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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단 May 06. 2020

‘사랑’ 이라는 난제의 실전 가이드

PC게임 <동급생>


  고등학생이 되면서 처음으로 ‘여자 사람 친구’ 라는 게 생겼다. 걸걸한 변성기의 남고 녀석들과 욕지거리 섞어가며 떠드는 것과 그녀와의 대화는 전혀 달랐다. 세반고리관이 간질거릴 정도로 자분거리는 목소리, 대화 소재의 다양성, 치고 빠지는 타이밍, 주제를 받쳐주는 풍부한 배경지식, 레토릭의 현란함 등 모든 면에서 여자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부잣집 외동딸에 얼굴도 귀염상이라 뭔가 더 노력해볼 만도 했지만 그러진 않았다. 그녀에겐 이미 남자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냥 남자 친구가 아니라 무려 30대 중반의 초고령 남친이었다. ‘17살 여고생과 30대 직장인이 사귀는 게 가능한 건가? 아니 이건 사귄다는 표현 말고 조금 다르게 설명해야 하는 관계 아닌가?’ …라는 생각도 약간은 들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꼭 틀린 건 아니니까.


  친구는 가끔씩 늦은 밤 내게 전화를 걸었고 자정 무렵에 시작된 통화는 몇 시간 넘게 이어지기 일쑤였다. 기말고사 얘기, 전람회 콘서트 얘기, 짜증 나는 담임에 대해 재잘대다 보면 어느 틈엔가 남자 친구에 대한 얘기로 넘어갔다. 그이가 일 때문에 요즘 바쁘다, 나는 더 자주 만나고 싶은데, 직장 동료 중에 귀여운 여자 신입사원이 있어 신경 쓰인다, 이럴 때 나는 어찌하는 게 좋을까 등. 최선을 다해 들어주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연애 무경험자인 내가 무슨 조언을 해줄 수 있겠는가. 상담 상대로는 별로 적합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었다.

  “은주야, 미안한데 내가 좋은 어드바이스를 못해줄 것 같아. 사실 잘 모르거든. 그냥 연애도 모르는데 20살 차이 나는 연애라니… 나보다 조금 더 제대로 충고해줄 사람을 찾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나의 말에 친구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한참 웃다가 꺽꺽대는 목소리로 내게 해 준 말은 대충 다음과 같았다.

  "얘야, 지금부터 이 누님이 하는 얘기 잘 들으렴. 앞으로 너의 긴긴 인생에서 수많은 여성들과 친구나 연인이 될 거고 그렇게 가까워지다 보면 고민을 주고받는 경우도 있을 거야. 여자가 자신의 근심이나 걱정을 털어놓는 경우에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하나, 그저 들어주는 거야.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어쭙잖은 충고? 필요 없어. 진심을 다해 귀 쫑긋 세우고 경청하면 돼. 여자는 이미 해답을 알고 있거든. 답이 필요한 게 아니란다. 명심하렴."


  충격이었다! 고민 상담이란 건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는 거 아니었나?! ‘너에게 고민을 털어놓고는 있지만 답은 필요 없어’ 라니 이 무슨 선문답인가. 천년고찰 주지스님이 ‘완전히 비우기 위해선 가득 채워야 하고, 가득 채우기 위해선 전부 비워야 하느니라…’ 라며 죽비로 등을 후드려 치는 듯한 역설적인 깨달음! 남자와는 너무나도 다른 여성이라는 종에 대해 근원적으로 생각해보게 만드는 자각의 밤이었다.




  1992년 일본에서 발매된 PC게임 <동급생>, 외로운 솔로 남성들의 등을 토닥여주는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천명하는 효시와도 같은 작품이었다. 공식적으로는 한국에 출시되지도 않았고 모든 대사가 일본어였기에 플레이하기가 녹록지 않았으나 동급생의 매력에 흠뻑 빠진 네티즌들이 알음알음 뭉쳐 자체적으로 한글화를 완성해버리는 기염을 토했다. 금전적 보상이 전혀 없음에도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편히 즐겼으면…’ 하는 마더 테레사 같은 따뜻한 마음의 프로그래머들과 일본어 능력자들이 모여 게임 상의 모든 지문과 대사들을 한국어로 번역해낸 것이다. PC통신 인구가 폭발하던 시기와 맞물렸던지라 동급생은 이내 수많은 게이머들에게 퍼져나갔고 게임성과 작품성을 고루 갖춘 재색겸비의 대작 등장에 많은 이들은 밤잠을 설치며 플레이했다.



  고교생 주인공 ‘타쿠로우’의 여름방학 추억담이라는 큰 줄기 아래 학교의 급우, 선후배, 동네 소꿉친구, 마을 주민, 연상, 연하, 교사 등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여성들과 얽히고설키면서 갈등과 해소를 반복하다 결국에는 연인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이 게임의 주된 내용이다. 얼핏 단순할 것 같지만 정작 게임을 해보면 무서울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짜인 시스템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장소나 시간대에 따라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대사와 분위기, 표정, 복장이 달라지는 건 물론이고 하루 전에 나눴던 이야기의 내용에 따라 다음날의 대화도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녀의 질문에 진솔하고 애정이 담긴 대답을 하는지 아니면 대충대충 얼버무리고 서둘러 스킨십으로만 직행하고 싶어 하는지에 따라 여성의 표정마저 미묘하게 달라질 정도이니 다른 건 말해 무엇할까. 데이트를 하는 도중에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이 건너편에 있기에 힐끗 쳐다봤다가 그 시선을 상대에게 딱 걸려서 무시무시한 질책을 듣는 상황은 참 놀라우면서도 하이퍼 리얼리즘 한 순간이었다. 연애 초보자에 있어서 이만한 시청각 교보재가 또 있을까?


  물론 동급생은 성인용 게임이다. 대사에는 음담패설이 상당하고 베드신의 수위도 무척 자극적이다. 그러다 보니 90년대 당시의 9시 뉴스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일본 저질 게임에 청소년 무방비>, <PC통신 통해 독버섯처럼 퍼지는 불법 일본 성인물> 같은 기사에 동급생의 화면은 단골로 출연하기 일쑤였다. 게임물 등급제나 심의, 검열 등의 사회 감시망이 미흡했던 시절이었기에 벌어진 일이기도 하고.

  이런 비판적인 견해와 상대적으로 게임사적으로 봤을 때의 파급력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동급생의 등장은 여러 게임 제작사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고 이후 한 시대를 풍미한 코나미의 <두근두근 메모리얼>을 비롯해서 수많은 연애 시뮬, 비주얼노벨 게임들에 정통으로 영향을 끼쳤다. 앞으로 본격화될 VR시대의 각종 체험 연애 게임에도 동급생의 향수는 고스란히 담겨있을 게 분명하다.



  개인적으로는 동급생을 플레이하면서 많은 교훈과 지혜를 얻었다. 성인용 게임 나부랭이나 하면서 뭐 거창하게 삶의 지혜씩이나 들먹이냐고 한다면 머쓱하긴 하지만 당시 나에겐 정말 그랬다. 동급생을 한창 플레이하던 사춘기의 한 복판, 하루하루가 불안스럽고 춘정만이 들끓는 야생마 같은 10대 소년에게 ‘이성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화두와도 같은 게임이었던 것이다.


  하루는 게임 속에서 한창 썸을 타고 있는 여성이 전철역 외진 으슥한 곳에서 불량배들에게 희롱당하는 것을 목격한다 (이 이벤트는 동급생의 후속작인 하급생에 등장한다) 게임이라면 당연히 정의의 사도처럼 멋지게 등장해 양아치들을 주먹으로 응징하는 것이 당연할 터. 하지만 이 작품에선 그런 선택지조차 없다. 몇 개의 대사 나 행동 후보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여러 선택지 중 여주인공이 가장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행동은 '그녀 대신에 나를 마음대로 하라면서 무릎을 꿇는 것' 이었다.    


  뭐? 이렇게 남자답지 못하고 멋대가리 없는 행동에 그녀의 호감도가 올라간다고?! 돈 몇 푼으로 해결하려 하거나 소리를 지르고 경찰을 부르는 등 남에게 의지하는 선택보다는 치욕스러움을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여성을 지키려는 태도에 더 큰 호감을 느낀다는 설정이었다. 여자의 마음이란 과연…! 그저 센 척이나 하고, 멋 부리는 것보다는 내가 갖고 있는 소박한 진심 안에서 최선을 다해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상대에게 감동을 준다는 의미였다.



  가상현실 속의 작은 에피소드였지만 모든 게 미숙했던 17세 청소년에게는 시사하는 바가 큰 순간이었다. ‘진심이 상대의 마음에 닿는다는 건 어떤 걸까? 꾸미거나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상대에게 고스란히 전달해야 하는데. 그럴듯하게만 보이려고 잘못된 선택지를 고르면 안되는데...’ 초등학생도 알 법한 당연한 소리지만 실제로 서로 예쁘게 포장만 하다가 어느 순간 실체가 드러나 실망하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중생들로 가득한 세상이지 않은가. 항상 상대의 말에 최선을 다해 귀 기울이라던 이성 친구 녀석의 가르침과 모든 일에 진심으로 전력을 다하라던 동급생의 가르침.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걸 가르쳐준 둘에게는 지금도 감사할 따름이다.


  동급생은 단순히 남녀 관계만이 아니라 ‘내’가 아닌 모든 타인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20세기의 탈무드였다 (걔 중에는 탈무드가 아닌 카마수트라로 받아들인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내용이 마냥 딱딱하고 심오했던 건 아니다. 기본적으로는 아주 유쾌하고 저속한 블랙코미디로 가득한 촌철살인의 세계였으니 이제 막 중2병을 지나고 있는 소년들이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담임선생 : 자, 오늘은 타쿠로우군의 미래와 진로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타쿠로우 : 놀고먹으면서 돈은 많이 버는 일을 하고 싶어요

   담임선생 : 그런 직업은 없어요

   타쿠로우 : 있어요, 정치인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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