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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squeen Jan 09. 2021

포기할까 망설이는 너에게

지금, 꿈을 꾸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합니다.

  


"99도까지 열심히 온도를 올려놓아도 마지막 1도를 넘기지 못하면

영원히 물이 끓지 않는다. 물을 끓이는 건 마지막 1도, 포기하고 싶은

바로 그 1분을 참아내는 것이다."    


이미 현답이 있는데 우문을 다시 던져봅니다.     


"꼭 100도로 끓어야만 할까."



100도까지 끌어올린 나는 꿈이 현실이 되는 그 짜릿한 순간을 마주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꿈을 이루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90도의 물은 커피를 내리기에 가장 좋습니다.

그 유명한 이연복 셰프의 멘보샤는 60도에서 튀겨야 가장 좋은 맛을 낸다고 하죠.


40도는 신생아에게 분유를 먹이기 가장 좋은 온도입니다.

사람이 면역력을 유지하기에 가장 좋은 온도는 약 20도입니다.     


< MBC 김나진 아나운서가 쓴 '포기할까 망설이는 너에게' 중에서...>  

        



청년 백수시절. 나는 서울 면목동에 한 자그마한 옥탑방에 살았다.

다리를 펴면 문이 닿을 만큼 작은 방, 그 방문을 열고 나가면 싱크대 앞에 간신히 두세 명 앉아서 밥을 먹을 정도 크기의 부엌이 있었고, 화장실엔 통돌이 세탁기가 하나 있었다.

      

지금도 눈을 감고 그 시절 옥탑방을 그려보라면 선명하게 그릴 수 있다.

참 가난했지만 꿈 많았던 시절, 내가 꿈을 꾸며 살았던 공간이기에 그렇다.

     

나에겐 남들보다 탁월한 능력이 하나 있다. 바로 공감능력이 그것이다.

     

어린 시절엔 경제적으로 넉넉한 환경에서 자랐다. 배우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돈 걱정 안 하고 배웠다.

바이올린, 피아노, 성악 레슨을 받았고 수영, 테니스까지... 시골에 살았지만, 엄마 차 아빠 차가 따로 있었고, 두 분 모두 일명 냉장고 폰으로 불리는 모토로라 휴대전화를 쓰고 계셨다. 아빠는 지역에서 로터리클럽 회장을 두 번 연임하셨고, 지역사회에서 기부 등 좋은 일에 힘쓰시던 분이셨으니, 그런 부모님의 뒷모습을 보고 자랐다.

     

그런데 가난이란 놈이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해외 유학 중 우리나라에 경제 외환위기(IMF)가 불어닥쳤다. 1달러 당 800원대에 유학을 갔는데, 어느 날 1달러 당 1900원을 넘어섰다. 하필 어려운 시기에 부모님은 금전적으로 사기를 당하셨고, 시중 은행 금리는 오를대로 올랐다. 유학 중인 딸에게 돈을 보내줘야 하는데 환율은 역대급으로 치솟았으니...

     

내 기억 속 우리 집은 어린 시절 풍요로웠던 모습이었는데,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더니 갈 곳이 없었다.

엄마는 보증금 천만 원짜리 옥탑방 하나를 전세로 구해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이 집에 살던 청년이 사법시험에 합격해 나갔다며, 나도 시험에 붙을 수 있을 거라고...


짧은 인생에서 냉탕과 온탕을 모두 경험해봐서 그런지 공감능력 하나는 자부한다.


유학생활 때 삶도 참 순탄치 않았지만,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옥탑방에서 보냈던 시간도 쉽지 않았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면 되는데, 유학 시절 특파원들의 오보를 보며, 괜히 전문기자가 되겠다고 꿈을 꿔, 소위 '고시'라 불리는 언론사 시험을 준비에 뛰어든 내 모습은 '무모한 도전'에 가까웠다.

     

유학 가기 전엔 아빠에게 "아빠, 만원 만~"이라고 웃으며 손 내미는 게 아무렇지 않았다.

아빠는 "야, 아빠 이름이 만원 만이냐? 넌 왜 아빠만 보면 만 원 만 원 해!" 하면서도 엄마 몰래 용돈을 주시곤 했다.

      

그런데 막상 청년백수 시절엔 그 만 원이 없어서 눈물을 훔친 날이 많았다.

같이 언론사 시험 준비를 하는 스터디원들과 시사상식 시험을 봐서 틀린 문제당 100원을 걷었고, 벌금을

모아서 점심을 먹었는데. 3천 원에 밥과 반찬 무제한 리필인 식당들만 찾아다녔다. 가끔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과 참살이길 식당이 아닌 학생식당에 갈 때면 기본 국에 밥, 그리고 반찬 한 개?를 넘기기가 힘들었다. 내 주머니엔 그 만 원도 없는 날이 더 많았으니까.


꼭 2년을 공부했다. 좋아하는 친구들도 안 만나고,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과 스터디를 꾸려 '꿈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의지하며 지냈다. 그 시절 나는 MBC 100분 토론이란 프로그램에 시민논객을 지원했고. 시민 논객 중 운 좋게 <시선집중> 라디오 작가로 발탁됐다. 진행자와 PD가 논객 중, 기자 지망생 가운데 막내 작가로 일 할 기회를 주자고 했는데 운 좋게 그 기회가 나에게 온 것이다.  그 해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2006년 3월. MBC 100분 토론 시민논객 충 처음으로 기자가 탄생했다.

B 모 씨가 YTN 기자에 합격한 것이다!!!

그런데 B 씨가 수습기자 생활을 막 시작하자마자 사표를 냈다고 한다.

논객 모임 때 B 씨를 만나서 따져 물었다.      


"아니, 그 힘든 시험을 통과하고 왜 그만뒀어!"

"응. 난 PD 지망생인데, 연습 삼아 시험 한번 봤는데 붙어서 잠깐 나가본 거.

근데 역시 나는 기자랑 안 맞더라고."


그때 YTN에 합격한 기자가 4명이었고, B 씨의 퇴사로 3명이 남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자가 장난인 줄 알아? 그럼 최종 면접에서 안 간다고 했어야지! 당신 때문에 떨어진 사람은 어쩌고...!!!"      


힘들게 합격하고 입사 한 달도 채 안되어 퇴사한 B 씨에게 나는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누군가에겐 모든 것을 걸고 준비하는 시험이, 누군가에겐 그저 실전 대비 연습용? 같은 시험이었다는 게 화가 났다.  

   

나는 그해 9월 기자가 됐다. 100분 토론 시민논객 출신 공식 기자 2호. 하지만 B 씨가 수습기자 딱지도 떼지 않고 입사 보름(?) 만에 퇴사했다는 이유로, 나는 내가 100분 토론 출신 기자 1호라고 말하고 있다. ^^;;




2007년의 어느 날, 기자 1년 차 때 퇴근하고 100분 토론 모임에 나갔다. 의미 있는 주제나 방송이 있으면 '홈 커밍 데이'처럼 과거 논객들을 초청했는데,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그때 한창 시민논객으로 활동하고 있던 친구들이 얼마 후 SBS 기자로 두 명이나 합격하고, MBC 기자, 아나운서로 합격했다.

 

그리고 몇 년 후.

한창 100분 토론 시민논객 출신 언론인 클럽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얘기다.


당시 PD님 바로 밑에 AD 언니랑 ‘논객 출신 누가 있지?’ 하고 있는데. 언니가 말한다.     


“MBC 보도국에 A, B, C, 기자와 아나운서 김나진...”

“잉? 아나운서가 있다고?”

“김나진 아나운서 몰라? 왜, 너 그때 방송 왔을 때 네 뒷자리에 앉았잖아.”

“그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날 찍은 사진 봐 봐. 거기 우리 뒷자리에 있어.”

     

100분 토론 AD 언니 말이 맞았다. 사진을 보니 정말 뒷자리에 김나진 씨가 앉아 있었다.     

그 뒤로 방송에서 나진 씨가 나오는 것은 유심히 봤다. 스포츠 중계든 뭐든..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그런 마음에서?     


10년 전, 내가 MBC로 이직을 했고, 2012년 파업 때 여러 번 오가며 마주쳤지만 나진씨와 인사를 하진 않았다. 나는 이 사람을 알지만, 이 사람이 나를 모를 수도 있는데 인사했다가 ‘누구시죠?’하면 웬 망신?...

    

2014년 2월. 갑자기 대타(?)로 소치 동계올림픽 취재를 가게 됐고, MBC 출장팀은 터키 공항에서 환승을 해야 했다. 그런데 러시아 항공사가 우리 회사에 짐 오버 차지 비용을 폭탄으로 때리려고 하는 게 아닌가!!!. 또 오지랖이 발동했다...ㅠㅠ

 

난 “방송장비 무게에 따라 추가되는 비용은 이미 서울에서 지불했다.”면서 러시아 항공사 직원이랑 실랑이를 벌이며 가격을 깎고, 또 깎았다. 그리고 잠시 공항 한 구석에서 쉬고 있는데, 내 동기인 허일후 아나운서가 인사를 시켜준 건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무튼 나진 씨와 처음 인사를 했다.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많고, 언론사 입사는 1년 후배인 김나진 씨.


브런치 <화장하지 않은 앵커>의 주인공, 그 김나진 씨다.

(-> 내가 화장하지 않아서 를 앵커라고 쓴 줄 오해하는 분들이 있는데,  앵커 김나진 씨를 보고 쓴 글입니다. ^^ 저는 기자입니다. 앵커 아니고요.)

     

김나진 씨가 나이 마흔 하나에 쓴 에세이 <포기할 까 망설이는 너에게>를 읽었다.

직장생활을 하다 꿈을 위해 청년백수를 자처했던 날부터, 꿈을 이룬 이후 현실에서 마주하게 된 고민과 갈등들.


꿈을 이룬 뒤 나만의 설렁탕 한 그릇을 사 먹으면서 느꼈을 감정과, 이후 그곳에 촬영을 갔다가 사연을 얘기하는 장면... 영화 기생충에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던 풍경...


이한 아나운서 김나진 씨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삶이 아닌 나다운 모습을 찾아가며 적은 에세이다.

여러 번 실패하고, 여러 번 좌절했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오늘의 김나진 씨가 있구나 싶은 글이다.

     

이제 막 마흔 한 살이 된 내가, 나진 씨 글을 읽으면서 시간여행을 했다.


청년백수이던 시절 옥탑방에서 쭉~ 다리 펴고 누워 꿈을 꾸던 그 시절로 돌아갔다가,  어느덧 15년 차 기자로 오늘을 살고 있는 모습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한 기분이다.


“맞아!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는데.”

“맞아! 나도 그때 힘들었어.”

“맞아! 나도...”     


지금 당장 취업 준비를 하고 있거나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에겐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될만한 글이다.


꿈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라면. 촉촉한 카스텔라 빵을 우유에 풍덩 빠뜨려 입안에 쏙~ 넣을 때 그 느낌 같은 책, <포기할까 망설이는 너에게>를 추천한다.      


김나진 씨의 에세이를 읽고, 내 마음이 촉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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