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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squeen Jun 26. 2021

아름다운 인생

Life is Beautiful

간절하게 기자를 꿈꿨던 시간이 있었다.

스터디가 있는 날엔 안암동 캠퍼스로 향했고, 스터디가 없는 날엔

강남역 파고다 어학원에서 CNN 첫 수업을 들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서 공부를 하는데, 하루는 CNN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여러분들, 제 강의를 듣고 출근하는 분들도 있으시고 공부하러 가시는 분들도 있으실 텐데요.

KBS 노현정 아나운서 아시죠? 노현정 씨도 여러분들이 앉은 그 자리에서 제 첫 수업을 들었어요.

여러분들처럼 열심히 듣더니 어느 날 꿈을 이루더라고요."    


세월이 흘렀다.

나는 16년째 기자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작년에 코로나19로 화상재판 기획 취재를 했는데, 서울고등법원 모 부장판사님 방에서 낯익은

뉴스 소리가 들렸다. CNN은 아니고, PBS 뉴스였다.     


"미국에서 공부하셨나 봐요?"

"잠깐 살다오 긴 했는데, 안 들으면 잊어버리게 되어서..."

"아, 저도 예전에 CNN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CNN 수업? 그럼 혹시 아무개 선생님?"

    

그렇다.

그분도 CNN 선생님의 제자였던 것이다.     


지금은 파고다 어학원을 퇴사하시고, 미국으로 건너가 살고 계신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다.     


"선생님, 잘 지내시죠?

혹시 ㅇㅇㅇ 판사님 아세요? 오늘 인터뷰하다 만났는데, 선생님 수업 들었다고 해서요."

    

판사님 역시 CNN 선생님께 연락을 드려 아무개 기자를 확인했다고 한다.      


"세상 참 좁네요. 비슷한 시기에 두 분 다 제 수업을 참 열심히 들으신 분들이에요.

그런데 인터뷰로 만나셨다니. 정말 반가운 소식이네요."

          

그리고 며칠 전.     


인사이동으로 법조팀장을 맡게 돼, 대법원 기자실로 자리를 옮겼다.


대법원에 계신 분들께 명함을 들고 인사를 다니는데, 작년에 만난 CNN 선생님의

제자분이 대법원에 계시는 게 아니겠는가!     


또 미국에 계신 CNN 선생님께 소식을 전했다.

답이 왔다.     



"현주 씨, 축하해요. 정말 계속 발전하시네요.

현실 안주 안 하고 정말 노력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저는 일찍 알아봤어요. ^^     

예전에 생일날도 잊고 공부하시다가 친구들이 데리고 간 일이 기억나요.

새벽 수업인데 그전에 수영도 하시고.

공개적으로 부탁드리면 제일 먼저 손 드시고.

정말 일관성이 있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고 계셔요.     

 Life is beautiful~ 은 현주 씨에게 정말 잘 어울려요~"




CNN 선생님과 연락하면서 잊고 살았던, 과거 꿈 많던 시절의 나를 다시 만났다.

 

새벽 첫 수업인데 그전에 수영을 했다고 말씀하신 건 아마 내가 기자 되고 한 후에도 CNN 선생님 수업이

듣고 싶어서 출근 전에 수영 갔다가 수업 듣고 출근했던 시간을 말씀하시는 것 같다.

      

청년 백수 시절엔 정말 청바지에 흰 티 하나만 입고, 남이 어떻게 보든 신경 쓰지 않고 내 공부만 했다.

백수에겐 생일도 큰 의미가 없었다. 오늘 하루 공부를 쉬면, 흐름이 끊겨서 회복하는데 2~3일 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평소처럼 지냈다. 근데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이 찾아와 생일이라고 아침 먹자고 데려갔던 적이 있었구나... 선생님 말씀 듣고 보니 기억이 난다. 영어권에서 유학한 게 아니어서 영어를 잘 하진 못하지만, 뉴스 스크립트에 블랭크 쳐 있는 부분을 물어보면, 손 번쩍 들고 용기 내어 답하던 청년 백수의 모습도 기억난다. 어쩌면 아는 게 없어서 용감했던 것뿐인데. 그런 청년 백수를 섬세하게 기억해주시다니...     


아름다운 인생.     


20대, 기자를 꿈꿨던 청년백수가

40대, 기자로 일하며 '아름다운 인생'이라는 얘길 듣다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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