퇴근 후에 마땅히 할 것도 없고 심심하지 않냐는 동네 친구의 꼬임이었다. 운동도 되고 스트레스 해소에도 좋으며 결정적으로 또래 여자들이 많을 것(!)이라는 유혹에 홀라당 넘어가 찾아간 곳은 바로 라틴댄스 동호회, 그중에서도 태양과 정열의 춤 ‘살사’ 클래스였다.


손 끝, 발 끝, 몸 구석구석 뻗어있는 뉴런 한 조각까지 완벽하게 장악해 자신의 의도대로 몸을 흔들고 꺾으며 춤을 추는 사람들을 보면서 감탄하고 부러워하기만 한 인생이다. 몸으로 삼라만상 희로애락을 표현해내는 댄서들은 경배의 대상이지 모방의 대상이 아니다. 일반인이 연습 좀 한다고 저렇게 될 리가 없다. 저건 타고난 거다. 불수의근마저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는 듯 박력 있고 부드러운 춤선과 몸동작.

걷고 앉고 엉거주춤 어색하게 움직일 줄이나 알지 춤 같은 건 춰본 적 없는 나로서 당연히 거절했다. ‘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인 사람이다. 망신만 당할 거다. 하지만 친구의 끈질긴 삼고초려에 넘어가 결국 첫 수업을 함께 가게 됐다. 홍대의 허름한 건물 지하에 있는 초등학교 교실만 한 작은 연습실이었다.


‘왕초보반’ 이라는 귀여운 이름답게 모두 회사 마치고 모인 20~30대 직장인들이었다. 쭈뼛쭈뼛 자기소개를 나누고 곧바로 수업이 시작됐다. 뉴욕 스타일의 온투 살사 베이직. LA스타일이랑은 뭐가 다른지, 다른 라틴댄스들과는 어떤 차별점이 있는지, 기본 매너와 특징에 대한 설명을 속전속결로 끝내고 선생님들의 시연을 관람하게 됐다. 바로 눈 앞,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두 남녀가 음악에 맞춰 흥겹고 때로는 농염하게 발을 내딛고 팔을 뻗으며 몸통을 돌리는 모습은 너무나도 강렬했다. TV 화면으로 보는 것과는 박력이 달랐다. 시범 댄스이다 보니 약간 긴장했는지 실수가 나왔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싱그러운 웃음으로 무마하는 두 사람의 춤은 팡팡 터지는 케미의 분화구 같았다.  


이제 대열을 갖추고 인생 첫 살사를 춰보는 설레는 순간. 학교 체육 수업 이후로 이렇게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 몸을 움직여보는 게 몇십 년 만인지 모르겠다. 운동과 거리가 먼 생활을 이어오다 보니 몇 분 안 움직였는데도 몸에서 열이 나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그런데 이게 뭐랄까, 설명하기는 좀 어렵지만… 재밌는 거다! 이런 거였나? 모두 같이 구령에 맞춰 똑같이 몸을 움직인다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이었나?



기본 베이직 패턴을 배운 뒤 본격적으로 상대의 손을 잡고 춤을 췄다. 우리 클래스의 경우 여자가 10명 남자는 12명이었는데 이 정도면 성비가 꽤 맞는 편이라 아저씨들끼리만 계속 눈 맞추고 손 맞추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남녀가 죽 일렬로 서서 한 명씩 옆으로 이동하며 기본 스텝을 이어갔다. 이렇게 다양한 여성의 손을 바꿔가면서 계속 잡아보는 건 초등학교 6학년 학예회 포크댄스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고맙다 친구야.


가벼운 스텝 후 기본적인 턴으로 이어지는 1분 남짓한 동작이다. 춤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다. 아장아장 걸음마에 더 가깝다. "원 투 쓰리 포! 파이브 식스 세븐, 턴!" 이 짧은 동작을 10명의 여성들과 계속 반복하다 보니 신기한 느낌을 받았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단순한 몸놀림인데도 신기할 정도로 호흡이 안 맞아 서로 삐걱대다가 버퍼링 걸리듯 계속 뚝뚝 끊기는 상대가 있고, 둘 다 오늘 처음 온 초보 학생인데 마치 20년간 호흡 맞춰온 살세로와 살세라인냥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모든 동작이 연결되더니 급기야는 숨 쉬는 포인트마저 정확히 일치할 만큼 합이 잘 맞아 비밀스럽게 서로 웃음을 주고받는 파트너도 있었다.


‘이상형이요? 대화가 잘 통해야죠. 사람은 역시 성격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취향이 서로 비슷한 게 아무래도…’ 지금까지 견지해왔던 이성관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몸이었구나 몸! 인간에게 몸의 대화가 이렇게 중요한 거였단 말인가. 코로나로 세상이 종말을 향해 치달아도 당장 오늘 밤 몸의 대화가 잘 통하는 상대를 찾기 위해 이태원 클럽으로 달려드는 불나방들이 끊이지 않는 건 이런 이유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강 스파이크로 상대 코트를 맹폭하는 배구선수에게 궁합 잘 맞는 세터와의 호흡이 얼마나 중요한지 두말할 필요가 없듯 몸과 몸의 코드가 잘 맞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처음으로 맛보았다. 그렇게 두어 달을 배우다 보니 춤도 시나브로 익숙해져 ‘바싹마른 오징어’ 처럼 삐걱대던 몸도 ‘반건조 오징어’ 정도로 조금은 촉촉하게 업그레이드됐다.

왕초보반 멤버들과도 매주 만나면서 조금씩 친분이 쌓였고 수업이 끝나면 살사바에 찾아가 밤늦게까지 쿠바 음악에 몸을 맡긴 채 흔들어 재끼던 나날. 이렇게 몸을 흔들고 춤을 추며 화려한 조명이 나를 감싸던 순간이 있었던가?

가만, 옛날 어렸을 때 오락실에서…






아이폰의 등장은 통신기술의 혁명이었다. 유튜브의 등장은 미디어 생태계의 혁신이었고 테슬라 자동차는 내연기관의 종말이라는 대격변을 이끌고 있다. 1998년 대한민국의 오락실에서도 혁명은 진행됐다. 일본 코나미의 리듬 게임 <댄스 댄스 레볼루션 (이하 DDR)>이 한국에 상륙한 것이다. 파천황이었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던 새로운 세상의 도래. 아케이드 게임장 안에서 사람들이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조짐은 어느 정도 있었다. 1년 전인 1997년, 코나미에서는 리듬게임 역사의 시조새라고 할 수 있는 <비트매니아>를 출시했고 이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폭력과 피로 점철된 마초냄새 물씬 나는 게임들 사이에서 알록달록한 조명이 반짝이며 댄서블한 유로비트가 둠칫둠칫 흘러나온 최초의 순간이었다. 음악을 만드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화면에 등장하는 노트를 보며 타이밍 맞춰 버튼을 쿡쿡 누르는 것만으로 음악이 완성되어 흘러나온다. 단돈 500원이면 서퍼들이 어깨를 들썩이는 마이애미 해변의 DJ가 된 듯한 느낌을 만끽할 수 있는 짜릿한 충격이었다.



<비트매니아>의 성공으로 한껏 고무된 코나미가 이듬해 내놓은 작품, 수많은 청소년들을 오락실에서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땀 흘리게 만들었던 건강 게임 <DDR>이다. 위쪽에서 내려오는 4방향 화살표에 맞춰 그 방향 발판을 누르면 되는 지극히 단순한 시스템. 하지만 고출력 앰프를 거쳐 귀에 착착 감기는 클럽 음악과 게이머를 감싸는 눈부신 조명, 적재적소에 터져 나오는 DJ의 추임새, 게임이 시작되면 느껴지는 주변 손님들의 뜨거운 시선.

이 순간에는 세상에 게임기와 나 밖에 없다. 무아지경 속 흥겨운 발놀림. 제작진이 준비해 놓은 순서대로 양발을 요리조리 옮기다 보면 저절로 턴이 되고 춤이 된다. 춤과는 거리가 먼 범생이지만 <DDR> 기계 위에서 만큼은 뻔뻔하게 플레이할 수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게임이니까.


90년대 후반, 온 세상은 이 춤추는 오락기에 열광했다. 보수적인 방송과 신문들까지 관심을 보였고 다이어트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까지 발표되자 게임에 별 관심 없던 여성과 중년층까지 게임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발판을 정확히 밟아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겠다는 단순한 목적을 벗어나 '퍼포먼스'를 추구하는 게이머들이 등장했다.

화면을 보면서 플레이하는 게 아니라 뒤돌아서 갤러리들을 바라보며 게임을 한다거나 혼자서 두 발판을 모두 사용해 난이도를 높이기도 하고 익살스러운 안무를 곁들인다거나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화려한 브레이크 댄스를 선보이는 쿨가이들이 넘쳐났다.



꼬맹이 때부터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R형도 그중의 한 명이다. 게임 좋아하고 그림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던 그는 <DDR>을 좋아하다 보니 몇 달간 게임센터에서 살다시피 하며 파고들었고 그 결과로 완성된 플레이는 화려함의 극을 달렸다. 손으로 발판을 짚으며 빙글빙글 돌고, 물구나무를 서고, 앉았다 일어났다 점프로 연계되는 3단 콤보의 현란한 몸부림을 자랑했다.  


규모가 좀 되는 게임센터에서 R형이 특유의 파워풀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면 갤러리들의 탄성이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열정 플레이에 반한 여학생으로부터 연락처가 적힌 귀여운 쪽지까지 받았을 정도이니 말 다했지 뭐. R형은 여세를 몰아 책을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동영상과 함께하는 DDR>이라는 제목의 책 속에는 그의 화려한 플레이가 연속동작 사진으로 자세하게 실려있어 초보자들도 책을 보며 쉽게 배우게 만드는 충실한 가이드북이었다. 지금은 성실한 공무원인 R형이 이 책을 흑역사로 생각하는지 추억으로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정도였다. 게임의 폭발적인 인기로 책이 출간될 정도였다. <DDR>은 제목처럼 혁명 그 자체였다. 지독할 정도로 음지에 갇혀 있던 '게임' 이라는 문화를 양지로 한껏 끌어올렸다. 단순하면서도 중독성 있는 게임성 자체도 훌륭했지만 ‘흥의 민족’인 우리네 정서와의 궁합도 참 잘 맞았다.  

이렇게 음악과 함께 즐기는 게임의 인기가 폭발하자 한국에서도 비슷한 아류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비트매니아>는 <EZ2DJ>와 <DJ MAX>가 전담 마크했고 <DDR>은 <펌프잇업>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분명 유사성은 있지만 게임의 결은 좀 다르다. 십자 방향과 엑스 방향이라는 발판의 구조뿐 아니라 리듬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음악에서부터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빠르고 경쾌하지만 팝 위주의 곡들로 구성된 <DDR>에 비해 <펌프>는 훨씬 다채로웠다. 락, 펑크, 클래식은 물론 우리나라 가요가 수록된 게 킬링 포인트여서 노바소닉의 ‘또 다른 진심’이나 젝스키스의 ‘폼생폼사’ 같은 우리나라 곡에 맞춰 몸을 흔드는 느낌은 확실히 각별했다. 사람들은 열광했고 이때를 기점으로 노래방과 PC방을 위협하는 '펌프방' 이라는 새로운 업종이 등장하기까지 했다. 기판의 가격도 좀 더 저렴했고 한국 제품인 만큼 유지보수와 관리의 용이함에 게임센터들도 외산보다 국산을 선호하게 되면서 대세는 <펌프> 쪽으로 확연히 기울었고 <DDR>의 시대는 차츰 저물어 갔다.



음악과 함께 하는 건강한 리듬게임의 시대를 열었던 작품. 어둡고 칙칙한 불량학생들의 집결지가 아니라 친구, 연인과 같이 웃고 즐기는 장소로 오락실의 정의를 바꿨던 게임. 상대를 쓰러트리는 것이 목표인 게임들과 달리 경쟁이 존재하지 않고 음악에만 몸을 맡기면 되는 평화롭고 착한 게임.

일본에서는 요즘도 후속작이 나오고 있지만 흥행은 영 예전만 못하다. 수십 종류가 넘을 정도로 다양하게 세분화된 리듬게임 틈바구니 속에서 <DDR>은 더 이상 독보적이지 않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혁신의 아이콘이 이제는 고루한 클래식게임 취급을 받는 게 안타깝긴 하지만 요즘 나오는 <유비트>나 <사운드볼텍스> 같은 직계 후손들은 물론 체코의 VR게임인 <비트세이버>마저도 잘 살펴보면 <DDR>의 잔향이 진하게 남아 있다. ‘리듬게임’ 이라는 일족을 태동시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기원 그 자체였던 것이다.


멋있지 않고 누가 봐주지 않더라도 깔깔대며 즐겁게 발판을 즈려밟던 그 시절. 운동신경이 꽝이라 잘하지는 못했어도 뒤뚱거리는 몸으로 기계와 호흡 맞춰가며 화살표를 바라보던 수많은 댄서 꿈나무들은 이제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행복한 스텝을 밟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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