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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단 Aug 30. 2020

웃으려고 회사 다니는 건 아니잖아요


10년이 넘는 회사 생활 동안 한 부서에서만 계속 일하다 작년에 처음으로 ‘발령’이라는 것을 받아 부서 이동을 하게 됐다. 크게 보면야 그 밥에 그 나물이지만 그래도 일하는 사무실도 바뀌고 근무 패턴도 살짝 바뀌는 터라 약간의 기대와 걱정, 기분 좋은 설렘을 안고 첫 출근을 했다. 부서원들이라고 해봐야 이미 다 아는 사람들이라 적응이라고 할 것도 없어서 이튿날부터 현업에 투입됐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 하나 있었다. 우리를 지휘 감독하는 부서장 또한 새로 발령받아 오게 됐는데 그가 바로 D부장이었다. 똑같은 사원이던 시절, 동등한 한 명의 구성원으로 일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관리자로 승진해 열 명에 이르는 부하 직원을 통솔해야 하는 중책을 맡게 되자 그동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다.  첫 일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하자 부장이 물었다.


“모단씨, 오늘 다녀온 일은 어땠나?”

“네 부장님, 완벽합니다. 아주 그냥 100% 완수하고 왔습니다.”

회사원이 자기 맡은 일을 100% 완수했다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게 어디 있나. 하지만 내 대답을 들은 부장의 얼굴은 미묘하게 굳었다. 뭐지? 무슨 문제가 있나?   

“100? 100% 해냈다고? 그러면 어떡하나 이 사람아. 우리는 한 번 나가면 130~140% 정도는 해내야 되는 거지. 동료나 부장이 시키지 않은 일까지도 스스로 알아서 해야 우리 부서와 조직이 더욱…”


처음에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그리 위트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제 막 부서에 발령 온 후배가 혹시 적응 못하고 긴장할까 봐 이런 식으로 장난도 쳐주고… 아주 좋은 사람이었네… 하하… 그게 아닌가? 아닌 것 같다. 저 표정은 찐이다. 가볍게 건네는 농담이 아니다. 근엄한 얼굴로 눈만 꿈뻑거리고 있는 D부장. 이건 진심이다. '회사원이 그저 맡은 일만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보다 훨씬 더 초과 달성해야 한다!' …아니 이게 무슨 되도 않는 멍멍이 소리야?! 야, 정 원하면 월급을 150% 줘봐! 그러면 나도 150% 일해 줄게!


그때부터 그의 세치 혀에선 전형적인 멘트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주인의식을 가지라거나 (내가 주인이 아닌데 왜?) 맡은 일만 하는 건 노예라거나 (제대로 보셨네요, 우리가 지주는 아니잖아요) 선수 한 명 한 명이 모두 감독이라는 생각으로 시합에 임해야 한다는 둥 (감독의 권한은 1도 주지 않으면서 실패했을 때의 책임만 나눠지자는 거잖아요) 감언이설을 시도 때도 없이 읊어댔다.


동호회가 아닌 영리를 목적으로 한 회사 생활이기에 이 정도 스트레스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참기 어려운 순간이 있었으니 작년에 영화 <어벤저스: 엔드게임>이 막 개봉했을 때의 일이다. 유력 주인공 중 누가 죽느니 어쩌느니 하는 스포일러 주의령이 한창이던 때 바쁜 일정으로 개봉 2주가 지나도록 영화를 못 본 것이다. 근성을 발휘하여 인터넷의 감상문이나 패러디들을 가까스로 피했고 결국 아무 내용도 모르는 순백의 상태로 다음날 극장 예매를 해뒀다.


D부장과 나를 포함한 선후배들 몇 명이 함께 점심 식사를 하러 회사 근처의 식당에 갔다.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하던 중 부장이 불쑥 말을 꺼냈다.

“다들 어벤저스 봤나? 요즘 핫하잖아. 내가 어제 아이들이랑 같이 가서 봤는데 말이야, 와… 마지막에 나는 걔가 죽을지는 몰랐지 뭐야…”

이대로 두면 마지막 스포일러까지 거리낌 없이 발설할 기세였다. 그때 옆에 있던 선배가 조심스레 부장을 말렸다. ‘아유 부장님, 아직 못 본 사람들도 많은데 말씀하지 마시죠. 허허. 내용 알고 보면 무슨 재밉니까’ 예의 바른 만류였지만 통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못 본 건 내 알바 아니라는 듯 부장은 그 자리에서 자기의 감상평과 함께 시원하게 모든 걸 내뱉었다. 고개만 절레절레 내저을 뿐 ‘결말 유출’이라는 거악에 대항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가 한없이 초라했다.


이때부터 마음속으로 그에게 ‘어벤저스 결말이나 스포하고 다니는 상종 못할 인간!’ 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렸다.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는 몹쓸 사람 같으니라구. 직속 부서장이라 마냥 안 볼 수도 없으니 딱 필요한 업무 위주의 소통만 하며 형식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D부장이 원한 건 그런 게 아니었기에 우리의 관계는 바야흐로 최종 국면에 접어들었다.


아이템 제작을 마치고 부장에게 보여주는 내부 시사 시간. 5분 남짓한 짧은 클립이니 스윽 한 번 보고 통과되거나 ‘뒷부분은 이렇게 좀 바꿔서 편집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같은 지적 사항이 있으면 그 부분을 수정하는 걸로 마무리되는 편이다. 제작에 대한 피드백이 다 끝나자 D부장은 단 둘이 있는 1평 남짓한 좁은 편집실 안에서 내 어깨를 주물럭거리며(!) 그윽하게 말을 건넸다.


“모단씨, 요즘 뭐 고민 있어?”

“고민이요? 아뇨, 그런 거 전혀 없습니다 (일단 터치는 하지 마시고…)”

“그래? 아니 요즘 나만 보면 통 웃지를 않아서 말이야.”

“(띠용~!) 네? 웃… 웃지를 않는다구요? 아니 부장님, 저희가 웃으려고 회사를 다니는 건 아니잖아요. 저희가 하는 건 업무 아닙니까. 지시를 내리시면 저는 그 내용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맡은 임무를 잘 해내는 게 중요하지 웃고 안 웃고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에이… 그건 아니지 이 사람아. 우리가 어디 일만 하려고 모인 사람들인가? 다 같이 웃으면서 가족처럼 지내려고 모인 사람들이지…”


역린이 대폭발 하는 순간이었다. 가족? 가족이라고? 가족이랍시고 서로 얽히고 집착하고 소유물로 취급하는 가부장제도가 싫어서 독립한 지가 어언 십수 년인데 회사에서까지 가족 운운하는 소리를 들어야겠나! 이쯤 되면 막 나가자는 거지 싶어 같은 톤으로 응수했다.

“부장님, 가족 같은 건요 부장님 댁에 가서 찾으시구요… 여기는 회사예요. 저희는 어디까지나 비즈니스로 만난 거고 일을 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입니다. 누가 웃든 안 웃든, 바지를 입든 치마를 입든, 결혼을 하든 안 하든 그런 거에 신경 끄세요. 이건 부탁이 아니라 경고입니다 부장님. 부하직원들에게 웃음 강요 같은 건 용납할 수도 없고 다음에는 정식으로 문제 제기할 거니 그렇게 알고 계세요.”

“아니 이 사람이, 내… 내가 언제 뭘 강요했다고… 웃으면서 일하면 좋은 거지…”

이날의 언쟁 이후 D부장과는 급속도로 소원해졌고 다음 인사이동 시즌에 나는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났다. 형식상으로는 부장이 날 쫓아내는 모양새였지만 정말이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짐을 싸던 그날의 유쾌함이란! 


그가 나쁜 사람인 건 아니다. 그저 ‘옛날’ 사람인 거지. 지금과는 달리 방송이라고는 K본부와 M본부뿐이라 미디어 시장을 사이좋게 반반씩 독점하며 꿀 빨던 시절. 일단 입사만 하고 나면 평생 고용 보장! 경쟁이고 뭐고 없으니 ‘형님 아우’ 하면서 다들 사이좋게 지내고 주말에는 부서 등산, 휴가철에는 사원 가족들끼리 바다로 놀러 가 이웃사촌처럼 애틋하게 지내던 시절… 그렇게 공과 사의 구분 없이 ‘그저 좋은 게 좋은’ 한 평생을 보내온 D부장의 시선으로는 요즘의 삐딱한 젊은이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저 ‘노오오오력이 부족한 녀석들’로만 보이겠지. 

시대에 발맞추기를 포기한 낡은이들이 사회 곳곳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모순의 시대. 쉽지 않겠지만 적어도 우리 꼰대만큼은 되지 않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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