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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단 Sep 21. 2020

여자란 무서운 존재, 그녀가 설령 초등학생일지라도


여자가 얼마나 무섭고 예리한 존재인가에 대해 친구와 토론하던 중 잊고 있었던 초등학교 시절의 일화가 하나 떠올랐다. 천방지축 뛰놀던 12살 꼬맹이 시절, 우리 5학년 1반은 학생끼리 서로 마주 보는 형태로 책걸상을 두던 시기가 있었다. 내 짝꿍, 즉 나와 마주 앉는 친구가 바로 지현이였다.


그녀는 성적 우수, 품행 방정, 두뇌 명석, 스포츠 만능에 반장까지 맡고 있는 인싸의 아이콘 같은 여학생이었다. 귀여운 외모는 물론이고 피부는 또 어찌나 뽀얗고 눈부신지 시커멓게 그을린 나 같은 촌놈과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조선시대 드라마로 치자면 정2품 당상관 호조판서 어르신네 막내 손녀딸과 강화도 유배지 마을 갖바치 집안의 막내아들 같은 느낌?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함은 물론 학교의 잘 나간다는 남자 녀석들 중 그녀에게 관심 없는 아이가 없었다.


누가 누구랑 사귀네 어쩌네 고백을 했는데 차였다네… 한창 이성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는 시기였던지라 그녀는 어디를 가든 핫이슈 메이커 그 자체,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그런 존재였다. 그런 그녀가 바로 내 앞, 매일 같이 얼굴을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아 있었으니 소년만화라면 뭔가 흥미진진한 스토리 전개가 이어질 법도 하지만 그녀와 나 사이, 견고한 신분의 벽을 뛰어넘는 풋풋한 첫사랑이라거나 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절절한 고백을 하는 남자 녀석들의 편지나 (여학생들에게서도 많이 왔다) 선물 꾸러미가 오는 건 흔한 일상이었다. 그날도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 수업이 시작되기 전 쉬는 시간, 지현이는 파스텔톤의 봉투에 예쁘게 담긴 편지를 한 통 꺼내 들었다. ‘이번엔 또 누가 보냈을까?’ 사실 내 자리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그녀의 편지를 훔쳐볼 수 있다. 그녀가 책상에 편지를 펼쳐 놓고 읽는다면 슬쩍슬쩍 눈동자를 굴려 충분히 엿볼 수 있고, 그녀 눈 앞에 직각으로 편지를 들고 읽는다면 창가를 등진 그녀의 포지션 상 햇살에 글씨가 종이 뒷면까지 비치기에 그 또한 읽어낼 수 있는 명당이었다.


우리 학년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친구들의 연애편지가 어떤 느낌인지 호기심은 동했지만 몰래 읽는 건 아무래도 옳지 않다. 그녀에게도 실례고 그녀에게 연서를 보낸 놈에게도 실례다. 아무리 궁금해도 페어플레이가 아닌 건 하지 말자. 마음을 다잡고 슬쩍 지현이 쪽을 보니 거의 무방비로 편지를 읽고 있다. 어허, 저려면 나한테 다 보이는데… 뒤적뒤적 가방에 손을 넣어 아무거나 크기가 큰 교과서를 한 권 꺼냈다. 그리고 나와 그녀 사이에 턱 펼쳐서 장벽을 세웠다. 내용을 보니 음악책이었다. 눈앞에 떠다니는 건 아름다운 왈츠 선율의 16분 음표였지만 소년 소녀들의 간질간질한 연애담만큼 아름답지는 않았다.


그때 내 왼쪽 자리에 앉는 혁준이가 돌아왔다. 즉 혁준이에게 지현이는 대각선이다. 이 녀석 또한 마음먹으면 그녀의 편지를 몰래몰래 볼 수 있는 시야가 어느 정도 나온다. 그러나 이 친구는 깊게 생각하고 행동하기보다는 아직 본능 그 자체에 충실한 12세 소년인지라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를 놀리기 시작했다.


“어? 반장 또 편지 받았네? 이번엔 누구야? 나도 좀 보여줘~ 안 보여주면 큰 소리로 애들한테 다 말할 거야 너! ㅎㅎ”

그녀는 눈썹을 八자 모양으로 살짝 찡그리며 조용하지만 위엄 있는 목소리로 경고했다.

“야, 철 좀 들어라. 언제까지 애처럼 굴래. 네 옆에 모단이 봐. 얘는 내가 편지 읽으려고 하니까 곧바로 책 꺼내서 일부러 이렇게 가려주잖아. 혁준이 넌 얘 좀 본받아 제발.”


깜짝 놀랐다. 자기 불편할까봐 마음 편히 읽으라는 의도로 책을 꺼냈다는 걸 안다고?! 그걸 인지했다고? 내 쪽을 한번 힐끗 쳐다보지도 않았으면서? 전혀 모를 거라 생각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연애편지에만 온 신경을 집중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는 편지를 훔쳐보고 싶어 하는 나의 망설임, 그러나 결국 매너를 지키는 쪽을 택해 벽을 만들어 준 것까지 모든 걸 파악하고 있었다. 고작 12살 꼬맹이에 불과한 여자아이인데?! 피부에 닭살이라는 것이 처음 돋는 순간이었다.


그 날 알았다. 여자는 남자랑 다르다. 그것도 아주 많이. 굉장히 무서운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그녀들은 모든 걸 알고 있다. 그녀들이 혹시 뭔가를 모른다면 그건 그저 모르는 척 해주는 것일 뿐이지 진짜로 모르는 게 아니다. 12살에 깨닫게 된 만고불변의 절대 진리. 그 가르침 덕분에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게 20대 시절에만 도대체 몇 번이었는지 셀 수조차 없다. 인생의 큰 교훈을 알려줬던 고마운 그녀는 지금쯤 어느 하늘 아래에서 아름다운 인생을 살고 있을지 가끔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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