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익숙한 대사가 귓가를 스쳤다. 지난 2016년 세밑부터 시작해 2017년 봄까지 활활 타올랐던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 를 단 한 마디로 함축하는 역사적인 한 문장. 세월호 참사와 국정농단 등 정권의 무능과 부패에 저항할 때면 어김없이 들려오던 노래. 23차까지 이어지는 주말 집회 중 두어 번 빼고는 거의 다 (일하러) 참석했기에 자연스럽게 외워버린 가사.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몇 년 만에 듣게 된 그리운 문장에 내가 지금 시간여행에 빠져버린 건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었다.
2020년 8월 23일(일) 사랑제일교회 앞에선 3차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이 교회에서 시작된 코로나 확진자만 이미 8백 명에 육박한 상황이지만 교회는 당국의 부당함만을 주장하며 ‘발뺌하기’, ‘모르쇠’, ‘너 고소’ 등으로 일관했다. 하루 전 압수수색에서 나온 집회 자료는 비록 우리 교회에서 발견됐지만 우리가 작성한 게 절대 아니고, 교인들에게 질병 검사를 강요하는 건 강요죄이고, 정부의 방역지침은 모두 위법이고, 국무총리와 보건복지부 장관은 고소할 거고…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계속 듣고 있자니 밥 벌어먹고 산다는 게 참 쉬운 일이 아니구나 하는 자괴감에 사무칠 무렵, 바로 저 대사가 들려왔던 것이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마침내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절대로 기죽지 말고 끝까지 싸웁시다!”
혹시 세월호 가족협의회 아버님들이 단상에 올라온 건가 싶어서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봤다. 분명 사랑제일교회 사람이다.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어디 감히 빼앗아 올 말이 없어서…!? 하루아침에 아이들을 먼 바다로 떠나보낸 부모의 말을, 차디찬 아스팔트에도 아랑곳없이 뜨거운 촛불의 열기와 함께 울려 퍼지던 성난 민중의 말을, 동맹휴학 시국미사 고공농성 1인시위 등 부당한 권력과 싸우는 이들의 곁에서 언제나 힘이 되어준 소중한 말을 사리사욕에 눈이 먼 거짓 선지자들이 무슨 낯으로 가져다 쓴단 말인가.
기자회견 시작부터 찜찜하긴 했다. 발언자 서너 명을 제외하고 단상의 참석자들이 모두 ‘가이 포크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16세기 영국, 국가 전복을 꾀한 일종의 테러리스트였던 가이 포크스는 영화 <브이 포 벤데타> 이후 전 세계적으로 자유와 혁명, 투쟁과 저항의 아이콘이 되지 않았던가. 우리나라 촛불집회나 홍콩 민주화 시위, 어나니머스, 팔레스타인 시위대 등에나 어울릴 가면에 기득권 중에서도 초거대 슈퍼 기득권인 대한민국 개신교가 손을 뻗치다니. 이런 모욕이 어디 있을까.
생각해보면 언어의 마술사가 종교계에만 있는 건 아니다. 며칠 전 미래통합당 박덕흠 의원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지금 집값이 올라서 화가 나는 사람이에요!” 아파트 3채, 주택 1채, 상가 2채, 창고 2채, 선착장 1개, 토지 36필지로 보유 재산 289억을 신고한 미래통합당 재력 넘버1의 플렉스 가이. 불과 몇 년 사이에 보유한 강남 집값이 73억이나 올랐지만 "세금만 더 내고, 의료보험만 더 내고, 아니 나한테 플러스되는 게 뭐가 있어요!" 라며 화를 내는 이 남자. 이런 화라면 인생 끝나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내보고 싶은 사람들이 차고 넘칠 텐데. 진짜 억울해서 화가 난다는 게 어떤 건지 그가 알기나 할까?
말 나온 김에 또 다른 레전드를 하나 꼽아 본다. 2010년 학교 무상급식을 하느냐 마느냐, 아가들 밥을 주네 마네로 싸움이 한창이던 당시 TV토론에 한나라당 측 패널로 출연한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 사무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요새 밥 굶는 아이들이 어디 있습니까? 밥 굶는 아이가 있으면 9시 뉴스에 첫 번째로 나올 걸요? 북한에서나 있는 얘깁니다” 듣는 순간 기함을 금치 못했다. 이 아저씨는 자기 옆에 존재하지 않는 건 아예 없다고 확신하는구나. 아니면 보기 싫어 일부러 눈을 감고 있는 게 아닐까? 우물 속 세상이 전부인 이런 사람이 한 정당의 대표로 토론회에 출연하다니 세상에. 무려 1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나라에는 밥 굶는 아이들이 아주 많이 있다. 나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건 아니다.
수없이 많은 뻘소리들 사이에서 개인적으로 단연 1위로 꼽는 유체이탈 레토릭은 바로 이거다.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 비자금, 차명계좌 등 온갖 불법 경영으로 특검 수사를 받은 끝에 4조5천억의 차명재산이 드러나 2008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삼성의 이건희 회장. 그러나 법원은 예상대로 집행유예라는 면죄부를 내렸고 곧이어 MB님의 단독 특별사면까지 하사 받아 2010년 화려하게 경영에 복귀한다. 복귀하면서 전 국민을 상대로 했던 명대사.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당신이 이런 얘기를? 노조파괴의 대명사, 정경유착의 상징, 반도체 산재 불인정, 각계각층을 향한 뇌물과 불법, 사원 시신 탈취, 집구석 성매매로 점철된 삶을 살아온 회장님께서 하실 얘기는 아닌 것 같다. 국민 평균치의 도덕성에도 한참 못 미치는 주제에 감히 누가 누구한테 정직하게 살라고 지적질인가.
이렇게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는 말을 빼앗기다 못해 이제는 얼굴까지 빼앗겼다. 앞으로도 되찾아오기는 요원해 보인다. “예배를 왜 못 보게 해! 이게 무슨 민주주의야!” 라고 외치며 경찰을 때리고 있는 광화문의 할아버지들을 보고 있노라면 ‘할배들요, 민주주의 아니었으면 이미 전부 닭장차에 실려서 남산에 끌려가셨소’ 라고 쏘아붙이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해진다.
정의, 민주, 정직, 빛, 동지, 사랑, 우정, 노동…
우리에게 자본과 권력은 없지만 그런 만큼 더 소중하게 지켜온 풀뿌리 민초들의 작고 소중한 가치. 때로는 한가득 피를 흘려가면서도 가까스로 수호해낸 아름다운 유산, 어여쁜 단어들이 너무나도 가볍게 빼앗기고 소비되는 대혼란의 시대. 엄혹한 일제강점기 속에서도 목숨 바쳐 말과 사상을 지켜낸 선각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단어 하나, 낱말 하나, 쉬이 퇴색되지 않도록 좀 더 소중하게 지켜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