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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단 Sep 23. 2020

연인이 쓴 책은 마냥 아름답기만 할까요?


거실에 산처럼 쌓인 책을 정리하다가 추억의 책을 한 권 발견했다. 문단의 극찬을 받은 것도 아니고 베스트셀러와도 거리가 멀어 세월의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져 버린 책. 그러나 나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맙고 소중한 책. 먼지가 보얗게 쌓인 이 책은 아주 예전에 연인이었던 분께서 엮어 낸 에세이집이다.


23살 청춘 시절, 학교를 다니며 잡지사에서 사진 촬영 알바를 할 때였다. 그 잡지사의 프리랜서 기자인 그녀와는 일을 함께 다니며 조금씩 가까워졌다. 10살 연상이었지만 그게 친해지는데 걸림돌이 되진 않았다. 취재원들의 말을 차분하게 경청하면서 하고 싶은 얘기는 마음껏 할 수 있게 길을 터주고 숨기고 싶은 얘기는 덤덤히 덮어주었으며 필요한 순간에는 목을 조를 듯한 기세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어떤 순간이든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갔으며 최종적으로 지면에 담긴 그녀의 결과물은 언제나 깊이가 있고 아름다웠다.


거장들과의 인터뷰를 옆에서 지켜보며 처음 보는 사람과의 대화라는 게 이토록 아슬아슬하면서도 짜릿한 일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그렇게 한두 시간 남짓 나눈 대화들이 고스란히 활자와 문장이 되어 펄떡거리며 살아 숨 쉬는 글이 된다는 것도 신기하기만 했다. 그녀가 한 자 한 자 소중하게 쌓아 올린 글에 어울리는 최고의 사진을 보태주고 싶었기에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촬영했다. 짧은 얘기를 나누는 순간에도 사람들의 표정은 변화무쌍했기에 그 사람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찰나를 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지면을 인쇄소 구석에 앉아 펼쳐 볼 때면 언제나 벅차올랐다. 글과 사진이란 이렇게 어우러지는 거구나. 홀로는 뭔가 부족해 보였던 것들이 한 공간에 있게 되는 순간, 반짝거리며 함께 빛났다.


사진과 글이 합쳐져 하나의 결과물이 되듯 둘은 연인이 되었고 소중한 시간들을 함께 했지만 청춘의 열병은 영원하지 못했고 결국은 헤어지게 됐다. 글을 쓰는 사람답게 그녀는 항상 자기의 책을 한 권 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언제일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분명 나올 거라 나 또한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시간이 꽤 지나 인터넷 서점에서 책 쇼핑을 할 때면 별생각 없이 그녀의 이름을 한 번씩 검색하곤 했다.


몇 년 후였을까? 별 의미 없이 그녀의 이름을 온라인 서점의 검색창에 넣었는데 결과물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정말 그녀의 책이 출간된 것이다. 흔한 이름이 아니기에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없어서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냉큼 주문했다. 예쁜 삽화가 표지인 그녀의 책은 이튿날 도착했다. 곧바로 읽기 시작했다. 한 장, 두 장… 읽으면서 조금씩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책 내용이 뭔지는 전혀 살펴보지 않고 무작정 주문한 거였는데 알고 보니 이 책은 가슴 절절한 ‘연애 에세이’ 였고 등장하는 주인공 중 한 명이 바로 나였다. ‘나와의 갑작스런 이별로 너무나 힘들어진 그녀, 눈물로 하루하루를 지새우는 그녀에게 새롭게 나타난 한 남자. 그 사람의 따뜻한 위로를 통해 다시금 세상을 향해 용기 있게 한 걸음 나아간다’ …는 내용의 책이었고 나는 ‘전남친 Y’ 로 등장한 것이다.


아주 약간 양념이 가미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둘 사이에 있었던 일, 아름다운 추억, 말다툼, 대사, 행동들이 꽤나 디테일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참 묘한 기분. 그와 동시에 두 가지의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세상에나나와의 추억을 글감 삼아 책을 써준 전여친 덕분에 내가 주인공인 연애 에세이가 전국의 서점에 출간됐다는 거야 지금? 자기 연애담을 책으로 갖고 있는 사람이 지구 상에  명이나 되겠어. 시몬  보부아르나 카트린 밀레 말고는 떠오르지도 않는다구. 이렇게 감격스러운 선물이  있을까? 시간  년이나 지났는데  많은 일과 대사까지 어쩜 이리 정확하게 기억해주었을까. 고증도 철저하시지. 고맙네 정말.
아니 이렇게까지 사적이고 개인적인 내용들로 책을 출간하면서 당사자인 나한테 양해 한 마디 구하지 않을 수가 있는 거야? 이건 소설이 아니고 에세이잖아, 혼자 있었던 일이 아니라 함께 겪었던 시간들을 책으로 엮어서 그걸로 저작권을 얻고 인세도 받겠다는 건데… 둘만의 소중한 추억을 이렇게 수익사업으로 이용하는 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더군다나 전남친 포지션이라서 실제보다 훨씬 더 못되게 각색까지 되어버렸잖아. 미국이면 완전 소송감 아니냐 이거? 아이고.


어느 쪽으로 스탠스를 잡을지 잠시 망설였지만 고민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래 이건 분명 고마운 일이지. 나중에 돌이켜보면 곁에 있었던 게 맞는지 기억조차 안 나는, 풀 한 포기보다 가벼운 인연으로 넘쳐나는 세상. 시간이 이리도 많이 흘렀는데 기억을 되살려 종이에 꾹꾹 눌러 담아 책으로 낸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지. 그렇게 고맙다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나라면 어떨까? 전 연인과의 일을 꼬치꼬치 글로 써서 책을 낼 수 있을까? 잠깐 상상해봤지만 도저히 못 할 것 같다. 모든 게 서툴고 미숙해 상대에게 상처만 잔뜩 줬던 그 시절을 텍스트로 영원히 박제하겠느냐고? 안되지 안돼. 절레절레.


책 잘 보았다고 몇 년 만에 연락을 했다. 그녀는 살짝 민망해하면서도 언젠가는 해야 할 부담스러운 숙제를 무사히 끝마친 학생 같은 말투로 첫 책 출간의 시원섭섭한 심정을 들려줬다. 이어서 요즘 하는 일과 근황, 결혼 상대자는 어떤 사람인지 등 여러 가지를 들려줬다. 하나 같이 좋은 소식들이었다.


그 날을 마지막으로 서로 연락을 나누진 않았지만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게 분명하다. 스쳐 지나간 작은 추억까지도 사려 깊게 그러모아 책으로 엮어내는 그녀. 잠시 마주친 카페 종업원마저도 마치 몇 달을 공들여 성사시킨 인터뷰이에게 그러하듯 진심으로만 대하던 사람. 그런 그녀인 만큼 지금까지의 인생은 물론 앞으로의 삶의 여정도 큰 파고 없이 잘 헤쳐나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책 고마워요. 평온하고 행복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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