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지 않으면… 오늘 같이 콘서트 보러 가지 않을래?”
12월의 추운 어느 날. 갑작스럽게 낸 용기에 스스로도 부끄러운지 수줍게 내리 깐 시선.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잔뜩 긴장한 얼굴로 겨우 입을 연 그녀의 달콤한 목소리… 같은 건 상상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이고 실제로는 회사 선배가 퇴근 직전의 나를 불러 세우고 한 말이다. 함께 공연을 보기로 한 와이프가 일이 생겨 못 가게 됐다. 티켓을 버리긴 아깝고 자기 혼자 보러 가는 것도 좀 쑥스러우니 괜찮으면 같이 가자는 권유였다. 딱히 약속도 없는 퇴근길이었기에 흔쾌히 응했다.
가는 길에 선배가 물었다. 가수 ‘요조’를 좋아하냐고. 오늘 공연은 바로 그녀의 콘서트였다. 무슨 콘서트가 월요일에 하지? 그리고 평일인 것도 모자라 밤 12시 공연 시작? 이렇게 늦은 시간에 하는 건 또 무슨 일이람. 의문을 가득 품은 채 공연장인 을지로의 카페에 도착했다. 삼삼오오 공연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연말을 따뜻한 음악과 함께 보내려는 연인들 위주였고 여성 2~3명의 그룹도 많았지만 남자들끼리만 온 팀은 선배와 내가 유일한 듯했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사실 가수 요조님보다는 작가 요조님을 더 좋아한다. 가장 처음에 그녀가 낸 책 <요조 기타 등등> 을 읽고 반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올라 서점도 운영하며 좋은 글과 책을 꾸준히 생산해주고 있으니 팬의 한 사람으로서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그녀의 노래 또한 글만큼이나 담백하고 따뜻하게 귓가를 어루만져주는 위로가 한가득 담겨있어 좋아하지만 그래도 역시 글 쓰는 요조님 쪽에 한 표를 보태는 편이다.
작은 카페 안의 테이블을 모두 치우고 무대와 좌석을 마련한 아담한 공간이었다. 50~60여 명의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찼고 요조님이 만든 단편영화가 먼저 상영됐다. <나는 아직도 당신이 궁금하여 자다가도 일어납니다> 라는 먹먹한 제목의 30분짜리 영화였다. 친구들과 바닷가에 놀러 간 주인공이 건너편 자리에 텐트를 친 가족들을 지켜보다가 할머니 한 분이 몇 시간이 넘도록 미동도 없이 죽은 듯 누워있는 걸 발견하고는 혹시 정말 돌아가신 게 아닌가 싶어 하루 종일 불안과 걱정을 키워가다 저녁때쯤 꿀잠을 자고 깨어난 할머니를 보고는 그제야 안심하게 된다는… 한여름 밤의 귀여운 소동극. 슴슴하고 맑은 올갱이국 같은 영화였다.
관객 중 몇 명이나 알지 모르겠지만 작가 요조님의 팬인 나로서는 <어떤 날> 이라는 여행 무크지에 기고한 그녀의 에세이를 통해 이미 읽은 내용이었다. 글로도 참 맛있게 읽었는데 당신에게도 꽤 인상적인 체험이었던지 단편영화로까지 만든 거였다. 그 담백한 문장들을 영상으로는 이렇게 표현했구나 싶어 흥미로우면서 좋았다.
영화가 끝나자 그녀가 등장했다. “올여름 6월 6일 6시에 이 음악상영회를 처음 시작했어요. 그 다음은 7월 7일 7시, 8월 8일 8시. 그렇게 9, 10, 11월에도 같은 공연을 했거든요. 그래서 오늘 12월 12일 12시 공연이 마지막 순서입니다. 아주 늦은 시간인데도 많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차분한 인사와 함께 노래가 시작됐다. 아는 노래도 있고 처음 듣는 노래도 있었다. 수은주가 영하를 넘나드는 차디찬 바깥 세상과 달리 카페 안은 따뜻했고 서로를 향한 정감 어린 시선과 목소리들이 몽글몽글 교차하는 사랑스런 공간이었다.
그때였다. 동행한 선배가 벌떡 일어나더니 객석의 맨 뒤로 향했다. 그곳에 서서 공연을 보는 게 아닌가. 뭘까? 시간이 어느덧 밤 1시를 넘어 2시로 향하는 순간에서야 이변을 눈치챘다. 객석 여기저기서 꾸벅꾸벅 조는 사람이 속출했던 거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아침 일찍 출근해 하루 종일 일하고, 상사에게 시달리고, 거래처에 쪼이다가 이렇게 따뜻하고 아늑한 공간에 밤12시에 들어와 요조님의 조곤조곤한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충분히 졸 수 있지. 인정. 선배는 너무 잠이 와 마치 수업 시간에 졸음을 이기려는 고등학생처럼 교실 아니 카페 뒤편에 서서 공연을 보고 있던 거였다.
명랑하고 빠른 템포의 노래가 나올 때는 그나마 정신을 좀 차렸다가도 소곤대며 읊조리는 그녀 특유의 발성과 노래들이 나오면 여지없이 여기저기서 고개가 휙휙 꺾였다. 연인들끼리 서로를 깨워주기도 하고 잠 깨려고 자기 뺨을 치는 관객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아이고 이 귀여운 사람들 같으니라구. 일상에 지쳐 이리 피곤한데도 좋아하는 아티스트 한 번 보겠다고 이렇게까지 강행군들을 하시는구나.
그녀도 모르진 않았을 거다. 무대에서는 객석이 더 잘 보였을 테니까. 자기가 애지중지 정성껏 만든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졸고 있는 관객을 보면서도 그녀는 서운해하거나 기분 상해하지 않았다. 최후의 한 곡을 앞두고 남긴 인사 또한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여러분, 다음 곡은 오늘의 마지막 곡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앵콜은 없어요. 여러분은 지금 자야 돼 진짜로. 이 곡 마치면 바로 집에들 들어가서 푹 주무세요.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어 정말. 앞으로 5분 정도 남았나? 조금만 더 힘내요. 이제 금방 끝나. 얼마 안 남았어!”
귀여운 관객에게 잘 어울리는 귀여운 아티스트였다. 잠 깨고 조심히 들어가라는 의미에선지 마지막은 아주 신나고 통통 튀는 곡을 요조님과 밴드 멤버들이 다 같이 열창했다. 공연이 끝나자 다들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드디어 끝났다, 이제 푹 잘 수 있다’ 는 웃픈 감정과 함께 ‘나도 그렇지만 옆자리 당신도 정말 수고했어요, 공연한 요조님은 물론이고요’ 라는 기묘한 연대감마저 생겨난 듯했다. 나 또한 다음날, 평범한 목요일 아침 출근을 해야 하는 입장인데 집에 돌아와 씻고 침대에 누우니 새벽 3시가 넘어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내일 출근이나 등교 괜찮을까? 걱정스럽던 그날 밤.
그 후로도 많은 공연을 봤다. 더 크고 화려한 연주, 인기 아이돌의 콘서트, 어마어마한 대형 무대도 많이 봤지만 그 추운 겨울날 요조님과 관객 모두 일심동체가 되어 쏟아지는 잠과 싸우며 서로를 깨워주고 힘내라 응원하면서 함께 만들어갔던 새벽 2시의 콘서트만큼 따뜻한 공연은 본 적이 없다. 혹시나 싶어 찾아봤는데 2017년 그날 공연 이후 요조님이 자정이 넘어 시작하는 콘서트를 또 연 적은 없는 것 같다. 조금 미안하셨나 보다. 그러지 않아도 돼요. 그날은 우리 모두에게 (조금 졸리긴 했지만)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