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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squeen Sep 05. 2022

반갑지 않은 손님, 추석

'투머치(too much) 관심' 사양!

*이 글은 야근 날(5일), 근무 외 시간에 작성한 글입니다.



<추석 : 가을 저녁 >


음력 팔월 보름, 추석.


가을의 한가운데를 의미하며

가을의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이란 뜻에서 유래된 날이다.


추석의 또 다른 이름 한가위.


한가위의 한은 '크다'라는 뜻이고

가을 '한가운데' 있는 '큰 날'이란 의미에서 한가위라 부른다.




추석, 하면 연관검색어로 '선물', '기차표', '음식'이 나옵니다.


기차를 타고 고향집으로 향하는 사람들..

부모님이나 조카에게 줄 선물을 양손에 들고 바쁘게 이동하는 사람들..

집에 모여 앉아 송편을 빚고 전을 부치는 사람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들이죠.


추석을 앞두고 미리 은행에서 빳빳한 신권으로 바꿔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에도 '행복'은 묻어납니다.

추석만큼은 통장 잔고 고민은 잊고, 평소 마음을 전하지 못했던 가족과 주변에 고마움을 전하는 날이니까요.


추석 인사말은 또 얼마나 따뜻한가요.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한가위만 같아라."


이렇게 따뜻한 나눔과 덕담이 오고 가는 추석이지만, 저에겐 추석이 전혀 반갑지 않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언론사 시험을 흔히 '언론 고시'(언시)라고 합니다.

매년 각 언론사마다 채용하는 인원은 5명 안팎인데, 지원자는 수백, 수천 명에 달하다 보니

기자들은 입사 연도와 월을 기준으로 매체와 상관없이 '동기'와 '선후배'를 나눕니다.

일종의 기수문화에서 비롯된 건데요. 나이 어린 선배에게도 깍듯하게 존대를 해야 하고, 나이 많은 후배에게도 거침없이 말을 낮추는 게 기수 문화의 특징인 것 같습니다.


저는 언론고시를 통과하기 위해 꼬박 2년을 청년 백수로 지내며 공부했는데요.

언시생이 공부를 하루 이상 손 놓는다는 것 사실 엄청난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다 보니

늘 명절을 앞두고 고향에 '갈까', '말까' 망설였던 기억이 납니다.


집안 어른들은 그래도 명절인데 내려와서 얼굴은 보고 가야 한다, 자취하는 데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할 테니 음식이라도 와서 챙겨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마다 '명절에도 중심을 잡고 공부하겠다' 던 나의 굳은 결심은 매번 무너졌죠.


공부를 하루 쉬면 더 쉬고 싶은, 사람의 간사한 마음을 알면서도 그땐 늘 서울에 남아서 혼자 공부하는 것보단 집에 내려가는 방향을 택했던 것 같습니다.


시골에 내려가면 할머니를 중심으로 가족들이 모여 음식을 만들고 나눠먹으면서 이야기 꽃이 피었지요.


시작은 늘 좋았습니다.


어린 시절 이야기, 집안의 에피소드 등 웃음꽃이 필만한 이야기들이 계속 이어졌으니까요.


하지만 이야깃거리, 소재가 줄어드는 타이밍이되면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레 '청년 백수'인 '언시생'으로

바뀌었습니다.


"너는 요즘 어떻게 지내니?"


"공부는 어디에서 해?"


"시험 준비는 할만하니?"


"같이 공부하는 친구 중에 너보다 먼저 합격한 친구 있어?"


"언론사 시험 합격이 어려워서 '언론 고시'라던데, 차라리 기업에 취직하는 게 낫지 않아?"


평소 공부할 때 '힘내라'는 전화 한 통 없었던 친척들조차

이날은 마치 늘 내 생각만 하며 걱정하는 사람들처럼 반응을 보였습니다.


추석 연휴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자취방에 들어서면, 어깨가 축 늘여졌습니다.


'아니, 세상에 쉬운 게 어디 있어.

꿈이 크면 그만큼 더 노력하고 도전하는 거지, 너무 쉽게들 말하는 거 아니야?'


기분 좋게 집으로 향했던 발걸음은 다시 무거운 발걸음이 되어 돌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1년 후.

 

어김없이 돌아온 추석.


이번엔 질문의 강도가 더 세졌습니다.


"아니, 아직도 언론사 시험 준비하고 있니?"


"용돈이 넉넉하지도 않을 텐데 책은 다 사서 보니?"


"해외 유학까지 갔다 왔는데, 뭘 또 공부해. 내년에도 못 붙음 언제까지 시험 볼 거야?"


"언론 고시가 준비한다고 다 붙는 게 아니라면서. 대안은 있고?"




그렇게 또 1년이 흘러 맞이한 추석.


다행히 추석 연휴 직전에 언론사 공채 시험에 합격했고,

이번엔 당당하게 어깨 펴고 친척들을 만나야지 생각했습니다.


"저, 수습기자로 합격했어요."


"이번에 *명 뽑는데 *명이 지원한 거 있죠?"


저는 들뜬 아이처럼 마냥 신나서 누가 묻기도 전에 내 이야기부터 했습니다.


"정말 잘됐다. 2년간 고생하더니."


"그래도 대단하네. 시험 어렵다는데 붙고."


시험 합격 전까지 명절 때마다 쏟아진 집안 식구들의 질문은 거의 '압박 면접'같이 느껴졌는데

막상 합격하고 나니, "잘됐다" "축하해" "대단하네"로  

-끝-


'어? 이건, 뭐지??'


오히려 부모님은 내가 공부할 때 신경 쓰일까 봐 질문도 자제하시고

명절 때 왔다 갔다 하면 공부 시간 뺏긴다고 내려오지 말하셨는데

막상 '투머치(too much) 관심'을 보였던 친척들은, 그저 생각나는 대로 '툭' 한마디를 던졌던 거였나?


그때 깨달았습니다.

추석 때 밥상 '스페셜 안주거리'로 올랐던, 언시생을 향한 질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365일 곱하기 2는 730일.

꼬박 2년 동안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공부하며 보낸 내 청춘, 내 땀방울의 숨은 의미를 알고, 이해하고 표현했던 질문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런데 그 '툭' 던진 한 마디에 나는 몇 날 며칠을 고민하며 '붙기도 힘든 시험, 계속 준비하는 게 맞나 ', '내년 추석엔 합격해서 월급 받아 부모님께 용돈 드릴 수 있으려나?' 괴로워하고 자책하며 다시 탈을 부여잡고, 긴 시간을 견뎠다는 것을요.


그 시절엔 정말 추석이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습니다.


해외에선 신년 1월 1일만 기념하고 마는데 우리나라는 구정 연휴에도 대가족이 모이고,

해외에는 추수감사절 때 민족 대이동을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만 과한 거 같고...


명절이면 서울에 남아 학교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려고 해도 식당 문을 연 곳이 별로 없어

할 수 없이 집으로 내려갔던 기억도 나고...


씁쓸했던, 추억.

꿈 많던 그 시절의 차가운 기억.




2년 전, 브런치에  <"호랑이를 그리면 고양이라도 나와" 마흔, 또 다른 도전 >이란 제목으로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시작하게 된 이야기를 썼습니다.

“호랑이를 그리면 고양이라도 나와” (brunch.co.kr)



그 후 만 2년이 지났고, 감사하게도 3년째 학교에서 '언시생'들과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15명 안팎의 기자 지망생들을 지도했는데요.

매년 10명 이상, 많을 땐 12명 이상 언론사 시험에 합격하면서

우리 반 학생들이 방송뿐 아니라 신문 (조선, 중앙, 동아, 한겨레, 한국 등), 연합뉴스, 뉴스 1 등 다양한 매체에서 현재 '기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제자 중엔 정치부에서 국회 출입을 같이 하고 있는, 이제는 제자가 아닌 '후배 기자'도 있습니다.


올해도 12월까지 주말 강의를 계속하게 됐는데요.


언론사 채용 시즌이다 보니 학생들이 시험을 마치고 와서 지친 모습,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언시생' 시절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반갑지 않은 손님, 추석'을 견뎌내야 하는 우리 반 학생들에게 이번 추석 때 탈 꽉 부여잡고, 집에 잘 다녀오라고 '덕담 한마디' 건네고 싶어서 오랜만에 글을 썼습니다.




오늘은 야근이라 저녁 출근인데, 태풍 '힌남노' 특보를 챙겨야 할 것 같습니다.

밤새 기사를 쓰고, 일을 해야 하지만, 피곤함은 잠시 잊고, 태풍 피해가 크지 않길 기도하며 일하겠습니다.


다가오는 추석, '풍성한 한가위' 인사도 좋지만

무심코 던진 내 말 한마디에 누군가는 상처받고, 누군가는 희망이 꺾일 수도 있으니

진정 상대방을 위하는 배려가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무거운 얘기는 가볍게 전하고

굳이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다면 '투머치(too much) 관심'은 좀 주의해주시길 바랄게요.


모두 Happy 추석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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