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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단 Jul 06. 2020

우리가 세상에 저항할 때 일어나는 일들

PC게임 <스탠리 패러블>


2군에 소속된 별 볼일 없는 프로야구선수 동치성. 그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바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는 것. 3개월도 채 남지 않은 삶. 어떻게 인생을 마무리할지 고민하던 중 1군 경기에 콜업되어 투수로 깜짝 등판하게 된다. 죽음을 앞둔 스완송이었던 걸까? 인생 최고의 호투로 시합을 하얗게 불태웠고 이제 마지막 한 타자만 잡으면 승리투수가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호흡을 고르며 천천히 와인드업.


“따악!”

투수 앞 땅볼! 동치성은 안정적인 자세로 공을 캐치한다. 관중들은 환호한다. 승리가 바로 눈앞. 이제 선택지는 두 개다. 1루수를 향해 송구하거나, 거리가 좀 가깝다면 본인이 직접 공을 들고 뛰어 1루 베이스를 밟아도 된다. 딱 이거 두 개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그러나 동치성은 순간 멈칫한다. 정말 이 두 가지밖에 없다고? 어차피 곧 죽을 목숨인데 이런 순간조차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그런 게 어딨어? 그렇다면 내 선택은 이거야!



동치성은 몸을 관중석으로 향하더니 있는 힘껏 공을 던진다. 투수 아니랄까 봐 스탠드 저 높은 곳까지 시원하게 쭉쭉 뻗어 나가는 새하얀 야구공. 관중은 물론 같은 팀, 상대 팀 선수들까지 모두 넋 나간 표정으로 훨훨 날아가는 공을 바라본다. 상상도 못 한 선택을 한 동치성 투수. 너무 황당해서 화조차 못 내는 감독에게 한 마디를 남기고 경기장을 떠난다.

“궁금했어요. 땅볼 잡아서 관중석으로 던지면 어떻게 되는지…”


2004년 개봉한 영화 <아는 여자>. 호불호가 갈리는 장진 감독 특유의 연극스러운 코미디 영화답게 관객은 73만 명에 그쳐 흥행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결이 맞는 사람들에게는 매 장면 웃음이 끊이지 않는 최고의 로코 영화였고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나영, 정재영 두 배우의 합도 좋았고 소품 같은 작은 공간에서 주고받는 사랑스럽고 위트 있는 대사들은 감칠맛 났다.



한없이 귀엽게만 흘러가는 잔잔한 영화인데 클라이맥스 부분의 상상력만큼은 기발하면서 짜릿했다. 승리투수가 공을 잡아서 아웃을 시키지 않고 허공으로 던지다니. 영화니까 가능한 엉뚱한 행동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인생의 행로에 갈팡질팡하던 내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야구 선수로 평생을 살아온 동치성. 매일같이 이어지는 훈련, 연습, 시합, 분석… 감독과 코치의 말에 절대복종하는 삶이었을 거다. 그저 시키는 대로 최선을 다하기만 하던 그는 인생 최고이자 최후의 순간에 와서야 세상을 향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파격으로 목소리를 낸다. 양자택일을 해야만 하는 순간인데 둘 다 선택하지 않아 버리는 패기. 다들 조용히 해. 공을 어떻게 할지는 내가 정해. 이것은 나의 야구이고 내 인생이니까!






(아래에는 <스탠리 패러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탠리 아저씨는 평범한 사무직 회사원이다. 출근해서 컴퓨터의 키보드를 딸깍딸깍 누르는 게 업무의 전부. 그런데 오늘따라 상사의 지시가 내려오지 않는다. 업무명령이 없자 뭔가 이상함을 느껴 사무실 바깥을 살펴보니 북적거려야 할 동료들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회사에 자기 혼자 남아 있는 것이다. 스탠리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회사 여기저기를 수색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회사의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는 미스터리 어드벤처 게임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좀 다르다. 2013년에 출시된 인디게임 <스탠리 패러블>에 등장하는 건 스탠리와 해설자 딱 두 사람이다. 이 게임의 시작과 끝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해설자.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그는 일반적인 해설자들처럼 스탠리의 행동이나 주어진 상황을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길을 제시하고, 행동을 강요하며, 임무를 종용한다. 이런 식이다.


“모든 동료들이 사라졌군요. 어떻게 된 일일까요? 스탠리는 회의실에 가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스탠리가 열린 두 개의 문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왼쪽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장실의 비밀번호는 2845입니다. 하지만 스탠리는 그걸 알 턱이 없죠. 하지만 놀랍게도 번호를 아무렇게나 눌렀을 뿐인데 운 좋게 스탠리는 정확한 코드를 입력해버립니다. 멋지네요! 문이 열립니다”


교양 있는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중후한 음색의 중년 남성 해설자. 그의 목소리에는 권위가 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모든 걸 지켜보고 있다. 뭔가 좀 어수룩한 회사원 스탠리는 물론이고 그를 조종하고 있는 방구석 게이머인 우리들 또한 그 위엄 있는 목소리를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여기서부터 갈등은 시작된다. 우리는 그의 말을 따라야 하는 걸까? 근데 왜?



<스탠리 패러블>은 양자택일의 게임이다. 0과 1이라는 디지털의 토대로 쌓아 올려진 ‘컴퓨터’ 라는 매체를 통해 디지털의 본질을 철저하게 표현한다. 0 아니면 1. 이거 아니면 저거. 가거나 혹은 안 가거나. 해설자의 말을 따를 수도 있고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쪽으로 진행하든 게임은 도중에 엔딩이나 게임오버가 되며 어이없게 끝나버리기 일쑤이다. 그러면 스탠리는 첫 화면의 사무실로 되돌아오게 되고 이야기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하지만 일반적인 게임들처럼 완전히 백지에서부터 새롭게 시작되는 건 아니다. 해설자는 전부 알고 있다. 방금 전 어떤 이유에서 게임이 끝났는지, 지금 몇 번째로 다시 하고 있는 건지,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까지 예리하게 지적한다. 그야말로 세계관 속 절대자이다.


해설자가 하는 안내를 그대로 수용하며 시키는 대로만 진행하면 어느덧 게임의 엔딩을 목전에 두게 된다. 목소리가 이끄는 대로 향한 회사 안쪽의 깊숙한 곳, 수백 개의 모니터가 가득한 마인드 컨트롤 센터에 도착한다. 사원 수백 명의 일거수일투족이 여기서 모조리 감시당하고 있었고 스탠리 또한 그중 한 명이었다. 그의 삶은 계속 감시당해 온 것이다. 해설자는 말한다.


그동안 누군가에게 조종당했던 걸까요? 이것이 스탠리가 그 지루한 일에 행복감을 느꼈던 이유일까요?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조작되었던 것일까요? 그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납득할 수 없었어요. 내 삶이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었다고? 절대 아니야! 그러나 안쪽 방에는 감정 제어 장치들까지 있습니다. 행복. 슬픔. 만족. 이 기계장치들이 다시는 다른 사람의 삶에 끔찍한 간섭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시스템 장치 오프!

그래요! 그는 승리했습니다. 기계를 쓰러뜨리고 누군가의 조종에서 벗어난 겁니다. 하지만 동료들이 어디로 갔는지, 수상한 이 회사의 수수께끼는 그대로네요. 그래도 건물 밖으로 나서자 이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가 쫓던 것은 지식도 힘도 아닌 단지 행복이었으니까요. 어쩌면 그의 목표는 이해가 아니라 그저 이렇게 모든 걸 흘려보내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스탠리는 이제 열린 문으로 걸어 나갑니다. 그는 자신의 피부를 스치는 서늘한 바람을 느낍니다. 자유의 감촉… 스탠리는 행복합니다.



와, 해피엔딩이다. 그런데 이 불편한 느낌은 뭐지? 분명히 해설자가 내리는 지시대로 움직여서 뭔지 뭐를 수상한 기계의 작동까지 정지시켰다. 영웅적으로 임무를 완수한 건데 뭔지 모르게 찜찜하다. 해설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100% 따른 끝에 마침내 얻게 된 자유… 그런데 이걸 ‘자유’라고 부를 수 있는 건가?

그래서 이번에는 중간중간에 반항을 조금 해보기로 했다. 해설자가 가리키는 대로만 가지는 않았다. 소심하지만 약간씩은 주체적인 삶을 살아보는 걸로. 자아를 갖고 스탠리를 움직이기 시작하자 해설자는 불편함을 감추지 않았다. 왜 자기 말을 안 듣냐며 언짢아하고 비아냥대더니 나중에는 격노하기에 이르렀다.


스탠리는 누가 이런 계획을 세웠는지 궁금했고 마침 음성인식기가 달린 문을 발견했습니다. 당연히 이 문의 뒤에는 모든 답이 있을 테죠! 그리고 정말 운 좋게도 그는 암호를 알고 있었습니다. 저번 주에 사장의 컴퓨터에서 우연히 봤죠. Night shark 115. 이 코드가 문을 열어줄까요? 아직도 작동할까요? 방법은 한 가지뿐. 그는 살짝 숨을 들이켜고 코드를 말했습니다! …흠흠 …스탠리는 암호를 말했습니다… …

…미안한데 혹시 무슨 문제 있나요? 제 말 들리죠? 인식기에 암호를 말해요.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된다고요. 아주 중요한 절차예요. …좋아요. 알았어요. 안 하겠다는 거군요. 근데 그거 알아요? 기껏 여기까지 이끌고 왔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비협조적으로 나오다니 굴욕적이네요.

전 하나밖에 바라지 않았어요. 당신의 존중이요. 제가 보여주려는 걸 보기 싫었다면 대체 여긴 왜 온 거예요? 당신도 알다시피 당신은 선택권이 있었어요. 당신은 오른쪽에 있는 문을 통과할 수도 있었잖아요! 거기에서는 당신이 원하는 게 뭐든 간에 할 수 있었다고! 왜 여기 온 거야? 말해! 뭐라도 좀 말해보라고! 너 자신을 설명해봐 이 겁쟁아!!



이 정도면 이미 게임이지만 게임이 아니다. 아름다운 풍경과 감미로운 음악도 없고 눈물이 주륵주륵 흐르는 스토리도 없다. 그저 계속해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할 거야 아니면 안 할 거야?’ 시키는 대로 하면 편안하게 엔딩으로 향할 수 있다. 어떠한 고민과 사유도 필요 없다. 화창한 햇살이 기다리고 있는 매트릭스 안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 뒤통수에 굵직한 케이블이 꽂힌 채 꿈만 꾸는 노예의 삶이지만 그래도 안락하기만 한 걸. 그에 비해 해설자의 말을 거부하고 저항하면 스탠리의 행보는 꼬이기만 한다. 게임 진행은 멈춰지고 도중에 끝나버리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는다든지 모욕도 당하고… 난리도 아니다.


<스탠리 패러블>은 제목 그대로 스탠리에 대한 우화이자 우리에게 들려주는 우화이다. 자기도 게임인 주제에 게임이라는 매체를 자아비판하는 발칙한 작품. ‘너희는 게임이 재밌니? 누르라는 걸 누르고, 정해진 동굴에 숨겨놓은 전설의 검을 찾고, 다 세팅해 놓은 마왕을 무찌르고, 마지막에는 공주를 구출하고… 이런 게 정말 재밌어? 하라는 대로만 하는 일방통행이 그렇게 신나?’ 무비판적으로 게임을 소비하는 게이머를 깜과 동시에 주구장창 비슷하게 나오는 양산형 게임들 그리고 그런 공산품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게임 회사에 이르기까지 업계 전체를 아주 시원하게 탈탈 털어버린다.


하지만 나에게는 자아비판 뿐만 아니라 좀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해설자가 그저 말 많고 비꼬기 좋아하는 영국 아저씨 개인이 아니라 이 세상 그 자체로 보였기 때문이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체제, 환경, 시스템, 정부, 종교’ 같은 거라고 할까? 강대한 힘과 권위를 갖고서 개인을 억압하며 통제하고 있는 모든 것들. 해설자는 스탠리와 나에게 바로 이런 존재였다.

‘주어진 길로만 가라 그것이 정답이다. 예외는 곧 낙오일 뿐이다. 수천 년에 걸쳐 구축된 이 세상의 시스템은 한낱 개인이 거부할 수 있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야. 네깟 게 어디 감히. 체제에 저항하지 마. 너는 그저 시키는 대로 착취당하면 돼.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인생이니 그냥 받아들여’



우리는 ‘다름’을 단 한 번도 인정받아 본 적이 없다. 때 되면 대학가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낳고, 34평 아파트사고, 자식 뒷바라지하다가 죽어야 한다. 하나라도 빠트리면 세상은 용납하지 않는다. 피부색, 취향, 관점, 가치관 중 무엇이든 대중과 다르면 곧바로 배척당한다. 차를 사러 매장에 갔을 때 딜러는 잘 다듬어진 매끈한 화술로 내게 말했다.

“잘 보셨어요. 이 차 정말 좋지요? 주말에 사모님이랑 아이들 태우고 피크닉 가기에 딱이에요.”

“아뇨, 제가 혼자라…”

“아, 아아… 그럼요 요즘 다들 결혼 늦게 하지요. 싱글라이프 부럽습니다 하하! 뒷자리가 넓어서 부모님 모시고 여행 다니기에도 너무 좋아요.”

“부모님이랑은 의절했어요.”

“아… 아 네에… (식은땀)”

중년 남성이 수입차 전시장의 SUV에 시승하고 있었으니 딜러의 추측이 크게 잘못됐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때부터 그들의 시선이 뭔가 좀 탐탁지 않고 껄끄럽게 변한 건 그저 기분 탓이었을까? 아니면 주류들이 보기에는 영 아웃사이더인 내가 그들의 세계에 실제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걸까.


<스탠리 패러블>은 말한다. ‘네가 선택해. 시키는 대로만 하는 거 재미없잖아. 그리고 보이는 선택지가 전부라고 속단하지도 마. 다른 게 있을 수도 있잖아?’ 이 게임의 수많은 엔딩 중에는 제작자가 아주 노골적으로 우리에게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엔딩이 있다. 좌충우돌 회사를 뛰어다니다가 압착 기계에 끼어 스탠리가 죽게 되는 순간, 게임상에 최초로 등장하는 제3의 인물, 여성 해설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기계는 스탠리의 모든 뼈마디를 부숴버렸고 그는 즉사했습니다. 하지만 불과 몇 분만 있으면 스탠리는 게임을 재시작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쩡히 살아서 사무실에 앉아있겠죠. 해설자는 도대체 그가 무엇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당신에게 허락된 모든 길이 미리 정해져 있다면 죽음도 삶도 의미가 없을 텐데요.

보이십니까? 시작하는 순간 이미 스탠리는 죽은 목숨이었다는 사실이 이제 보이시나요? 해설자와 스탠리, 이 두 사람을 좀 보세요. 서로를 어찌나 망가뜨리고 지배하고 싶어 하는지. 그러면서 또 얼마나 자유를 갈망하는지. 저 모습이 보이시나요? 서로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보이시냐고요? 아니 보이지 않으시겠죠. 때때로 그런 것들은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

하지만 제 말을 들으세요. 아직은 저 둘을 살릴 수 있습니다. 둘 다 죽기 전에 프로그램을 꺼버릴 수 있다고요. ESC를 누른 다음 ‘나가기’를 고르세요. 그 외에는 게임을 깰 방법이 없습니다. 멈추세요. 그게 당신의 진정한 선택이 될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직접 선택하세요! 시간이 선택하게 내버려 두지 말아요.



게임이 말한다. 게임 그만하고 여기서 나가라고. 이런 선택지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참으로 고급스러운 우화이자 가혹한 자기비평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낯선 스타일 때문인지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극과 극의 평가를 오갔다. ‘게임은 어째서 예술이 될 수 없는가. 먼 훗날 게임이 예술의 경지에 이른다면 <스탠리 패러블>은 그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할 게 분명하다. 메타픽션의 함의로 구축한 희대의 걸작’ 같은 극찬에서부터 ‘게임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하다. 아무런 재미도 의미도 없고 제작자의 개똥철학만 하루종일 읊어대는 쓰레기. 비주얼 노벨보다도 못한 망겜’ 이라는 평가도 상당수다. 그야말로 호불호가 첨예한 논쟁작.


인터넷의 게임 후기를 검색해보면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그림을 차용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사람들이 많다. 나 또한 그 작품이 떠올랐다. 언어와 이미지 사이의 괴리를 충격적으로 선보였던 1929년의 유화 그림은, 게임과 현실 사이의 관계성을 파격적으로 변주한 2013년의 게임 소프트웨어로 계승됐다. 스팀에서 절찬 판매 중인 상업 작품이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그런 게임이 아니라고, 즐기지 말아 달라고 역설하고 있는 모순 덩어리 타이틀. 게임이면서 게임이 아닌 작품. 도대체 이 문제작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초입에 한 말을 정정하겠다. <스탠리 패러블>은 양자택일의 게임이 아니다. 항하사, 나유타, 무량대수 정도의 선택지가 세상에는 무한히 펼쳐져 있으며 그 선택지를 깨부수는 것 또한 훌륭한 선택 중 하나라는 걸 우리에게 보여준다. 체제가 규격화시켜놓은 표준 정답들만 가득한 세상에서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하고, 괜찮으면 그런 방향으로도 한 번쯤 걸어가 보라고 담담하게 추천해주는 작품.

어쩌면 이제 우리에게는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가 아니라 27인치 LG모니터 앞에서 생의 깨달음을 얻게 되는 날이 찾아온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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