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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단 May 10. 2020

말이 통하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나요?

FC게임 <파이널 판타지3>


  “不行! 不要拍!”

  카메라를 들자마자 공안은 호루라기를 불며 나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그래 나도 안다 불법인 거. 사회주의 국가답게 중국에서는 허가받지 않은 모든 취재가 불법이다. 물론 신청해도 허가는 나오지 않는다. 베이징 올림픽 같은 스포츠 행사나 공산당의 위대한 업적을 자축하는 전승절 열병식 정도의 이벤트가 아니고서는 절대 취재비자가 나오지 않는다. 하물며 자국의 치부일 수도 있는 재난 취재라면 허가는커녕 현장에서 잡히자마자 벌금 내고 강제 출국당할 게 뻔하다. 급히 차 안으로 몸을 내던지며 출발! 뒤쫓아 오는 공안을 뒤로한 채 부리나케 도망쳤다.


  2008년 중국의 쓰촨성에는 M8.0의 강력한 지진이 강타해 8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입사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막내였지만 출장팀에 포함돼 당일 저녁 바로 중국으로 향했다. 청두공항은 지진으로 이미 그 역할을 상실했기에 충칭 쪽으로 비행편을 잡아 산 넘고 물 건너 가까스로 쓰촨에 도착했다.

  한국 교민이나 유학생, 사업가들도 많이 살고 있는 곳이다. 국내에서의 관심도 높고 현장이 어떤 상태인지, 피해 복구는 되고 있는지, 여진이 오지는 않는지, 다양한 정보를 정확히 전달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파견됐지만 공식적으로는 아무런 취재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최대한 공안의 눈을 ‘피해’가면서 ‘피해’지역의 모습을 담고, 무너진 건물들, 복구 구슬땀, 이재민들의 목소리, 한국 유학생이 전하는 당시 상황 인터뷰 등의 아이템을 며칠 동안 제작했다. 취재팀이 여럿이다 보니 한쪽에서 좀 더 큰일이 터지면 그쪽으로 지원을 가기도 하고 멤버가 서로 바뀌기도 하며 이합집산 유동적으로 일하는 가운데 하루는 중국 당 지도부의 높은 사람들이 재난 현장을 방문한다는 소식에 대부분의 인력이 그쪽으로 투입됐다.

  통역 분들이나 중국어 능통 취재기자, 영상취재 선배들은 모두 현장으로 출동했고 홀로 남은 막내인 나의 임무는 지진에 무너진 잉슈 소학교와 주변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것이었다.


  어렵지 않은 취재라 순조롭게 마쳤고 점심 먹고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타이밍에 데스크에게 전화가 왔다. ‘네가 있는 소학교 잔해 속에서 생존자가 발견됐대! 지금 CCTV 속보로 떴어, 여기가 오늘의 메인 뉴스다, 스케치랑 인터뷰는 되는대로 많이, 얼른 제작하라!’ 정신이 멍해졌다. 오전 내내 꿀 빨고 있었는데 갑자기 여기가 태풍이 핵이 되다니…

  되돌아간 소학교에는 구급대와 공안, 기자들이 어마어마했다. 화면을 담는 거야 별 문제없지만 인터뷰가 문제였다.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떠듬떠듬 영어와 한국어로 말을 건넸지만 전혀 통하지 않는다. 옆에 서있던 우리 취재차량 운전기사 호 아저씨가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았지만 중국인인 그는 한국어를 전혀 못하니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오늘 제작은 망했다!’ 긴 한숨만 나오는 순간, 호 아저씨는 옆의 아주머니에게 뭐라고 말을 건넸고 이내 나를 톡톡 치더니 카메라와 아주머니를 번갈아 손가락질했다. 이건 무슨 뜻이지? 와이어리스 마이크를 갖다 대자 호 아저씨가 아주머니에게 뭔가를 물었고 아주머니는 속사포처럼 대꾸했다. 아저씨가 재차 묻고 답하고 두세 번 반복하더니 호 아저씨는 깊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谢谢!” 이… 이게 뭐지? 인터뷰가 된 건가? 우선은 그렇게 다섯 사람의 목소리를 담았고 구조대원에게 구조 상황을 묻는 것까지 성공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본부인 호텔로 돌아가 촬영한 화면과 인터뷰를 서울로 보내야 한다. 가는 길도 쉽지 않다. 재난지역이라 차량 통제된 곳이 많고 공안이 여기저기 없는 곳이 없다. ‘지진 때문에 출입 금지다, 무얼 하러 들어가는 거냐’ 는 공안의 제지에도 호 아저씨는 거침없이 뭔가를 설명하자 이내 통과했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했기에 차단봉을 열어주는지 미칠 듯이 궁금했다.

  그 와중에 어제까지는 보이지 않던 중국 인민해방군 장갑차와 대형트럭들이 ‘재난복구’ 라고 쓴 빨간 천을 매달고 지나다니는 모습을 촬영하는 중 공안에게 딱 걸렸다. 공안이 뛰어오며 호루라기를 부는 소리와 호 아저씨의 다급한 외침이 동시에 들려왔다. 잽싸게 차에 타자 호 아저씨가 내게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도시라서 조심해야 돼, 아까 거기는 시골이라 말만 잘하면 어느 정도 통과되는데 도시 공안들은 다르거든. 얘네들은 말이 안 통해, 그런데 돈은 통하지. 히히!”

  순간 호 아저씨가 나한테 한국어로 얘기하는 줄 알았다. 어떻게 이걸 알아듣는 거지? 위기의 순간에 인간에게는 초능력이 생기나 보다. 아저씨는 운전석 구석에서 비닐 봉다리에 얼기설기 담긴 달걀 볶음밥을 꺼내 내게 건넸다. 소학교에서 숙소까지 두 시간 정도 걸리니 식사를 하라는 것 같았다.  

  “집에서 아침에 만들어 온 거야. 원래는 더 맛있게 할 수 있는데 지진 때문에 장을 제대로 못 봐서 영 허술해. 그래도 이 우롱차랑 같이 먹어.”

  또 완벽하게 이해가 됐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데 어쩜 이렇게까지 의미가 통할 수 있을까. 이러면 신이 애써 내린 바벨탑의 저주가 의미 없어지는 거 아닌가.


  송출한 영상으로 서울 본사에서 기사를 제작했다. 중국어 인터뷰가 괜찮았는지 묻자 왜 물어보는지를 의아해하며 아무 문제없이 완벽했다고 한다. 호 아저씨는 동네 맛집이나 쓰촨성의 관광 명소를 물어본 게 아니라 당신은 어떤 지진 피해를 당했는지, 구조된 아이는 어떤 상태인지, 참사 5일 만에 살아 돌아온 아이를 보는 심경이 어떤지를 정확하게 물어봤다. 훌륭한 인터뷰어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사람들에게 묻는 걸 알아들었던 걸까? 물론 그랬을 리 없다. 그저 느꼈을 거다. 어조와 톤, 분위기를 통해서 내가 어떤 질문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말을 듣고 싶고 담고 싶어 하는지.

  호 아저씨, 아저씨 덕분에 살았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워 아이 니!

    



  ‘뿅! 뿅! 뿅!’

  총이나 미사일을 발사해 적을 없애는 세상의 수많은 게임들. ‘게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소리가 바로 이 ‘뿅뿅’하는 8비트 효과음이다. ‘갤러그, 슈퍼마리오, 보글보글’ 같은 추억의 게임에 빠져 허우적대던 10대 시절, 적을 물리치는 게 짜릿하고 즐겁긴 했지만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패턴이 가끔은 시지프스의 굴레처럼 지겹게 느껴지기도 했다.

  게임기를 끄는 순간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리는 무의미한 파괴의 나날에 지쳐가던 중 친구의 소개로 접한, 매일매일 조금씩 진행하면서 모험을 계속 이어나가게 되는 인생 첫 롤플레잉 게임이 바로 <파이널 판타지3>였다.


  1990년 일본 스퀘어에서 개발한 패미컴용 게임으로 4명의 소년이 위기에 처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는 전형적인 일본식 롤플레잉 작품이다. 게임팩을 본체에 꽂고 전원을 켜면 로고 화면도 없이 곧바로 게임이 시작된다. 깊은 동굴로 떨어진 4명의 아이들이 마물을 물리치며 동굴 끝에 다다르면 ‘랜드터틀’이라는 거북이과의 보스가 기다리고 있다.

  풋내기 검사인 소년들이 힘겹게 거북이를 물리치고 앞에 있는 크리스털에 손을 뻗는 순간… 황홀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서정적인 음악과 함께 작품의 타이틀이 새벽 강가의 물안개처럼 서서히 화면에 번진다. FINAL FANTASY III.



  프로그래밍, 그래픽, 음악, 기획… 만든 사람들의 이름이 한 명 한 명 등장한다.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당당하게 제작진의 이름이 나오는 게임이 있었던가? 처연토록 아름다운 오프닝에 빠져있는 내게 그 이름들은 상냥하게 말 걸어 주었다. ‘이제부터 진짜 길고 긴 모험이 시작될 거야. 힘들고 슬플 때도 있을 거란다. 그래도 감당할 수 있겠니?’

  그때 느꼈다. 나는 이 게임과 사랑에 빠지게 될 것임을. 그것도 아주 깊게. 14년 인생을 살아오며 그 어떤 아름다운 여성을 보더라도 첫눈에 이 정도로 확신이 들었던 적은 없었다. 1994년의 햇살 따사롭던 어느 봄날, 동암중학교 1학년 4반의 수줍은 소년, 파이널판타지3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운명적인 순간이었다.


  기껏해야 스테이지1, 스테이지2 정도로 나뉘던 단순한 게임들과 달리 방위를 살피고 지도를 찾아가며 진행해야 할 정도로 드넓은 세계가 펼쳐지는 작품도 처음이었고, 세이브&로드 기능이 있어서 한 번 즐기고 끝나는 1회성이 아니라 몇 날 며칠에 걸쳐 계속 여행을 떠나는 것도 흥미진진했다.

  마법사, 전사, 수도승, 음유시인, 도둑… 4명의 소년을 개성 넘치는 직업들로 적절히 바꿔가며 진행하는 즐거움, TV화면 가득 차오르는 소환수 바하무트의 위용에 압도당하기도 하고, 8비트 플랫폼의 한계를 뛰어넘는 그래픽과 유려한 음악에 취하며 파이널판타지3의 세계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광대하게 펼쳐지는 이 모험의 언어가 외국어 (일본어) 라는 점이었다. 패미컴의 낮은 해상도 때문에 한자 사용은 불가능하기에 모든 언어는 히라가나로 출력됐다. 평범한 대한민국 소년이니 단 한 글자도 읽을 수 없었고 등장인물들의 대사는 당최 무슨 소리인지 궁금하기만 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스토리를 진행하면 할수록 인물들이 갖고 있는 감정과 생각들이 조금씩 느껴졌다. 사건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와 행동, 결심을 굳히고 뭔가를 하고자 할 때 흘러나오는 음악, 효과음 등에 집중하다 보니 히라가나뿐인 대사가 어느 순간부터 읽히는 느낌이었다.


  물의 크리스털을 지키기 위해 주인공을 대신해 죽음을 택하는 무녀 에리아, 스승에게 꿈의 세계를 물려받았기에 잠을 자며 세상을 지키는 대마법사 우네 할머니, 정신이 이상해진 왕으로부터 성을 탈출해 우여곡절을 겪게 되는 사로니아 왕국의 아루스… 일본어는 몰랐지만 이들의 꿈과 욕망, 열정만큼은 생생하게 느껴져 여정을 함께 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회사 일을 하면서 정말 많은 나라로 출장을 다녔다. 쓰촨성의 호 아저씨만큼이나 인상적인 순간들은 몇 번 더 있었다. 지금은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가난한 나라지만 자기 아이들이 컸을 땐 분명 잘 사는 나라가 되어있을 거라 믿는다던 에티오피아의 운전기사 디바바 아저씨, 금요일 밤이고 취재 일정도 다 마쳤는데 왜 벌써 숙소로 돌아가려 하냐며 일도 중요하지만 시간과 친구는 한 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던 브라질의 가이드 마르타 아줌마. 이 사람들은 분명 자기의 모국어로 말했는데도 대부분 이해할 수 있었다. 비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좋은 예. 눈빛만으로도 진심은 통한다는 것.


  말, 언어라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과연 서로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걸까? 홍대 카페 안에서 싸우고 있는 커플은 서로의 말을 100% 알아듣고 있긴 한 건가? 타국의 언어를 잘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 걸까?

  풀리지 않는 재미난 수수께끼를 갖게 됐다. 돌이켜보면 이런 고민의 출발점이 바로 이 게임이었고 그로 인해 외국어를 전공해서 지금까지 흘러 왔으니 한 인간의 일생에 이토록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게임도 참 드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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