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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squeen Aug 02. 2021

등번호 74

9회 말 투 아웃


# 9회 말 투 아웃

     

흔히 인생을 야구에 유하는 사람들은 "야구는 9회 말 2 아웃부터"라고 말합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역전의 기회는 온다는 의미입니다.

     

어제(1일)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야구도 9회 말 역전승을 거뒀습니다. 한국 야구대표팀이 도미니카공화국을 상대로 9회 말, 1대 3으로 뒤진 상황에서 대거 3 득점에 성공하며 4대 3, 역전의 드라마를 쓴 겁니다.      


사람들이 야구를 인생에 축소판에 비유하는데, 특히 가을야구에선 그 의미가 쉽게 와닿더라고요. 준 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한국시리즈로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팀이 마지막에 웃을 수 있더라고요. 어제 야구 대표팀 경기도 손에 땀을 쥐면서 봤습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마치 주문을 외우듯, 9회 말 타석에 들어서는 선수들 한 명 한 명을 화면으로 바라보며 응원했습니다. 그런데 역시 최주환 선수가 안타를 기록하고, 대주자 김혜성이 도루에 성공하면서 무사 2루가 됐고, 박해민이 좌중간 적시타를 날리며 2대 3으로 따라붙더니, 이정후가 2루타로 3대 3 동점을 만들고, 김현수의 끝내기 안타로 4대 3 역전승을 펼치더라고요.

          

# 등번호 74

      

2007년 한 시즌 야구 담당 기자를 했었습니다. 야구 룰도 몰랐고, 포수와 심판이 같은 팀인 줄 알았던 기자였지만(브런치 : 현정화, 유남규 그리고 김택수 편 참고) 발품 팔아 선수나 감독 인터뷰를 많이 했습니다. 정말 몇 달 출입했던 게 전부인데,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김경문 감독과 지금까지도 계속 연락을 하고 있으니, 저는 기자가 천직인 사람 같습니다.

     

제가 야구 말진(막내) 기자였을 때, 제 바로 위 선배는 야구 선수 출신에 야구 전문기자이자, 필력이 상당히 좋은 분이었습니다. 이 선배 글을 읽으면 제목부터 기자 바이라인까지  정말 감탄사가 절로 나왔거든요. 선배는 야구를 보면서 감독이 마운드에서 투수를 교체하는 이유, 투수가 직구와 체인지업을 던질 때 뭐가 잘못됐는지 다 보였지만, 제 눈엔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평일 오후 3시.

더그아웃에 가면 프로야구 선수들이 당일 경기를 앞두고 훈련을 하고 있고, 감독은 선수들의 컨디션을 지켜봅니다. 더그아웃에서는 기자가 감독에게 뭐든 물어볼 수 있고, 이때 모든 기자들은 감독 벤치 뒤에서 수첩을 꺼내 고 받아 적는 게 일상입니다.     


저는 야구 한 시즌을 하면서 더그아웃에서 프로야구 감독들에게 질문을 던지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전날 몇 회 때 투수를 교체한 게 어떤 의미인지, 잘 한 판단인지 구분하기 힘들었거든요.     


유심히 관찰하다 보니 어느 날은 기자들이 더그아웃에서 질문을 할 때 감독을 가르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가 야구를 잘 모르니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한 달 두 달 지나면서, 더그아웃 취재가 익숙해질 무렵, 가만 보니 기자들의 질문에 감독들이 대게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후 4시 이후, 더그아웃에서 기자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감독이 혼자 벤치에 남아있는 시간대를 공략했습니다.      


"감독님, 제가 야구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어제 마무리 투수를 *회때 빨리 올리신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분명, 3시쯤 기자들이 여럿 있을 때도 나왔던 질문입니다. 감독은 입을 열었습니다.      


"그건, 경기 전에 아무개가 던지는 걸 보니까 어깨 상태가 어떠해서...."

     

훗날, 프로야구 감독님들께 듣게 된 얘기인데, 기자는 야구를 처음 맡아도, 처음 출입해도 대부분 전문가인 '척'을 하는데, 나는 '척'을 하지 않고, 솔직하게 모르는 것을 물어봐서 알려주고 싶었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프로야구 감독들은 SK 김성근, 두산 김경문, LG 김재박, 삼성 선동열...     


정말 대한민국 프로야구의 살아있는 전설들을 직접 만나고, 궁금한 건 물어보고 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행운이었습니다. 만약 기자가 안됐더라면, 야구는 내 인생에 없었을 테니까요. 야구를 왜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하는지, 9회 말 짜릿한 역전승의 희열이 뭔지 알지 못했을 겁니다.


등번호 74번.


김경문 국가대표팀 감독의 등번호는 74번입니다.

2007년 야구를 담당할 때 하루는 김경문 감독께 물었습니다.

     

"감독님, 선수들은 등번호에 저마다 사연이 있다고 하는데요, 감독님 등번호의 의미는 뭔가요?"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74번. 행운의 7과, 죽을 4가 붙어있어요. 인생을 살다 보니 좋은 일과 나쁜 일은 항상 같이 오더라고요. 좋은 일이 있을 땐 자세를 낮추고 나쁜 일을 조심하고, 힘든 일이 있을 땐 이 고비만 넘기면 좋은 일이 온다고 믿는 거지요."

     

김경문 감독이 살아온 인생, 이혼의 아픔, 여러 고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등번호의 의미를 기사로 쓸 수는 없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 제 바로 위 선배가 가을 야구를 앞두고 야구 선수들의 등번호에 대해 박스 성 기사를 쓰려고 하는데, 김경문 감독의 등번호의 의미를 설명해줬더니 선배는 내가 '여기자'여서 감독이 친절하게 설명해준 거라고 했습니다. ㅠㅠ

   

얼마 후 선배는 나에게 동의를 구하고 등번호 기사에 김경문 감독의 74번, 행운의 7과 죽을 4의 의미를 썼는데요.(자세히 사연을 쓰진 않았지만) 제 기억이 맞다면, 김경문 감독의 등번호 의미 기사는 2007년 이후에 처음 나왔을 겁니다.



# 2008년 올림픽 금메달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은 저에게 참 특별했습니다. 세계를 들어 올린 장미란 선수와의 인연도 그러했고,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김경문 감독과의 인연도 안방에서 손에 땀을 쥐고 경기를 보게 했지요.

      

올림픽이 끝나고 하루는 잠실 석촌호수 인근에서 김경문 감독을 만났습니다. 올림픽 직전, 꿈을 꿨다고 하더군요. 해몽을 잘하는 분께 여쭤보니 우승할 수 있는 꿈이었다고 했는데, 그때 김경문 감독은 야구 대표팀을 이끌고 있으면서, 프로야구 2위인 두산 감독이었기 때문에 올림픽 이후엔 가을 야구를 준비해야 했던 상황이었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가을 야구를 마치고 김경문 감독을 다시 만났습니다.

   

"우승할 수 있는 꿈을 꾸고 대표팀이 금메달을 땄는데, 운이 거기서 다했나 봐요. 프로야구 우승은 인연이 안되네..."


두산은 1위 SK 벽을 넘지 못하고 2위로 시즌을 마감했습니다.

프로야구 감독을 맡으며 시즌 우승은 거두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김경문 감독 마음에 남아있었습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 대표팀 감독과 선수 사인 배트.




#  행운목     


2년 전, 김경문 감독님이 2020 도쿄올림픽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는 소식을 듣고

잠실의 한 식당에서 감독님을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인사하는 자리라 근처 꽃집에 들렀습니다.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있는 분께 선물하기 좋은 화분을 추천해주세요~"


"행운목 어떠세요?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되고요. 행운목을 키우면 복이 들어온대요.

행운이 찾아와서 돈을 많이 벌게 될 수도 있고, 승진을 할 수도 있고요.

행운목은 행운을 가져오니까, 경기에서도 우승을 빌어줄 겁니다."


꽃 가게 아주머니 설명에 지갑이 저절로 열리더라고요.          


김경문 감독께서도 행운목을 마음에 들어했습니다. 일단 손이 많이 가는 식물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러했고, 또 행운을 빌어주는 식물이라고 해서 더 좋아했습니다.


어젯밤, 저는 9회 말 역전승 드라마를 보면서 행운목을 떠올렸습니다.

행운목, 끝까지! 끝까지, 대표팀 행운을 빌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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