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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단 Jul 29. 2020

독재자가 만들어가는 따스한 지상낙원

PC게임 <트로피코6>


“트리플 크라운 달성이다!!”

대학생 시절에는 카메라를 들고 데모를 취재하는 입장이었다. 의경 시절에는 방패를 들고 데모를 막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2012년, 드디어 피켓을 들고 데모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이로써 집회 현장의 모든 인간군상이 직접 되어보는 업적을 이뤄냈다.


2012년. 당시 대통령인 MB는 옳은 소리만 따박따박 해대는 방송국들이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천부적인 사업가 기질을 발휘해 미국 소고기도 수입하고, 한반도 대운하도 파고, 원전도 짓고, 인천국제공항도 팔아 재끼면서 이래저래 뒷돈 좀 만지고 싶은데 하는 족족 딴지만 걸고 장단은 안 맞춰주니 얼마나 얄밉겠어. 그래서 자기에게 충성스런 심복들을 KBS, MBC, 연합뉴스의 사장으로 꽂아 넣었다. 공영방송의 수장들 모가지가 하루아침에 날아가는 판국이니 사주가 있는 민영 언론사들은 말할 것도 없이 알아서 설설 기었다. 엄혹한 시절이 오고야 만 것이다.


‘한미FTA 반대시위’ 취재를 나갔다가 시민들에게 쌍욕을 먹으며 쫓겨난 M본부의 한 촬영기자는 회사 게시판에 비분강개의 글을 남겼다. “사원 여러분 이게 뭡니까. 국민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습니까? 욕지거리 들어가며 현장을 취재해오면 뭐합니까 뉴스에 나가질 않는데?  권력자가 불편해하는 기사는 출고조차 안 되는데 언제까지 용비어천가만 부를 겁니까!” 입사 4년 차밖에 안된 병아리 후배의 사자후에 선배들은 얼굴을 들 수 없었고 이 글이 트리거가 되어 ‘2012년 대한민국 언론노조 파업’은 시작됐다.



[폐지된 시사프로그램 복원, 해고된 진행자·PD·기자 복귀, 낙하산 사장 퇴진, 불공정·편파보도 금지] 사원들의 이런 요구사항에 M본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협상의 의지 자체가 없었다. ‘의견은 좀 다르지만 그래도 대화로 풀어가야 할 우리 식구’가 아니라 ‘최후의 한 명까지 척살해야 할 적’으로 사원들을 대했다. 이런 대치상태는 무려 6달이나 이어졌다. 월급이 모조리 끊겼는데도 파업을 이어가는 선배들이 신기했다. 나야 홀몸이라 삼시세끼 라면만 끓여먹으며 어떻게든 지출을 줄인다지만 아이들 학비에 가족들 생활비, 부모님 병원비에 은행 대출까지 상환해야 하는 가장들은 수입 0원으로 도대체 어떻게 생계를 이어간단 말인가.


회사도 이런 약점을 너무나 잘 알기에 치사하고도 집요하게 유혹했다. 2012 런던올림픽을 앞두고 방송 인원이 많이 필요해지자 사측은 계속해서 유혹의 문자를 보냈다. 그럴듯한 말로 포장했지만 결국은 돈이다. ‘올림픽 방송은 해야지 않겠는가? 돌아오는 노조원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고 월급은 물론 파업 불참 수당으로 1주일에 수십만 원씩 웃돈 얹어주겠다’ 치욕적인 제안이다. 이깟 돈 몇 푼으로 언론인의 자존심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라고 외치고 싶지만 문자를 보고 사무실로 일하러 돌아간 사람들도 분명 있었다. 씁쓸한 현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아들을 위해 동료들에게 배신자라는 욕을 들으면서도 탄광으로 돌아가는 아버지가 떠올라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들도 물론 고통스러웠겠지.



투쟁은 170일 동안 이어졌지만 결국 ‘무승부에 가까운 판정패’ 정도로 졌다. 열심히 파업했던 친구와 동료들은 해고, 정직, 징계를 받아 재판에 끌려 다니거나 지방으로 쫓겨났고 아이스링크장 청소, 촬영세트장 관리, 브런치 만들기 교육이나 받는 굴욕의 나날을 보냈으며 회사는 거침없이 우경화의 길을 걸었다. 공주님이 당선된 18대 대통령 선거, 세월호 침몰, 최순실 국정농단 등으로 이어지는 굵직한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잔뜩 편향되고 공정하지 못한 방송만을 내보내며 M본부는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내상을 입었고 그렇게 ‘만나면 좋은 친구’는 우리 곁을 떠나갔다.


한 번 떠나간 좋은 친구는 2020년인 오늘에서도 완전히 돌아오지 못했고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이미 유튜브와 SNS라는 더 좋은 친구와 찐베프가 됐는데 이제 와서 같이 좀 놀아달라는 M본부의 소심한 목소리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 공허하기만 하니… 에휴, 불쌍한지고.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트로피코’. 광물·어류·삼림자원 풍족하고 비옥한 토양은 곡물농장이나 가축 기르기에도 적합하다. 언제나 화창한 날씨에 자연재해도 없어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파라다이스. 이 작은 섬나라를 통치하는 독재자(!)가 되어 다양한 사상을 가진 국민들의 지지를 한 몸에 얻고 열강들 사이에서 외교의 균형을 이뤄 아름다운 지상낙원을 만들어가는 게임 <트로피코6>.


얼핏 보면 건설 시뮬레이션의 명가인 <심시티> 계열의 도시건설 작품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알고 보면 많이 다르다. 주거 건물을 짓고 도로를 놓고 일자리를 창출하고… 주민들의 윤택한 삶을 위해 도시를 하나하나 쌓아 올리고 조율하는 건 같지만 이 과정들 사이에는 뭔가 나사 하나 빠진 듯 잔뜩 비뚤어지고 엉뚱한 풍자와 블랙코미디가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1인 장기집권 중인 독재자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단어 ‘독재’. 바로 그 독재자가 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마구 휘둘러 볼 수 있다니 이보다 더 매력적인 설정이 어디 있을까. 우리도 궁정동 안가의 주인이 되어 마음껏 세상을 쥐락펴락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기대감을 갖고 게임을 시작하지만… 다들 머지않아 좌절하게 된다. <트로피코6> 속의 독재는 우리 생각보다 어렵다. 그것도 아주 많이.


표면적으로는 정기적인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열대의 섬나라 트로피코. 주인공 마음 같아서야 선거 자체를 없애버리고 싶지만 여러 나라들과 무역을 통한 외교관계도 유지해야 하고 관광객도 유치해야 한다. 그러려면 글로벌 스탠더드에 발맞추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기에 일단은 법으로 정한 선거제도를 존중하며 합법적인 권력 유지의 형태를 취한다. 작은 섬나라지만 제각기 생각이 다른 국민들, 그들 하나하나가 투표권을 갖고 있다. 유권자의 지지율을 높이지 못하면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 때문에 독재를 하기 위해선 국민들의 고용, 건강, 교육, 복지, 여가 등 모든 부분을 행복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가만, 말이 좀 이상하다? 나라를 내 맘대로 찜 쪄 먹고 싶어서 독재자가 되겠다는 건데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 한 명 한 명 삶의 질을 높이고 그들의 요구사항에 귀 기울이며 국가정책에 불만은 없는지 가정생활에 힘든 부분은 없는지 끊임없이 신경 쓰며 노력해야 한다? 이거 뭔가 좀 모순인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이게 이렇게 아름답고 교육적인 작품이었나.


그렇지 않다. 이 게임의 백미는 바로 지금부터다. 높은 득표율로 재신임을 받아 권좌를 영원히 차지하고 싶어 하는 독재자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뭘까? 나라를 움켜쥐고자 하는 이에게 가장 필요한 두 가지를 이 작품은 정확하게 짚어준다. 바로 ‘돈’과 ‘표’. 이는 곧 ‘부정축재’와 ‘여론조작’으로 이어진다. 독재자는 이 둘을 손에 쥐기 위해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교회에서 예배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종교세, 레저를 즐기러 오는 관광객들에게는 관광세, 부자에게는 부유세를 받아 챙긴다. 범죄를 저지른 외국인들의 이민은 돈을 받고 허용해주고 세계적인 조세피난처가 되어 다국적 기업들의 검은 돈도 한껏 끌어 모은다. 건축 허가제를 실시해 건물이 하나 지어질 때마다 뒷돈을 챙겨 스위스 비밀계좌로 이체해 비자금을 조성한다. 선진국들이 환경오염과 여론악화로 꺼려할 때 트로피코의 바다를 핵실험장으로 제공해 열강들로부터 단단히 한몫 챙기는 것도 가능하다. 방사능 오염? 국민 건강? 돈 앞에서 그런 건 안중에도 없지.


그저 모든 게 돈이다. 발전소, 항구, 소방서, 형무소 등 공공기관의 안전 관련 예산을 있는 대로 쥐어짜면 확실히 코스트 다운은 된다. 정리해고를 통해 근무자는 줄이고 월급도 깎는다. 그러면 기관의 운영 효율은 떨어지고 여차하면 큰 사고마저 발생할 수 있지만 당장 눈앞의 비용만큼은 확실히 아낄 수 있고 그 돈은 고스란히 독재자의 주머니로 들어온다. 조금만 비열해지면 돈 벌기 참 쉽다. 이렇게 축재한 돈을 이용하면 특정 집단이나 정치인을 매수할 수도 있고 심지어 부정선거까지도 가능하다! 머니 파워!



그 다음은 여론이다. 여론조작은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진행된다. 신문사, 라디오방송국, TV방송국 등이 존재하는 트로피코에서 우리의 독재자는 대언론 스탠스로 다음 중 하나를 정하게 된다. [언론통제, 자유언론, 어용언론] 미디어가 무한한 표현의 자유를 갖고 정부를 날카롭게 비판하도록 놔둘 수도 있고 아니면 선정적인 가십거리와 소문, 폭로 같은 것만 취급하는 우민화 정책의 선봉장으로 키울 수도 있다. 혹은 언론사에 각종 보조금과 선심성 기부, 급여 보전 등으로 달콤하게 길들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렇게 언론법을 제정하고 나면 세세하게 각 회사의 논조와 성향까지 지정할 수 있다. 독재자에 대한 찬양만 하루 종일 내보낼 수도 있고 보수적, 진보적, 친환경적, 자본주의적, 공산주의적인 색채로 라디오 프로그램이나 TV방송을 편성할 수 있다. 픽션을 표방한 게임이지만 마냥 허무맹랑한 것도 아니다. 지구 상의 여러 독재국가에서는 지금도 엄연히 자행되고 있는 현실이고 멀리 갈 것도 없이 2014년 대한민국에서도 비슷한 일은 있었다. 청와대 홍보수석이라는 어마어마한 직위의 인물이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최고 존엄께서 불편해하시니 비판 기사를 내보내지 말라고 부탁 (의 탈을 쓴 명령) 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언론은 구워삶고 거리 곳곳을 자신의 동상과 간판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면 국민 선동은 별문제 없이 완성된다. 어떤 잘못을 하던 국민들은 알 도리가 없고 지지율은 쑥쑥 올라간다. 의식 있는 시민단체들이 잘못된 정책에 대해 항의하거나 집회를 열기도 하지만 경찰력을 동원해 시원하게 진압해버리면 그만이고 미디어에서는 일절 다뤄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감히 정권에 저항하며 가열차게 투쟁하는 정치 지도자나 민주화 인사가 있다면 돈으로 매수하거나 적당한 이유를 갖다 붙여 감옥에 쳐 넣으면 된다.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때는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면 되고 최후의 수단으로는 교통사고를 가장해 암살해버리는 걸로 깔끔하게 해결! 이건 뭐 트로피코가 아니라 트로피코리아 아니냐?


물론 게임 속의 지도자가 무작정 피로 물든 독재의 길만을 걷는 건 아니다. 무상급식, 아동수당, 공공주택, 장학제도, 다문화주의 등 급진적인 복지정책들이나 친환경농업, 자연방목가축처럼 수익성보다는 환경을 소중히 여기는 법령도 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다. 단지 자극적인 맛이 덜해 유저들의 선택을 못 받을 뿐이지 메뉴 자체는 얼마든지 구비되어 있다.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겨운 라틴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펼쳐져 있는 각양각색 지도자의 길. 철권통치의 독재자가 되든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되든 게임의 향방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렸다.



<트로피코6>는 분명 블랙코미디를 표방한 재밌는 게임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게이머들은 분명 낄낄대며 이 작품을 즐길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하면 할수록 놀라운 현실성과 치밀한 고증에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실제로 우리 곁에서 벌어진 일들. 아니 사실은 지금 이 시간에도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 가슴 아픈 비극이 희화화되어 컴퓨터 안에서 재현되는 모습이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재밌으라고 만든 작품이지만 나 또한 그 풍자의 당사자 중 하나니까. 아직도 마음속 생채기가 치유되지 않은 사람들이 한가득인데 웃음이 나올 리가.


시간이 많이 흘러 “그땐 장난 아니었다구, 백주 대낮에 PD가 검찰 수사관들한테 수갑 채워져서 끌려갔다니까” 라고 말했을 때 “에이 말도 안 돼요 할아버지. 무슨 그런 영화 같은 일이…” 이렇게 핀잔 들으며 부정당하는 세상이 언젠가는 꼭 오기를.

그리고 한때는 드라마 왕국이었고, 질풍노도의 청년 시절 가장 많은 웃음을 선사해준 무한도전이 있던 회사, M본부도 한결 건강해져서 언젠가는 슬며시 우리 곁에 다시 돌아오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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