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수산업자 김 모 씨 사건에 박영수 특검 이름이 등장하는데, 수산업자 김씨와 부장검사 이 모씨를 소개해준 법조계 고위 인사가 박영수 특검이 맞는지, 수산업자로부터 금품을 제공받은 사실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건물 12층, 사무실 앞에서 박영수 특검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확인하시고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처음엔 번호가 잘못 눌렸나 했고,
다음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십 년 이상 사용했던 박영수 특검 번호가
'없는 번호'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특검 사무실 앞 유선번호로 특검 연결을 요청했습니다.
박영수 특검이 외출 중인데 사무실로 돌아올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고 했습니다.
특검보를 만날 수 있는지 물었더니 직원이 문 앞으로 나왔습니다.
특검보 역시 외출 중인데, 명함을 남겨 놓으면 전달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날 특검보도, 수사기획단장도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문자를 남겼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주말이 지나고 조간에 기사가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박영수 특검이 가짜 수산업자 김 모 씨에게 외제차를 제공받고, 얼마 후 현금 250만 원을 지불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미 제가 특검 사무실 앞에서 세 사람을 애타게 찾던 날, 이미 그분들은 기자가 사무실을 찾아온 용건을 알고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낡은 명함첩
저에겐 작은 습관이 하나 있습니다.
법조를 출입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명함에 만난 날짜와 장소, 특징 등을 적어두는 습관입니다.
어느 지역 출신으로 사법연수원 몇 기고, 종교는 뭐고, 취미, 가족관계는 어떠한지...
2010년 어느 날, 서초동의 한 복집에서 박영수 특검을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 법조팀은 점심 저녁 모두 팀 약속이 잡혀있어서, 개인적인 밥 약속을 할 수 없었고, 그날도 그러했습니다.
법조인 대관에 나온 법조인들의 프로필을 머릿속에 넣을 수도 없는데, 매번 식사 시간마다 새로운 취재원을 만나고, 자연스럽게 처음 듣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이어질 때면 나도 마치 그 사람을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착각하게 됐고, 그런 식사자리게 저에겐 또 다른 업무의 연장선상이었습니다.
그날도 차라리 혼밥을 먹지, 팀 약속은 가기 싫었던 날이었습니다.
일단 메뉴부터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복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복집을 가야 하고, 선배들은 박영수 대검 중수부장 시절 검찰이 어떤 수사를 했는지 장황하게 설명하는데, 내 눈엔 그저 능력 있는 변호사, 한때 잘 나가던 검찰 출신 변호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산호'라는 로펌 이름과 '변호사' 박영수 옆에 만날 날짜와, 장소 등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 명함첩을 다시 꺼내서 박영수라는 이름을 다시 보게 된 건 국정농단 사건 때였던 것 같습니다.
# 반성
2017년 12월, 다시 법조팀으로 오면서 낡은 명함첩을 다시 펼쳤습니다.
그 명함첩에 뚜렷한 특징이 적혀있지 않은 사람 중 검찰총장이 된 분도, 법무부 장관이 된 분도 여럿 있더라고요.
반성했습니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인데, 내가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사람을 잘 볼 줄 몰랐구나.
하지만 주변에서 "정말 검찰총장 될 줄 몰랐던 양반인데, 때를 잘 만나 검찰총장까지 됐다."라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으니, 제 안목이 아주 잘못된 건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후배들을 이끌고 함께 일해야 하는 위치가 되다 보니, 옛날 작은 복집에서 박영수 특검을 소개해줬던 선배들이 무척 그립습니다. 그때는 먹기 싫다 투덜대던 복도, 요즘엔 즐겨 찾는 단골 메뉴가 됐습니다.
하루는 같은 팀 후배가 며칠 연속 점심에 복집을 갔더니 한 마디 하더라고요.
"선배가 복의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알고 계십니까? 아마 살아있는 복들이 선배를 본다면, 다 무서워서 도망갈걸요."
매일 점심, 저녁 술자리가 있다 보니 복이 아니면 제대로 해장이 안 되더라고요.
뭐, 저 역시 팀 약속이 아닌 내 개인 시간을 더 꿈꿨던 시간이 있었으니 후배들의 마음도 이해됩니다.
#펜의 무게
박영수 특검 사무실에 찾아갔던 날, 저는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내가 확인하고자 하는 내용이 맞으면 어떻게 하지? 국민적 영웅에서, 업자에게 금품을 수수한 특검으로...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후배 기자를 보내지 않고, 당사자를 직접 만나러 갔던 이유는 상대방의 눈빛과, 뉘앙스를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일 겁니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어떻게 그 사람을 만나서 또 후배 검사에게 소개해줬는지, 얼마나 믿었기에 금품이 오갔는지...
요즘 저는 언론에 보도되는 기사 한 줄, 제목 하나로 설명하기엔 부족한 무언가를 느낍니다.
"펜의 힘은 총과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관계를 보면, 물론 사회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지요.
그렇지만 그 이면에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요즘은 그게 더 궁금합니다.
그날 오후 다른 루트로 박영수 특검이 이 사건에 어떻게 연루됐고, 등장인물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확인이 됐습니다. 하지만 저희 뉴스에서 박영수 특검의 이름을 밝히진 않았습니다.
당사자에게 직접 입장을 듣고 확인하지 전까진, 아무리 확실한 정보여도 더욱 신중해야 했으니까요.
그리고 며칠 후.
대법원 기자실에서 점심을 먹으러 가려고 하는데, 박영수 특검이 사의를 표명했다는 입장 발표가 나왔습니다.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정오 뉴스에 급하게 단신 기사를 처리하고, 기자실을 빠져나오는데 마음 한 구석에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습니다.
'박영수 특검은 왜 핸드폰을 바꿨을까?...'
수산업자로부터 금품을 수수하고 딸 학원비 대납까지 받은 부장검사도 검찰이 압수수색 하기 직전 핸드폰을 새 걸로 바꿔서, 증거를 찾기 어렵다고 들었었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것 외에 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건지, 있다면 언론은 어떻게 그 실체적 진실에 접근해야 하는 건지...
고민이 됐습니다.
요즘 저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날이 많습니다.
펜의 무게가 점점 더 무겁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언론의 역할은 무엇인지, 기자는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이 더 깊어집니다.
*가짜 수산업자 사건은 현재 경찰이 수사 중에 있고, 경찰팀 기자들이 취재를 하는데 사건 등장인물 가운데 법조계 인사들이 있고, 수산업자 특별사면 논란 등이 문제가 돼 법조팀에서 일부 취재 지원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