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방안 가득 코끼리가 들어찬다.
얼빠인 나는 누군가에게 빠져드는 시간이 짧은 편이다. 일주인 전쯤 틴더에서 매칭되어 만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첫 번째 만남은 화기애애했고, 눈빛에는 별들이 가득했다. 피부가 닿을 때마다 마음이 간질간질거렸다. 나쁘지 않았다.
사실 그는 내가 그동안 만나왔던 이상형들에 부합하지는 않았다. 나는 기본적으로 옆으로 긴 눈과 뾰족한 인상을 좋아한다. 그는 쌍꺼풀진 큰 눈을 가지고 있었고, 얼굴도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에게 빠져들었다. 아마도 그가 가진 큰 키와 큰 손, 다정한 소처럼 나긋한 말투와 친절한 태도에 반했던 것 같다. 그는 나의 외모를 끝없이 칭찬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얼굴이라고, 사진을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다고. 나는 그의 사진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올린 사진은 대부분 얼굴을 가리고 있는 사진이었기에.
나는 작년 말부터 러닝을 하고 있다. 30대 후반이 되면 신체의 노화가 피부로 느껴진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어딘가 크게 망가질 것 같다는 위기감이 나를 트랙으로, 탄천 산책로로 내몰았다. 처음엔 피트니스 클럽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싫어서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좁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나와의 싸움은 나에게 너무 큰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거기다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운동 기구를 두고 벌어지는 눈치 싸움도 싫었다. 피트니스 클럽은 나에게 전쟁터였고, 전쟁터는 회사 사무실 하나로 족했다. 나는 전쟁터를 벗어나 드넓은 광야로 향했다. 모두와 공유하지만 누구도 독점하지 않는 길을 자유롭게 달렸다. 길 위에선 나와의 싸움도 견질 수 있었다. 도처에 널린 나무들과 시시각각 바뀌는 풍경들이 이곳은 전쟁터가 아니라고 나를 설득했다. 그곳엔 근육이 찢어지는 비명 소리도, 널브러진 시체들도 없었다.
그와 만나기로 한 두 번째 날 아침, 나는 다시 집 뒤에 있는 트랙으로 향해 러닝을 시작했다. 트랙 주변에는 나무들이 있었다. 마침 꽃가루가 흐드러지게 날리고 있었다. 한 두 개가 아니라 정말 눈 오듯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날은 제대로 달릴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꽃가루 때문이었던 것 같다. 러닝을 하면서 숨을 가쁘게 쉬는 동안 나도 모르게 꽃가루를 흡입하고 있었겠지. 집에 돌아온 후부터 콧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에 수도꼭지가 터진 것 마냥 콧물이 줄줄 흘렀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콧속이 시리게 아팠다. 공기가 코 점막에 박힌 뾰족한 이물질을 건드리는 것 같았다. 줄줄 흐르는 콧물 때문에 휴지를 코 밑에 대고 숨을 쉬어야 했다. 몰골이 점점 초췌해졌지만 데이트를 취소할 수는 없었다. 조급했던 것 같다. 오늘 만나지 않으면 우리를 연결한 가느다란 실이 툭하고 끊어져 버릴 것 같았다.
그 이후 며칠 동안 코감기를 앓았다. 살아있다는 건 고통을 견디는 거야. 숨을 쉴 때마다 이물질이 나에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 역시 고통을 만든다. 그가 나와 같은 마음이길, 버림받지 않기를 바라는 불안이 나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나는 계속해서 상대의 기분을 살피고, 그의 말속에 담긴 의중을 파헤친다. 더 이상 날 보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 내가 벌써 질려버리면 어쩌지? 나의 어떤 모습이 그를 실망시키면 어쩌지? 코 안에 박힌 이물질이 느껴질 때마다 나는 불안해졌다. 아 나는 그를 좋아하고 있다. 더 오래 같이 있고 싶다. 함께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싶다. 그와 연애하고 싶다. 이물질의 존재는 나에게 이런 생각들을 불러일으켰고, 나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마음은 점점 더 급해졌고, 나는 내가 바라는 속도로 관계를 끌고 가려했다. 상대가 내 속도에 맞추지 못하면 나에 대한 마음이 식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만난 지 일주일 되었는데 말이다! 오만하고 강박적인 생각이지만 그땐 그렇게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그가 언젠간 나에게 실망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전에 빨리 관계를 무르익게 만들고 싶었다. 내일은 언제 볼까? 내일 모래는 언제 볼까?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상대가 숨이 막히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어느 정도까진 나의 속도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약속을 잡고, 조금 늦더라도 약속한 장소에 도착하고, 즐거운 이야길 나누고, 저녁을 먹을 때쯤 헤어지고, 다시 다음 날의 약속을 잡는 날이 이어졌다. 우리의 만남은 그가 잊고 있던 다른 약속에 의해 중단되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의 속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기에 계속해서 약속에 집착했다. 그는 나의 보고 싶다는 메시지에도, 언제 보냐는 메시지에도 답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미친 듯이 달려가던 관계의 속도가 잠시 정체되었다.
나는 온갖 망상에 사로잡혔다. 그가 나에게 실망했을까? 마침내. 이 관계도 끝이 오고 만 건가? 눈치 없이. 나와 만나기 싫어서 약속이 있다는 거짓말을 한 건 아닐까? 이제 연락을 끊어야 하는 걸까? 이 태도는 연락을 그만하자는 시그널이 아닐까? 당장이라도 이런 식으로 할 거면 그만두자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분노와 초조함으로 밤을 지새웠다. 한 가지 희망적인 사실은, 그가 자신의 일상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 경험 상 연락을 끊으려는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성의로 인사 정도 하는 게 다였는데, 그는 아니었다. 당장 만나고 싶지는 않은데, 관계를 이어가고는 싶은 건가? 혼란스러웠다. 여기서 내가 발을 빼면, 네가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아서 여기까지 해야겠다고 말하고 만다면, 그가 황당해하지는 않을까? 어쩌면 그는 더 먼 미래를 보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우리가 함께할 날이 아직 더 있다면 당장 서로를 한계로 밀어붙여서 좋을 게 없을 테니까 말이다.
얼마 전에 회사 건강증진센터에서 진행했던 커뮤니케이션 강의에 참여한 적이 있다. 강사 분께서는 우리는 언제나 상대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고, 상대에게 원하는 걸 말할 때는 내가 무슨 평가를 하고 있는지 잘 살펴봐야 한다고 알려주셨다. 강사 분의 말처럼 나는 그를 평가하고 있었다. 그가 나를 밀어내고 있다고, 내가 떠나길 바란다고, 알아서 사라져 주길 바란다고. 실제로 확인한 적 없는 생각들이었다. 그는 분명히 나에게 호감을 말했고, 나와 보내는 시간이 즐겁다고 말했다. 그것이 사실이었다. 그가 무슨 마음으로 이렇게 행동하는지, 나는 내가 상처받지 않을 만한 방식으로 넘겨짚고 있었다. 그가 먼저 거절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는 것. 나도 나의 단점을 안다고, 네가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걸 알고 있다고. 사실이 아닌데도.
그가 계속 연락을 (뜸하지만) 지속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단 하나의 사실이었다. 우리를 이어주는 가느다란 실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달리던 속도로 관계가 이어졌다면 우리의 거리가 더 멀어졌을지도 모른다. 그의 속도는 그런 것 같았다. 빠르게 달리기보다, 천천히 살펴보고 조심히 다가가는 것. 가느다란 실이 끊어지지 않도록 소중히 다루는 것. 함께 걸어가기 위해선 걸음이 느린 사람에게 보폭을 맞춰야 한다. 단지 속도가 느릴 뿐이라고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불안한 마음이 샘솟아도 괜찮았다. 이건 단지 속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니까. 느리더라도 어딘가로 가고 있다면 견딜 수 있었다. 그러자 콧속에 박혀있던 이물질이 떨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