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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squeen Aug 28. 2020

화장하지 않은 앵커

민낯은 더 빛났다

사전 설명 : 방송기자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방송을 얼마나 잘하느냐도 포함됩니다. 방송 뉴스에는 기자들이 다양한 형태로 출연을 합니다. 취재 현장에서 라이브로 현장 연결하기도, 분석 기사나 기획 기사의 경우 사전에 라이브 직전 뉴스센터에서 사전 녹화한 영상이 뉴스 진행 중에 방송되기도 합니다. 앵커는 뉴스를 라이브로 진행하지만 기자들은 사전에 만들어진 리포트가 제시간에 플레이되는 형식인데 라이브 출연 경험이 많은 기자들 '믿고 보는 기자'기 때문에, 늘 라이브 잘하는 기자들에게 기회가 갈 수밖에 없지요.  저는 리포트 제작 경험은 많지만 앵커가 앉아있는 뉴스센터에 라이브로 출연해본 경험은 없었습니다. 현장 연결 외엔 라이브로 뉴스에 출연할 기회가 없었다는 말씀이지요. 이 점을 참고로 말씀드리고 글을 시작합니다. 


# 생에 첫 뉴스센터 출연 


26일 수요일.

아침부터 부장에게 전화가 왔다.     


“태풍 바비가 북상해서 밤새 특보가 잡혔어.

추가 야근자가 필요한 상황인데, 오늘 지원 나갈 수 있니?”


“네? 저 오늘 조근이어서 일찍부터 일하고 있는데 밤새 일하라고요?”

“응. 야근 가능한 상황이냐고. 네가 안되면 oo이가 해야 하는데 일단 먼저 네 의사를 묻는 거야.”     


내가 아님 후배가 추가 야근을 해야 한다는 선배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나도 하기 싫은 야근을 후배인들 하고 싶을까.’      

그것도 밤새 뜬 눈으로 지새우며 고생할 게 뻔 한 야근을 말이다.      


“우리 부서에서 꼭 한 명 해야 한다면 제가 할게요.”

“그래, 그럼. 지금부터 일 접고 쉬다가 저녁 먹고 8시쯤 회사로 나와.”     

(참고 : 52시간제 시행 이후 기자들도 근무 시간을 매일 입력한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야근자는 24시간 일을 했는데, 시간 입력 시스템으로 바뀐 뒤 저녁 출근 -> 아침 퇴근으로 업무 환경이 개선됐다.)


사실 ‘카톡’으로 업무를 소통하는 게 일상화된 이후 여느 직장인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평일 낮 시간대에는 쉬어도 쉬는 게 아니다. 실시간 울려대는 카톡을 보고, 내 나와바리 일이면 최소한 돌아가는 상황 정도는 숙지하고 있어야 하고, 때에 따라선 휴가 중에도 카톡 메시지를 보고 전화 취재 등으로 업무 보고를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오후 5시가 넘어갈 무렵.

새로운 카톡 방에 초대됐다.


태풍 특보 준비 팀 단톡 방.

거기엔 파견자 6명의 이름과 기자 별 맡은 임무가 적혀있었다.     


내 이름 옆엔  -> 뉴스특보 출연(제보 영상 담당)

      

갑자기 하늘이 노래졌다.

스튜디오 출연? 아니. 난 야근 추가 파견자인데 출연이라고?...      


부장께 전화를 걸었다.      


“선배, 저 오늘 뉴스특보 때 출연입니까? 제보 영상 소개하라는데, 제가 현장 중계차 연결은 많이 했어도, 뉴스 센터에 직접 출연한 경험은 없는데요. 오늘 대형 사고 나면 어떡해요. 천천히 8시쯤 나오라면서요. 당장 9시 넘어서부터 출연이 잡혀있던데요.”     


부장도 당황하셨다.     


“나도 방금 얘길 들었다. 일단 회사로 나와라.”     


노트북을 챙겨 부랴부랴 출근했다.

지하 주차장에서 보도국으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데, 야근 파견 팀 총괄 데스크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현주 씨, 오늘 출연 못하겠다고?

그럼 현장 나가야 해. 현장이 출연보다 낫겠어?”


“아... 그럼 그냥 할게요. 출연.”     


그렇게 나의 야근 운명은 정해졌다.

1년 후배 K 기자가 맡은 롤을 이어받으면 된다는 건데, 말이 쉽지...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아침뉴스팀 데스크 선배는 나를 불러 말씀하신다.     


“출연 분량은 5분 이상. 더 길어도 돼. 충분히 영상 보여주고, 자세히 설명해줘. 밤새 계속 출연한다고 생각하면 돼.”     


K 옆 자리에 노트북을 펼치고 앉았다.

속으로는 수십 번 K에게 말을 걸고 출연 노하우를 물었겠지만, 정신없이 자기 다음 출연 기사를 준비하고 있는 후배한테 방해가 될 순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분장실로 내려가 당장 두 시간 뒤 출연이라며 헤어 메이크업을 받았다.     


“제가 평소 화장은 잘 안 해서, 머리만 단정하게 해 주시고요. 화장은 안 한 것처럼 살짝만 해주세요.”     


분장실 언니는 ‘안 한 것처럼’이란 말에 눈썹도 제대로 안 그려주셨다.


“아... 그래도 뉴스센터 출연인데 눈썹은 그려주셔야...”     


7시 반쯤. 보도국 사회부 자리로 다시 왔다.


화면을 통해 여유롭게 방송하는 K를 보며 부럽기도 하고, 당장 내 걱정에 눈앞이 캄캄하기도 했다.


‘망했다. 방송 기자는 실수하면 전 국민 앞에 망신인데. 오늘이 그날인가?...’

     

일단 제보자에게 전화를 돌렸다.      


“선생님, LPG 충전소 간판이 금방 떨어질 것 같던데. 지금 상황은 어떠세요.”

“2012년 태풍 때도 한번 떨어졌는데, 간판이 또 떨어질까 봐 걱정돼요. 내가 장흥에서 LPG 충전소만 18년째 하는 사람인데, 지난번엔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는데...”     


출연 시간은 다가오고, 불안한 마음은 커졌는데. 수화기 너머 제보자의 목소리에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그래. 어차피 현장 연결이나 센터 출연이나 비슷할 거야. 뉴스 진행 PD로 라이브 뉴스 진행도 해봤는데 뭘 걱정해. 자신감을 갖자.’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할. 수. 있. 다.


그리고 9시 20분.


뉴스특보가 시작될 때쯤 스튜디오로 향했다.     




# 앵커의 민낯은 빛났다 


첫 번째 특보엔 메인 앵커 왕종명 선배와 마주 앉았다.

7년 전 같은 부서에서 1,2진으로 함께 일했던 경험이 있는 선배였다.      




앵커 : “ 현주야. 제보 영상 소개지? 그림을 충분히 보여주면서 하자고.”     


‘아.. 내가 영상 10개를 내 말 속도에 맞춰서 그림 녹화를 떠 왔는데요’라고 상황을 설명할 틈도 없이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기자 :“파도가 치면서 물기둥이 세차게 솟아오르더니 결국 자동차를 덮치고 맙니다.”

앵커  :  “저걸 월파라고 그러죠. 방파제 넘어가는 거를.”     


나도 앵커의 애드리브에 호응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준비한 것은 10개 영상이 내가 기사를 읽는 속도에서 1~2초 정도 여유를 두고 완제품으로 준비해놓은 영상이었다.     


‘저.걸. 월.파.라.고. 그.러.죠. 방.파.제. 넘.어.가.는. 거.를...’      


앵커의 분량만큼 영상 플레이 시간이 내 머릿속에서 빠르게 지나갔다. 다음 그림 설명은 오디오가 1.5배속으로 빨라졌고, 다시 템포를 찾았다가 속도를 높였다가를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출연 분량이 끝났다.     


다행히 큰 사고 없이 방송을 마쳤다.     

자정이 됐고. 밤사이 특보 때는 앵커가 기자에서 아나운서로 바뀌었다.

원고를 들고 센터에 들어가서 마이크를 차고 출연자 석에 앉으려고 하는데...     


앵커가 노.메.이.크.업.이었다.     


앗! 브런치 작가 '김나진 아나운서!'


나진 씨 브런치에서

‘뉴스 앵커가 메이크업을 하지 않는 이유’라는 제목의 글을 읽고 공감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나진  씨가 특보 상황에 정말 메이크업을 하지 않고 앵커석에 앉아 있는 게 아니겠는가.     


나진 씨는 열심히 뉴스 원고를 읽고, 방송을 준비하고 하고 있었다.     


앵커를 비추는 카메라에 프롬프터를 봤다.

짧은 시간, 전국 각지에 중계차를 연결해야 하고, 전화로 마을 이장님을 연결해야 하고, 출연자와 질문 답변으로 호흡을 맞춰야 하는 내용들이 바쁘게 화면에서 전환되고 있었다.      


앵커와 제대로 인사할 틈도 없이 방송은 시작됐고, 출연 기자가 나 하나이라는 이유로 PD는

나를 뉴스 초반부터 앵커 우측에 계속 앉혀놨다.      


앵커를 잡는 카메라 프롬프터를 보는데

‘oo하에 나가있는 취재기자 연결합니다’가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니겠는가.


‘헉. 저거는 오타인데? 기자가 현장에서 급하게 기사를 보내면서 받침이 빠졌구나!’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앵커는 이미 기자를  부르고 있었다.     


“oo항에 나가 있는 취재기자 연결합니다. ooo 기자!”     


휴... 다행이다. 앵커가 바로잡을 수도 있지만, 낯선 지명이라서 혹시 놓치거나 오타가 잘못 전파를 탈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걱정했는데. 역시, 김나진 앵커는 프로였다.     


새벽 1시 특보를 준비할 땐 내 원고를 미리 뽑아서 앵커에게 전달했다.

그림 설명 들어가기 전에 기자 원샷이 있고 ‘이런 멘트’를 할 거라고 알려줬다.     



방송을 마치고 앵커와 인사하는데

민낯의 앵커 얼굴이 더 빛나 보였다.     




“비에 인생의 모든 것을 속절없이 떠내려 보낸 이재민들의 소식을 전해야 하는데

 얼굴에 화장품을 바르며 준비를 한다는 것이 무언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갑작스레 재해재난 특보를 전하는 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김나진 아나운서의 브런치의 글 

<뉴스 앵커가 메이크업을 하지 않는 이유 中에서...>     




사실 나도 기자생활을 하면서 늘 고민하는 부분이다. 결국 모든 것은 시간 싸움인데, 그 시간에 하나라도 더 생생한 소식을 전달하고자 하는 앵커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글을 마치며...


PS: 조금 전 전날 뉴스 시청률 표가 나왔다.  뉴스 특보부터 아침 뉴스투데이까지 5분 가까운 분량으로 5번 출연을 했는데, 아침 뉴스 시청률 내 아이템 분량에 <시청률 3.2 >. 평균 아침 뉴스가 시청률을 3% 이상 넘는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에 잘 나온 점수(?) 다. 악덕 PD 시절 아침마다 챙겨보던 '성적표'를, 오늘 다시 보니 느낌이 새롭다.  


"태풍 이동 경로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MBC에 영상과 사진을 제보해주신 시청자 여러분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제가 소개해드린 몇몇 시청자분들은 꼭 제보 사례비 신청해서 보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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