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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squeen Jan 10. 2021

내 인생의 금메달

이젠 알 것 같아요.

       


14년 전, 어느 날.

현정화 감독을 기자와 취재원으로 만났다.

88서울 올림픽에서 세계 정상에 우뚝 섰던 그 현정화.     


말이 통했다.

참 신기하게도...     


띠동갑이라 그런가? 아님 성격이 비슷한건가? 술을 좋아해서 그러나?     

한 번, 두 번, 술자리를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호칭도 바뀌었다.

그동안 둘이 함께 마신 술을 소주병으로 세면 몇 짝은 될 것 같다.     


하루는 언니가 서울 한남동 집으로 불렀다.

자취하는 기자 동생, 집에 와서 집밥도 먹고, 김치도 가져가라는 거였다.      


어머니, 결혼 안 한 언니 동생, 형부, 서연이 원준이...

언니네 가족들과 인사하고, 밥도 맛있게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언니가 앨범을 꺼내왔다.      


86 아시안게임, 88 올림픽, 91년 지바세계선수권대회...     


앨범 속 현정화는 내가 상상했던 그 이상의 세계적인 선수였다.     


"와... 언니, 지금 김연아 인기와는 비교할 수가 없네요."

     

앨범에서 앳된 현정화 선수가 북한 리분희 선수와 함께 찍은 사진을 봤다.

     

"나는 분희 언니와 헤어질 때, 그날이 마지막일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다시 만날 줄 알았는데 세월이 이렇게 흘렀다. 언젠가 남북단일팀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써서 꼭 영화를 만들고 싶어."

    

정화 언니는 리분희 선수와 했던 약속이 있다고 했다.     


"언니, 어느 대회가 가장 인상적이셨어요? 어떤 금메달이 가장 기억에 남는지..?"    


"사실은 말이야. 내가 대회에서 딴 금메달도 보람 있지만, 진짜 내 인생의 금메달은...

그건 내 딸 서연이야. 내가 서연이를 낳은 게 그게 내 인생의 금메달이야."

     

그땐 그 말의 깊이를 잘 알지 못했다.     




2011년 3월.

경기도 안양의 한 체육관을 찾았다.

현정화 감독이 영화 '코리아'를 준비하면서 배우들에게 직접 탁구를 지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응원차 방문했다.      


배우 하지원 씨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휴대폰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와... 나 시크릿가든 재미있게 봤는데. 길라임이네!' 하며 찰칵 하는 순간,

어깨 좋은 아저씨가 다가오더니 매니저라며 사진을 지워달라 요청한다.

맨얼굴이어서 외부에 사진이 유출되면 안된다고...ㅠㅠ    


그날 연습이 끝나고 체육관 근처의 한 술집에서 현 감독과 함께 술 한 잔 기울이며

얘기했다.     


"언니, 그때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하더니. 드디어 그 꿈을 이루시네요!"

     

2012년 영화 '코리아'가 개봉됐고,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몇 번이나 눈물을 훔쳤다.


2007년 앨범 속 한 장면이 그대로 스크린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이렇게 영화로 다 담아냈을까 싶었다.      


또 세월이 흘렀다.

어느덧 내 딸이 당시 서연이 나이대가 됐다.

    



오늘 아침.

딸에게 엄마랑 어디 갈 곳이 있다며 현정화 감독 이야기를 꺼냈다.     


"김연아 선수보다도 더 유명한 이모야. 금메달 알지? 큰 대회에서 금메달도 따고...

지금 이모 가족들은 미국에 살고있어"

    

딸아이와 현정화 감독을 만났다.

14년 전 이야기부터 영화 이야기, 코로나 이야기까지 이어지는데 정말 마음이 짠했다.     


"언니. 그때 내가 한남동 언니네 집 놀러가면

형부가 서연이 원준이 학습지 봐주고 공부 챙겼잖아요.

오늘 아침에 내가 그거 하다가 왔거든.      

그때 언니네 집에서 봤던 풍경이 지금 내가 사는 모습이에요.

일하면서 아이 챙기고, 정말 쉽지 않은데.     

그때 왜 언니가 '내 인생의 금메달'이 서연이라고 했는지, 이젠 알 것 같아요.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잖아요.

내가 정말 잘 하지 않으면, 안되겠더라고요.

저는 인생을 두 번 사는 기분이에요."

    

그랬다. 정말 요즘 내 마음이 그렇다.     

내 머릿속에 내가 기억하지 못하던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을 딸아이를 통해 보곤 한다.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부모의 습관, 말투, 행동을 정확히 보고 배우는 아이...

그래서 더 조심하고 조심한다.     


"언니, 기억나요? 언니 나이 마흔 됐을 때, 우리가 잠실 종합운동장쪽에서 둘이 소주

네 병인가? 마시고 대리 불러서 집에 가는데 언니가 실감이 안 난다면서 얘기했잖아요.

근데 제가 그때 언니 나이보다 많아요."

     

"맞아. 그랬지. 마흔되는 게 참 두려웠는 데. 마흔이 참 좋은 나이였어. 근데 그거 알아?

50대가 되니까 더 좋다. 네가 50되면 알게 될거야. 애들 다 크고 내 시간이 생겨."

  


    

오늘은 내 인생의 금메달과 함께, 진짜 금메달리스트를 만났다. 정화 언니가 집에서 손수 차려준 따뜻한 집밥에 수육, 된장찌개, 계란말이까지..


그렇다. 오늘은 마치, 어린 아이가 일기장에 일기를 꾸욱 눌러 쓰듯.  그렇게 내 마음에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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