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유학 시절, 니이가타 역 앞에 있는 '제임스 외국어 학원' 이라는 곳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다. 훌륭한 한국어 선생님들이 이미 있었지만 그들은 일본인이고 나는 네이티브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강생들은 내 수업에 몰려들었다. 한류 드라마와 K팝의 인기가 정점을 향해 치닫던 시기여서 한국어의 인기는 어마어마했다. 학생들도 꽤 늘어 수준별로 수업이 나눠졌고 그중에 내가 맡은 건 ‘고급반 -프리토킹-’ 클래스였다.
사실 처음에는 좀 안일하게 생각했다. 전형적인 문과 남자로서 언제나 책을 옆에 끼고 살았고 나불나불 입만 살았다는 소리도 꽤나 듣는 편이었으니 일본인들에게 This is a pen, I'm a boy 수준의 한국어를 가르치는 게 뭐 어려우랴 싶었다. 그러나 여유로움은 잠시. 첫 수업 시간에 가장 반갑게 인사를 해주신 50대 여성 기타가와상의 기습 질문 한 방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선생님, 여기에 쓰여있는 눕다와 드러눕다는 정확히 어떻게 다른 겁니까?”
눕다와 드러눕다의 차이에 대해서 적절한 예문과 함께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한국인은 몇 명이나 존재할까. 지금이라면 스마트폰으로 사전을 찾아 알려주거나, 상황을 설정해 직접 연기하면서 몸으로 보여주거나, 좋은 질문이라며 다음 수업시간까지 잘 조사해서 알려주겠다고 능글맞게 넘길 수도 있겠지만 풋내기 유학생 시절엔 그러지 못했다. 어버버 하다가 끝나버린 첫 수업의 진땀 나는 기억.
그래도 계속하다 보니 적응이 되었고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은 적성에 꽤 맞는 편이었다. 수강생들에게 평판도 나쁘지 않아 학원에서는 클래스를 더 늘리고 싶어 했지만 전임 강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유학생 신분으로 하는 아르바이트였기에 무리하지는 않았다. 수강생의 대부분은 여성분들이었고 나이 대는 다양한 가운데 30~40대가 가장 많았다.
내 담당인 월요일 프리토킹반은 레벨이 높다 보니 한국어를 꽤나 잘하는 여사님 딱 5명만 듣는 소수 정예 수업이었다. 항상 ‘지난 한 주는 어떻게 보내셨나요?’ 라는 질문으로 수업을 시작했는데 유노윤호를 보기 위해 고3 딸을 내팽개치고 서울 잠실운동장 동방신기 콘서트에 2박3일로 다녀왔다는 그녀들의 말에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그렇게 즐겁게 수업을 이어가던 어느 날, 첫 수업 때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기타가와상이 면담을 청해왔다. 이미 '취미 외국어 레벨'은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로 한국어를 잘하는 그녀였지만 한글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향상심을 도저히 견딜 수 없는지 더 배워서 더욱 잘하고 싶다며 개인교습을 받고 싶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학원 이외의 장소에서의 개인적인 수업은 원칙적으로는 안 되는 거지만 학원에 전속된 전임 강사도 아닌 프리랜서이기도 하고 곧 한국에 돌아가 복학할 등록금도 마련해야 했기에 어디 외화 한 번 바짝 벌어보자는 의욕에 1:1 수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말이 좋아 수업이지 레벨이 워낙 높아 두어 시간 정도 주제를 정해 떠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공부가 되는 여사님이었다. 첫 번째 프라이빗 수업은 그녀가 정한 니이가타 역 앞의 카페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약속한 날, 여사님이 알려준 카페로 찾아갔는데… 흠칫! 그냥 카페가 아니라 으리으리한 호텔 안에 있는 럭셔리한 커피숍이었다. 뭐… 맥도널드 같은 곳보다는 아무래도 조용할 테니까 수업하기에는 여기가 더 낫다고 생각하셨겠지.
일상 얘기, 연예인 얘기,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소재로 두 시간을 쉼 없이 떠들다 보니 수업이 끝났다. 아무리 프리토킹이어도 수업은 수업이라서 끝나고 나면 진이 쪽 빠졌다. 수고하셨다는 인사를 나누고 주섬주섬 카페를 나서는데 여사님이 도통 가방을 열지 않았다. 아무래도 깜빡 한 눈치였다. 수업료 말이다. 두 시간 수업에 4000엔의 페이를 받기로 했는데… 카페를 나와 로비까지 걸어왔는데도 기미가 없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기타가와상, 오늘의 수업료는…”
“아 맞다! 깜빡했네요. 미안해요 선생님 호호.”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지갑 안에 들어있는 1000엔짜리 넉 장을 휘릭휘릭 꺼내어 내게 건넸다. 감사 인사도 잊지 않았다.
“오늘 수고하셨어요. 2시간이 진짜 순식간에 지나가네요. 정말 좋았어요.”
넙죽 인사를 하며 돈을 받으려는데 뭔가 좀 묘한, 따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니이가타 그랜드 호텔 1층 로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숙박객은 물론 직원들까지도 여사님과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지 뭔가. 호텔 로비 한복판에서 50대 여성이 20대 남자에게 ‘오늘 수고했다’ 며 어깨를 토닥이고 돈을 건네는 상황… 도대체 어떻게 보이고 있는 거지 지금?! 이어지는 여사님의 대사. "그럼 다음 주에도 같은 시간에 여기에서 하는 걸로 해요. 자, 여기 오늘 수업료 4000엔♡"
상당히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들이 여사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가운데 주변 사람들의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ほらほら見て、あれ絶対それだよね?でしょ?”
“当たり前じゃん、おばさん中々やるね。でも割と安くない?思ったより値段がさ…”
“저 사람들 아무래도 좀… 그런 거 같지 않아요?”
“두말하면 잔소리죠, 그런데 생각한 거보다 가격이 되게 저렴하네?”
아니 왜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상상하는 그런 거 아니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저렴한 가격(?)에는 제공하지 않는다(?)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해맑은 미소와 함께 4000엔을 팔랑거리고 있는 여사님을 보고 있자니 얼른 돈을 받고 이 자리를 피하는 게 맞겠다 싶었다. 혹시 괜찮다면 다음부터 수업료는 봉투에 넣어서 좀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렸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신 건지 아니면 주변의 오해가 오히려 재밌어서 그런 거였는지 그 후의 수업에서도 기타가와상은 언제나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박력 있게 촥촥 뽑아서 내게 건네곤 했다. 그것도 꼭 로비 한가운데서.
다음에 혹 기회가 있어 니이가타를 다시 가게 되면 그때 그 호텔을 찾아가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셔야겠다. 그러다 혹시 일한 지 오래돼 보이는 나이 지긋한 호텔 직원이 보인다면 넌지시 한 번 물어볼지도 모르지. 십 년쯤 전에 매주 금요일 밤마다 호텔 로비에서 돈을 주고받던 남녀를 혹시 기억하시는지… 아 기억하신다고요? 네? 호텔 직원들 사이에서는 화제의 금요 커플이었다구요? 4000엔짜리 남자? 아니 그건 다 오해예요, 제가 지금이라도 해명해서 진실을 꼭 밝히고 싶은데요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