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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단 Aug 27. 2020

삼계탕집의 연인


작년 여름, 청와대 근처에서 일이 끝나 팀원들과 같이 식사를 하러 근처의 유명한 삼계탕 집으로 향했다. 한 끼 식사라기엔 가격이 상당하지만 요 며칠 빡센 촬영으로 다들 고생한 터라 큰맘 먹고 들어갔다. 복날도, 주말도 아닌 평범한 목요일 오후 1시인데도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6인 테이블로 안내된 우리 자리에는 이미 커플로 보이는 20대 초반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우리 넷도 적당히 낑겨 앉았고 주변에는 가족, 중국인 단체 관광객, 동창 모임 등 많은 손님들이 정겹게 식사를 하거나 음식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실례가 아닌 선에서 슬쩍 옆자리의 연인을 스캔했다. 검은색 박시한 오버사이즈 커버낫 티셔츠를 커플룩으로 맞춰 입은 두 사람. 하얀 얼굴과 대비되게 엄청나게 쎈 스모키 메이크업을 한 여성분의 귀에는 피어싱과 귀걸이가 주렁주렁 한가득이었고, 남자분은 각종 타투가 손과 팔에서부터 목을 타고 올라와 귓바퀴까지 강렬하게 이어졌다. 맛집 찾아 멀리서 온 외국인 커플인가 싶었지만 소곤소곤 주고받는 대사가 분명 한국어인 데다가 핸드폰에서 ‘까똑!’ 하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한국 사람 확정. 개성이 철철 흘러넘치면서도 아주 느낌 있는, 쎈 커플이었다.


‘삼계탕보다는 셱셱버거가 좀 더 어울릴 것 같은 비주얼인데… 아냐 이런 건 편견이야. 그래 한국인의 소울푸드는 역시 뜨끈한 탕이지’ 같은 뻘 생각을 꽤 했는데도 음식이 나오지 않았다. 평소보다 속도도 늦고 주문착오 테이블도 나오는 등 홀서빙이 영 매끄럽지 못했다. 원래 계시던 분이 몸이 안 좋아 처음 일해보는 대타가 나왔을 수도 있고, 주방장이 여름휴가를 간 걸 수도 있고 원인은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소란스러운 가운데 우리가 주문한 삼계탕이 나왔다. 김이 모락한 뽀얀 닭국물을 막 한 수저 뜨는 순간 옆 커플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왜 우리보다 늦게 온 사람들 게 먼저 나와?”


그렇다. 저분들이 분명 우리보다 한참 먼저 와서 앉아있었는데 우리가 시킨 네 그릇이 먼저 나왔다. 이건 아니지. 이거는 직장인 점심 상도의에 완전 어긋나는 국룰 위반인데? 조금만 더 일찍 어필하셨으면 우리 삼계탕을 건네 드렸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숟가락을 담가버린 상태라서 그건 힘들고… "그리고 저기 건너편 할머니들보다도 우리가 먼저 주문했잖아. 근데 저 할머니들은 음식 나왔단 말이야!" 여자분의 언성이 조금씩 높아졌다. 백번 천번 이해한다. 나 같아도 열 받았을 거다. 그때부터 나의 걱정스런 시선은 여자친구 앞에서 팔짱을 낀 채 묵묵히 듣고만 있는 남자에게 향했다.


몸 이곳저곳 현란하게 새긴 강인한 문신. 나는 세상의 고루한 시선과 규율 따위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선전 포고. 그런 나의 눈앞에 지금 기성세대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여자친구가 있으니. 내 사랑을 위해서라면 그야말로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남자…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이었다. 워낙 많이 봤기 때문이다. 여자들 앞에서 가오 좀 잡겠다며 쎈척하다가 사고 치고, 자기 여자친구를 기분 나쁘게 쳐다봤다는 이유로 주먹과 술병이 날아다니는 등 아드레날린과 테스토스테론이 폭발하는 시기의 철부지 남자애들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사소한 이유로 문제를 일으키고 인생을 망치는지 수십 년간 지겹게도 봐왔다.


조마조마했다. 어르신들도 많은 식당이고 외국인 관광객도 잔뜩 있는데… 해골반지 낀 저 손으로 테이블을 뒤엎으면 어떡하지? 펄펄 끓는 삼계탕이 나오자마자 종업원에게 집어던지는 건 아니겠지? 의자 아래에 놓은 ENG카메라부터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는 게 나으려나? 걱정이 점점 커가는 와중에 앙다물었던 남자의 입이 천천히 열리자 의외로 단정하고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마… 우리 걸 좀 더 맛있게 해 주시느라고 다른 사람들보다 시간이 걸리나 봐. 좀 더 기다려보자. 오늘 이 가게에서 만드는 삼계탕 중에서 제일 맛있는 두 그릇이 금방 나올 거야.”


외모만 놓고 보면 떡 벌어진 어깨에 눈매도 매섭고 한 성격 제대로 할 것 같아서 진짜 싸그리 다 뒤엎을 느낌인데 이렇게 조곤조곤 사려 깊게 여자친구를 다독인다고? 툴툴대던 여자분도 남자의 너그러운 대처에 마음이 좀 풀렸는지 주말에 함께 보러 갈 영화 얘기에 다시 집중했고 곧 따끈한 삼계탕 두 그릇이 나왔다. 많이 배고팠는지 청춘의 상징인 인증샷도 생략한 두 사람은 함박웃음과 함께 분주히 수저를 움직이며 발골 작업에 몰두했다. "맛있다! 진짜 맛있네" 같은 추임새도 곁들이면서.


대상을 촬영해서 ‘보여주는 것’이 직업인지라 겉치레라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이미지라는 건 얼마나 속기 쉽고 속이기 쉬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신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통렬하게 빗나갈 때가 있다. 자만하지 않고 선입견도 갖지 않고, 있는 그대로 대상을 받아들이기란 항상 어렵기만 하다. 어른 되려면 아직도 멀은 것 같다.

미안해요 힙스터 커플. 내가 오해를 했어요. 다음에 또 경복궁에 삼계탕 먹으러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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