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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단 May 09. 2020

당신을 인간이게 만드는 그 ‘무엇’에 대하여

PS4게임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누구나 (…는 아니고 사실 서민들만) 다녀오는 병역의 의무를 경찰서에서 보냈다. 여러 업무가 있었지만 가장 주된 임무는 뭐니 뭐니 해도 시위 진압이었다. 입대하기 전에는 몰랐지만 다이내믹 코리아답게 평범한 하루 동안에도 서울 시내에서는 수십 건의 집회와 시위가 벌어졌다. 그때마다 출동해 몸통만 한 커다란 방패를 로마 병사처럼 얽어 메고, 시위대와 서로 밀고 밀리고 소리 지르고 욕 듣는 2년이었다.


  대학 시절 학교 신문사에서 일하다 보니 일반인들보다는 집회 현장이 익숙한 편이었는데도 실제 그 안에서 겪게 된 세상은 예상과 많이 달랐다. 사실 밖에서 봤을 때는 그저 밉기만 했다. ‘폭력 경찰 물러가라! 힘없는 서민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라! 자본의 개! 앞을 막지 마라!’ 시커먼 복장에 단단히 스크럼을 짠 공권력의 모습은 극도로 위압적이었다. 도대체 저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왜 국가는 이렇게 민중을 억압하는가. 너무 궁금하다 보니 실제로 입장을 한 번 바꿔보고 싶어 졌고 지원과 시험을 거쳐 경찰 기동대에 입대하게 됐다.



  폭력 경찰이라며 욕하던 조직에 들어가 기동복과 진압복을 입고 폴리카보네이트 방패를 든 의무경찰이 되었다. 매일같이 데모 현장에 투입돼 분노와 절망으로 가득 찬 시위대를 진압하면서 그동안의 의문은 말끔히 해결됐다. 이들이 얼마나 못된 생각을 하면서 편파적으로 진압을 하냐고? 아니다,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거였다. 정말이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니 생각이 들면 안 된다. 감정을 갖기 시작하면 오히려 위험해진다.


  눈앞에 모여 있는 시위대는 5분 정도만 보고 있어도 촉이 온다. ‘이분들은 정말 절박하구나, 한겨울에 이렇게 쫓겨나는 게 말이 되나? 진짜 억울하겠다, 법이 잘못했네’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들과 ‘지금 지들 밥그릇 좀 더 챙기겠다고 저러는 거야? 완전 이기적이다, 특수학교 들어오면 집값 떨어진다고 이러는 건 좀 아니지…’ 같은 경우가 거의 반반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저 심드렁하게 업무에 집중할 수 있지만 불쌍하신 분들 앞에선 우리도 인간인지라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힘없고 돈없어 하루아침에 공장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대기업 앞에서 집회를 연다. 정말이지 막고 싶지 않다. 사장실 문 앞까지 에스코트해서 모셔다 드리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방패를 들고 그들 앞을 막아서야 한다. 안쓰러움이 시나브로 피어오르지만 이렇게 감정이입을 하기 시작하면 마음 다치고 십상이고 심지어 몸까지 다친다. 흥분하다 감정이 격해진 어르신들은 돌멩이나 병을 깨서 던지는 경우가 있어서 안타깝다며 긴장 풀고 바라보다가 크게 다치는 대원들을 여럿 봤다. 물푸레나무에 찔려 실명된 옆 중대 동기도 있고 다른데 쳐다보다가 날아온 보도블록에 머리를 직격 당한 후임병도 있다. 이런 일을 겪다 보면 인간다운 감정 같은 건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점점 로봇처럼 사무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현장에는 정말 별의별 일이 다 있다. 우유값 폭락을 항의하러 온 낙농업자들이 젖소를 풀어놓는 바람에 흥분한 젖소가 의경들을 향해 돌진해 120명의 대열이 일거에 무너져 혼비백산한 적도 있고, 방패와 헬멧을 뺏기거나 시위대에 끌려 들어가 시원하게 두드려 맞고 돌아오는 납치 피해 대원들도 있었으며, 집회를 하러 온 택시기사노조 안에 아버지가 있다며 출동을 거부한 선임도 있었다.

 

  정작 이 분들이 화를 내고 협상해야 하는 당사자는 저 멀리 성 꼭대기의 왕좌에 있는데 성 밖의 늪지대에서 시위팀과 진압팀 서로 진창에 빠져 뒹굴며 드잡이를 하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임무는 말 그대로 ‘현대판 욕받이’ 구나. 밥솥의 압력이 임계치를 넘어가면 폭발할 수도 있으니 중간에 나서서 김을 좀 빼주는 역할. 스트레스 발산의 대상이자 감정 분출구.

  ‘서민 여러분, 화는 이쪽 경찰들에게 원 없이 풀고 돌아가셔요~’



  내가 다치지 않기 위해, 그리고 눈앞의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기 위해 점점 더 마음을 비웠다. 나는 지금 사람이 아니다. 시키는 대로 하는 기계일 뿐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자. 물론 쉽지는 않았다. 고작 20대 초반의 다혈질 청년들이 이유 없이 맞고 욕먹는데 어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2년에 가까운 피나는 수련을 통해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제대 즈음에는 거의 득도의 경지에 이르렀다.

  무념무상. 화염병이 눈앞으로 날아오고 대형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민중가요와 사람들의 함성소리로 고막이 찢어질듯한 광화문광장 한복판에서조차, 텅 빈 눈을 하고 머릿속으로는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의 시 한 구절만 읊조리면서 견디는 나날이었다.


  나는 나와 싸우는 사람들을 미워하지도 않고

  내가 지키는 사람들을 사랑하지도 않는다.

  Those that I fight I do not hate,

  Those that I guard I do not love;

  - <An irish airman foresees his death>





  2018년 출시된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제목에서부터 많은 함의가 담겨있는 작품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울산이나 포항 정도에 비견될만한 미국의 산업도시 디트로이트. 2038년의 그곳에는 인간이 되어버릴 것 같은 무언가가 있다. 바로 ‘안드로이드’다. 외모는 인간과 완벽히 똑같으면서 업무나 학습, 사고와 판단이 가능한 ‘기계 인간’들이 가전제품 매장에서 48개월 무이자 할부로 팔리고 있는 시대.


  미래학자들의 장밋빛 예측과는 달리 너무나도 뛰어난 안드로이드들의 활약으로 미국의 실업률은 38%에 육박하게 된다. 단순노동의 블루칼라뿐만 아니라 화이트칼라 노동자들까지 안드로이드로 대체된 것이다. 변호사, 회계사, 경찰, 군인은 몸값 비싼 사람 대신 일찌감치 안드로이드로 대체됐고 인간의 마지막 보루라고 여겼던 스포츠나 예술 계통에까지 진출하기 시작해 화가나 뮤지션, 프로야구 투수 안드로이드까지 등장한다.



  사실상 거의 모든 분야에서 안드로이드는 인간을 대체할 수 있고 심지어 더 잘 해내는 세상이 온 것이다. 사회지도층이던 사람들마저 직장을 잃고 동네 술집에 앉아 맥주만 축낸다. 넘쳐나는 실업자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안드로이드 반대’ 를 외치고 사회적 반감은 점점 높아간다. 편리함과 불만이라는 양가감정이 폭발하다 보니 판매 대수가 1억 2천만 대를 돌파한 시점에도 그들을 위한 배려나 권리는 일절 없고 시내 곳곳의 상점 입구에는 ‘안드로이드 출입금지’ 간판이 내걸린다. 버스 안은 인간이 타는 앞부분과 안드로이드들이 짐짝처럼 서서 타는 뒷부분으로 철저하게 나눠진다. 같은 인간을 상대로 감정을 소모하는 것보다 편하다 보니 이혼율은 치솟고 결혼보다는 파트너용 안드로이드를 구입하는 사람이 늘어 간다. 출산율은 낮아지고 사람들 간의 의사소통능력도 점점 더 떨어지는 암울한 디스토피아가 펼쳐진 것이다.


  ‘카라’ 라는 이름의 가사 전용 안드로이드 AX400 이 교외의 한 가정집으로 배송된다. 아빠와 딸, 단 둘이 살고 있는 집이다. 청소, 빨래, 요리 등 맡은 임무를 수행하면서 살펴보니 아빠는 직장을 잃어 화가 많이 쌓여있고 조그만 잘못에도 딸을 윽박지르기 일쑤다. 말수 없고 항상 눈치만 보는 딸 ‘엘리스’가 안쓰럽지만 카라는 안드로이드로서 맡은 바 임무만 묵묵히 수행한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밤, 술과 마약에 취한 아빠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결국 엘리스를 폭행한다. 카라는 안드로이드, 즉 기계다. 주인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아빠는 엘리스의 버릇을 고쳐놓겠다면서 카라에게 개입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명령한다. 하지만 아이를 지키고 보호하는 것 또한 이 가정에 속한 안드로이드로서의 의무다. 두 가지 사안이 충돌한다. 2층에서 연약한 소녀 엘리스의 비명이 들려오고 있는데 카라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결국 딜레마의 게임이다.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주인의 명령대로 가만히 있을 수도 있고 과감하게 안드로이드의 원칙을 부정하며 주인을 거역해 엘리스를 구해낼 수도 있다. 아빠의 가정폭력을 피해 엘리스와 집을 도망 나올 경우에는 그때부터 고생길이 시작된다. 소녀에게는 잠잘 곳도 음식도 필요한데 당장 갈 곳도 돈도 없다.

  선택은 계속된다. 엘리스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이의 지갑에 손을 댈 수 있는가? 편의점 강도가 되어서라도 오늘 밤 아이에게 편안한 숙소를 제공할 것인가? 이게 과연 안드로이드 행동 강령에 부합하는 판단인가. 피보호자를 지키기 위해 아무 죄 없는 다른 이에게 피해를 입힌다?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인데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일종의 고장이다. 시스템 에러이자 불량품이라고도 표현된다. 하지만 카라는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한다. 자유 의지를 갖게 된 것이다. 아이를 보살피는 어머니의 사랑처럼,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고장 난 제품이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작품 속에선 총 3명의 안드로이드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안드로이드에게 생기는 자의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끝없는 의문을 품는 코너, 내 가족 엘리스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카라, 집단이 된 안드로이드들이 인간과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고 공존할지에 대해 결정해야 하는 마커스. 셋은 결국 ‘나, 가족, 세상’을 바라보는 안드로이드의 입장을 대표한다.


  허나,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우리는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우리가 이들을 마냥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엘리스의 아빠처럼 내 일자리를 안드로이드에게 빼앗겨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됐는데? 주택 할부금은 20년이나 남았고 쥐꼬리만 한 실업수당으로는 대출을 갚아나갈 대책이 안 선다. 아내와 자식들은 회사에서 잘린 능력 없는 가장을 더 이상 존중하지 않아 가족 관계는 무너진다. 이런 상황에서 안드로이드를 인정하고 포용하자고? 나 같아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리의 막바지에 다다르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순간이 온다. 안드로이드의 지도자 마커스가 이끄는 ‘안드로이드 시위대’가 사람들을 상대로 집회를 연다. 광장에 모여서 피켓을 들고 목청껏 구호도 외친다. “우리는 살아있다! 평등한 권리! 안드로이드에게 자유를! 노예 제도를 반대한다!” 평화로운 도보행진 앞에 경찰 병력은 총을 들고 막아선다. 해산명령이 내려지지만 총구 앞에서 마커스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저항하지 않는다. 인간보다 우월한 신체능력이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반격할 수 있는데도. 경찰의 강제해산에 결국 안드로이드들은 모두 구석으로 몰려 몰살당할 위기에 처한다. 불량품이니 폐기처분을 당하는 수순인 것이다. 그 순간, 마커스의 선창으로 안드로이드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되리라, 모두 다 괜찮아 지리니

  조금만 더 싸우면 되리라 조금만 더 기도하라, 모든 것이 괜찮아 지리니

  조금만 더 찬양하면 되리라, 모두 다 괜찮아 지리니


  총구 앞에서 죽음을 마주한 기계들의 합창이다. 실제 미국에서 흑인들의 평화 시위 현장에서 많이 불렸던 <Hold on just a little while longer> 라는 가스펠 송이 떨어지는 눈발 사이로 천천히 울려 퍼진다.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는 이들의 투쟁 현장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충격을 받는다. 절망만 남은 최후의 순간, 고요하면서도 힘 있게 희망을 노래하는 이들을 정녕 영혼 없는 기계 덩어리로만 볼 수 있는가?


  비폭력 평화 시위에 담긴 진실성을 깨달으며 안드로이드의 주장에 동조하는 인간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우호적인 여론이 커지자 정부는 결국 대량 학살을 멈추고 공존을 모색하게 된다. '안드로이드는 분명 지적인 생명체라 할 수 있으니 이제 달라진 세상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는 대통령의 논평과 함께.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안드로이드와 안드로이드보다도 훨씬 더 비인간적인 사람들이 등장하는 모순의 시대. 분명 몇십 년 후 우리 곁에게 실제로 벌어질 일의 예고편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지금은 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2000년대에는 큰 집회가 있는 날, 기동대원들이 제대로 식사를 할 수가 없어 간단한 도시락으로 때우는 경우가 많았다. 여유가 좀 있을 때는 경찰버스 안에서 먹기도 하지만 주차장이 멀고 시간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대충 길거리에 쪼그려 앉아 먹는 편이었다.

  5월의 화창한 첫 주말, 노동절 집회로 참석자와 경찰 모두 바글바글했고 우리 소대는 종로3가 맥도널드 앞 인도, 길바닥에 앉아 도시락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땅바닥에 놓인 도시락 위로 먼지가 풀풀 날렸지만 별 수 없으니 꾸역꾸역 삼켰다. 막 비엔나소시지를 입 안에 넣었을 때 눈앞에는 봄날의 데이트를 즐기려는 대학생 커플이 다정하게 손을 잡은 채 나와 내 도시락을 쳐다보고 있었다. 소곤소곤 나누는 목소리가 들렸다.

  ‘완전 거지 같아 저게 뭐야 오빠, 그러네 아니 근데 왜 길을 막고 처먹냐고 어디 좀 들어가서나 먹지 킥킥…’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일까? 혹은 공감? 상대방의 처지와 상황을 조금이라도 이해해보려는 마음? 오고 싶지 않은 곳에 끌려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는 와중에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중도 받지 못한 채 놀림거리가 된 상황이 씁쓸했다.

  카라나 마커스라면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비웃지 않았을 텐데. 오히려 적절한 수분과 함께 규정 칼로리를 천천히 섭취해야 소화기관에 무리가 없을 거라며 다정하게 조언해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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