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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squeen Jun 07. 2020

안녕, 모스크바

쁘리벳(안녕)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9시간을 날아가면 모스크바 쉐르메테보 공항에 도착한다.

영국, 프랑스나 독일보다 가까운 곳이지만 심리적인 거리는 먼 곳. 모스크바.


처음엔 바이올린을 전공하러 유학을 갔기 때문에 모스크바에서 기차를 타고 

페테르부르크 위에 있는 도시에서 공부를 했다. 우리나라 예중, 예고 같은 곳인데 

도시 전체에 한국인 10여 명 정도 살았고, 같은 학교에 한국인 학생이 두 명 더 있었다. 


하루는 나보다 먼저 유학 와서 성악을 공부하고 있는 언니가 오더니 말했다. 

"한나야.(러시아에서 쓰던 이름) 네 별명이 뭔 줄 알아?"

"별명?"

"친구들이 그러는데 너보고 '쁘리벳(안녕)'이래."


요는 이렇다. 수업 시간마다 강의실을 옮겨 다니는 데 한 학년 당 두 학급 정도였지만 1학년부터 11학년까지 다니다 보니 마치 대학생들이 강의실 옮겨 다니듯 정신이 없었다. 처음 유학 와서 러시아어도 잘 모르고 친한 친구도 없으니 쉬는 시간마다 강의실 옮겨 다닐 때 복도에서 눈이 마주치는 아이들에게 먼저 "쁘리벳"하고 웃으며 인사해서 아이들이 내 별명을 "쁘리벳"이라고 지었단다.


우리말엔 만나고 헤어질 때 안녕을 안녕? 또는 안녕. 이라고 쓰지만 러시아에서는 

만날 때 반가운 안녕은 '쁘리벳', 헤어질 때 안녕은 '빠까'를 쓴다.

같은 안녕도 빠까가 아니고 쁘리벳이니 나쁘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쁘리벳'이란 별명이 참 나와 꼭 맞는구나 싶다. 낯선 동토의 땅에서 누가 먼저 손 내밀어 주기 

전에 내가 먼저 다가가야 했고, 언어뿐만 아니라 모든 게 새로운 문화권에서 '쁘리벳'이라고 인사하며 웃을 수 있는 용기는 어린 시절 나를 한 뼘 더 성장하게 해 줬다. 


쁘리벳은 몇 달 후 모스크바로 전학을 갔고 그곳에서 쁘리벳은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랐다.

쁘리벳은 모스크바에서 유학할 때 뜨레찌야코프 미술관에 가서 그림 보는 것을 즐겼다.

뜨레찌야코프는 19세기 러시아의 상인 이름인데 예전에 신문 기자 시절 큰 지면에 통으로 러시아 미술사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다. 


뜨레찌야코프 미술관을 얼마나 많이 갔으면 지금도 눈 감고 몇 층 몇 번 홀에 어느 화가의 무슨 작품이 그려져 있는지 눈에 선하다.  몇 번 홀에선 잠시 앉아 그림을 감상하고, 몇 번 홀에선 다음 그림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사랑하는 러시아, 내가 사랑하는 모스크바, 내가 사랑하는 러시아의 화가들을 소개한다.




아래 글은 2011년 9월 중앙일보에 실렸던 글입니다. 

이 글을 쓴 직후 바로 MBC에 터를 잡게됐습니다. 



[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347> 

러시아 이동파(移動派) 화가


[중앙일보] 입력 2011.09.05 00:29   수정 2011.09.05 00:29


“지배계층 위한 그림은 싫다” 열차로 러시아 누비며 무료 전시회 하던 그들


러시아의 ‘이동파(移動派·Peredvizhniki)’ 화가를 아십니까? 19세기 러시아에선 영하 40도의 추운 겨울에도 그림을 든 채 열차로 시베리아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림은 황제와 귀족 등 지배계층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라며 “가난한 농민도, 노예도 그림을 감상하고 평가할 권리가 있다”고 외쳤습니다. 이동파 화가를 소개합니다.


왕립미술학교 자퇴 수리코프 등 14명



러시아의 이동파 풍경화가 이반 시시킨이 그린 ‘소나무 숲의 아침(1889년 작)’. 이동파 화가들은 귀족뿐 아니라 가난한 농민 등 일반인들도 그림을 감상할 권리가 있다며 열차를 타고 길게는 보름 이상 시베리아 등지를 돌아다니며 전시회를 열었다.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웹사이트]


러시아 미술사의 기원은 18~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표트르 대제(1672~1725·로마노프왕조 4대 황제)는 발트해 연안의 늪지대를 계획도시로 조성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했다. 대제는 이곳에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보다 더 화려한 여름궁전을 짓고, 유럽 왕족들을 초대해 성대한 파티를 열었지만 유럽 강대국들은 러시아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독일에서 시집온 예카테리나 2세(EkaterinaⅡ·1729 ~1796)는 겨울궁전(에르미타주·Hermitage Museum·프랑스어로 ‘은둔소’를 뜻함)을 세우고 값비싼 보석과 고가의 미술품을 수입해 모으기 시작했다. 영국 대영박물관과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이어 세계 3대 박물관에 꼽히는 겨울궁전은 현재 300만 점 이상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렘브란트 등 유명 화가의 작품 원본이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예카테리나 2세가 유럽에서 들여온 고가의 미술품은 러시아 고유의 작품이 아니었다. 여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왕립미술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을 이탈리아·프랑스 등으로 유학을 보내 그림을 배워오게 했지만 새로운 무언가를 얻기는 힘들었다.


 1870년 왕립미술학교 학생 14명은 유럽 미술만 숭배하는 풍토에 반발해 “졸업작품의 주제를 자유롭게 선택하게 해 달라”고 학교 측에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얼마 후 14명은 단체로 자퇴서를 내고 “더 이상 지배층을 위한 그림은 그리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미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며 자신들이 그린 그림을 들고 러시아 방방곡곡을 순회하며 무료로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짧게는 5~6시간, 길게는 보름 이상씩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래서 러시아어로 이동하는 사람들이란 뜻의 ‘이동파’란 이름이 붙여졌다.


귀족 초상화 대신 서민·풍경 즐겨 그려



영국 대영박물관과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이어 세계 3대 박물관에 꼽히는 ‘겨울궁전’. 유명화가들의 원본이 전시되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http://www.hermitage museum.org)이나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http://www.tretyakovgallery.ru)은 16~17세기 그림부터 전시하고 있다. 이 시기의 작품은 대부분 해외에서 고가에 들여온 것이다.


 18세기 그림부터는 주인공이 달라진다. 황제·귀족의 초상화나 고급 드레스, 가슴에 달린 훈장 등이 사라지고 평상복 차림에 바느질을 하는 여성, 밭 매는 아낙네, 기타 치는 소년이 등장한다.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섬이 아닌 러시아 자작나무가 그려지고, 정치 사회적으로 모순된 러시아의 현실이 풍자돼 있다.


 이동파 화가로는 이반 크람스코이(Ivan Kramskoy· 1837~1887)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풍경화 전문가인 이반 시시킨(Ivan Shishkin·1832~1989)이나 바실리 수리코프(Vasily Surikov·1848~1916), 일리야 레핀(Ilya Repin·1844~1930)도 유명하다. 풍자적인 그림을 그렸던 바실리 페로프(Vasily Perov·1833~1882), 이사크 레비탄(Isaac Levitan·1860~1900) 등도 있다.


 이동파 화가의 활동은 반세기 가량 지속됐지만 러시아 미술계에서는 이들을 이단아로 취급하면서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았다. 정부의 지원도 없었다.


 상인 파벨 트레티야코프(Pavel Tretyakov·1832~ 1898)는 이들의 숨은 재능과 가능성을 알아보고 물심양면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11세기 러시아 성화부터 이동파 화가들의 그림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 그림을 모았다. 활동 중인 화가들에게는 경제적으로 도움을 줬다. 그림을 그릴 때 물감 색이 밝을수록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늘 어두운 색으로 그림을 그렸던 레비탄에게는 그의 그림 가치보다 몇 배나 더 후한 값을 쳐주고 그림을 사오기도 했다. 그렇게 모은 그림이 6만여 점이나 된다.


 트레티야코프는 자신이 죽으면 집과 그림을 모스크바 시에 기증하겠다고 약속했다. 모스크바시는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6만여 점 소장




(위에서부터) 바실리 페로프의 ‘세 남매’, 이사크 레비탄의 ‘볼가강’과 ‘황금의 가을’, 이반 크람스코이의 ‘이름 없는 여성’.


이동파 화가 페로프의 작품 중에는 ‘세 남매(트로이카·사진 2)’가 유명하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세 남매가 물을 길으며 어렵게 생계를 유지해 나간다는 스토리가 배경에 깔려 있다. 페로프는 앞으로 이들이 평탄한 길을 갈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왼쪽 벽면 맨 위쪽에 있는 작은 창문에 호롱불을 그려 넣었다. 작은 희망의 불씨를 피워놓은 것이다.


 풍경화를 전문으로 한 시시킨의 작품에는 사람이나 동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소나무 숲의 아침(사진 1)’에는 곰 네 마리가 그려져 있다. 시시킨은 이 그림을 통해 양지와 음지, 새싹과 꺾인 나무를 보면서 인생의 탄생과 죽음, 기쁨과 고통의 희로애락을 담고자 했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걸려 있는 이 작품 속의 곰은 시시킨이 사망한 후 그의 애제자가 ‘그림이 뭔가 허전해 보인다’며 그려 넣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진정으로 시시킨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시시킨의 작품을 제자가 망쳐놓았다며 슬퍼하기도 했다고 한다.


 레비탄은 세계적인 드라마 작가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1860~1904)의 절친한 친구였다. 어린 시절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롭게 자랐던 레비탄은 가족의 사랑이나 우정을 알지 못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틈날 때마다 붓을 잡았지만 가난한 형편 때문에 값비싼 밝은 색의 물감을 살 수가 없었다. 처음에 레비탄이 그렸던 그림들은 ‘볼가강(사진 3)’처럼 회색빛으로 가득했다.


 그랬던 레비탄은 20세 무렵 체호프를 만나면서 인생의 큰 변화를 맞게 됐다. 의사이자 작가였던 체호프는 레비탄의 안타까운 사정을 알고 자신이 번 돈으로 물감을 사주고, 여름이면 다차(별장)로 초대해 몇 개월씩 먹고 쉬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와줬다.


 체호프를 통해 사랑과 우정을 알게 된 레비탄은 이후 ‘황금의 가을(사진 4)’이란 작품으로 트레티야코프의 눈에 띄게 된다. 트레티야코프는 당시 레비탄 그림의 시세보다 4~5배 이상 더 쳐주고 그림을 샀다. 이 작품은 나중에 프랑스 전시전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이동파는 1923년 마지막 전시를 갖고 혁명정부 하에서 조직개편을 위해 해체됐다. 정부의 후원 없이 50년 가까이 지속된 이들의 사상과 작업은 후대의 러시아 미술과 서구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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