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룬 것 없으나 충실했던 삶
『스토너』
존 윌리엄스, 김승욱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20
삶이라는 서술형 문제를 푸는 다른 방식
『스토너』는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의 간단한 약력을 소개하며 시작된다. 스토너는 오랜 세월 조교수 이상 승진하지 못했고, 학생들에게 큰 인상을 남기지도 못했고, 동료들로부터도 높게 평가받지 못했다. 40년 가까이 교수로서 재직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그저 이름으로만 남은 존재다. 곧 잊힐 존재다. 운 좋게 대학이라는 안전한 공동체에 자리를 잡았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람, 그 대학에서도 그저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 대학 바깥에서는 실패한 결혼만을 경험했던 사람. 이 소설은 교수라는 직함을 가졌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특기할 것이 없는 사람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 모두 원하지 않게 태어났지만 살아가다 보면 무언가를 기대하기 마련이다. 스토너 역시 그랬다. 명망 있는 학자가 되기를 기대했고 훌륭한 교육자가 되기를 기대했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를 기대했다. 삶의 마지막까지 그 어떤 기대도 성취되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 그는 묻는다. "난 무엇을 기대했나?" 삶에서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삶이란 대개 평범한 사람들의 기대에는 응답하지 않는 법인데. 삶에서 자신의 기대를 성취한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성공했다고 말한다. 우리 대다수는 성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스토너의 삶에는 어떠한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그토록 무수한 상실과 배반과 좌절과 외면에도 불구하고 스토너는 흔들리지 않는다. 묵묵하게 살아가고 자신을 배반한 삶을 조용히 관조한다. 어떤 순간에도 초연한 태도로 일관하며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세상이 들이대는 잣대에 흔들리지 않는다. 이름에 연연하지 않고 성과에 매달리지 않으며 본래 모습을 거스르지 않는다.
기대할 것이 없는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삶은 불확실성으로 가득하기에, 기대에 의지하는 삶은 항상 좌절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기대한다는 것은 곧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변화에 자신의 삶을 맡긴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때로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나 무엇에 넘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스토너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남기를 선택한다.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모습을 수용하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가치를 묵묵히 따른다. 스토너는 어떤 순간에서도 스토너였고 스토너로 죽는다.
인생이라는 문제는 풀이 과정과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서술형이기에 어느 한 방식의 삶이 정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기대는 곧 변화하려는 동력이기에 삶을 역동적으로 만든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정체되지 않는다. 머무르지 않는다. 끝없이 변화하고 적응한다. 좌절이 잇따라 이어지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제 꿈을 향해 나아가며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스토너는 다른 방식으로 답안을 쓴다. 그리함으로써 다른 형태의 숭고함과 아름다움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하기 위해 앞을 보는 대신에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잊지 않기 위해 뒤를 보는 삶도 있다. 그러한 삶은 과거에 얽매이고 퇴행하는 것과는 다르다. 과거가 축적되어 만들어진 기반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기반 위에 단단히 서서 삶의 풍파를 이겨내며 불확실성 속에서 자신을 지켜내고 걸어왔던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는 삶이다. 담담하고 안온한, 또는 답답하고 정체되고 무기력한 삶처럼 보일지언정, 흔들리거나 포기하지는 않는다. 누가 그 답을 틀렸다고 할 수 있으랴. 삶에는 정답이란 없는 것을.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스토너는 교수이자 연구자였다. 몇몇 뛰어난 석학들과는 달리 스토너는 연구자로서 망각 속에 묻힌, 아무 쓸모도 없는 책을 썼을 뿐, 거의 아무런 업적도 남기지 못하고 죽는다. 교육자로서도 누구 하나 그를 인상 깊게 기억하는 학생도 자신의 학통을 계승할 제자도 두지 못했다. 스토너의 삶은 나를 포함해 석학은 되지 못하고 스토너처럼 정년을 보장받는 교수직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많은 연구자를 기다리는 현재이자 미래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왜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일까. 이름 있는 석학이, 학계를 뒤흔들 성과를 발표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일까. 아니다. 우리는 공부하는 삶에서 열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 열정 덕분에 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봐! 나는 살아 있어"라고(350쪽). 세상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을 삶의 동력으로 삼는다면 삶은 지속 가능하지 못할 것이다. 모두가 그런 기대에 부응하고 세상이 요구하는 성공의 잣대를 만족할 수는 없을 것이므로. 그러나 삶의 동력을 알고자 하고 더 나아가고자 하는 내면의 열정에서 찾을 때, 우리는 계속 살아 있다고 외칠 수 있다. 그런 삶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 유일한 삶"(309쪽)이다.
연구자의 동력은 더 알고자 함이다. 소설가 최은영이 말한 대로 우리는, "나는, 그저 더 가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2023, 44쪽). 어느 강의실에서 느낀 시(詩)에 대한 알 수 없는 열정이 스토너가 평생을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듯이, 연구자들도 어느 순간 알고 이해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열정이 자신을 사로잡는 것을 경험한다. 아직 알지 못하는 세계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는 것을 알 때 연구자는 막막하고 두렵다. 동시에 그 세계를 탐험하고 갈 수 있는 곳까지 깊숙이 들어가고자 하는 열망을 느낀다. 그가 삶을 이어가는 데는 다른 이유는 필요하지 않다. 오직 그 열망에 힘입어 그는 알 수 없는 세계로 발을 내딛는다. 스토너와 마찬가지로 그 열망이 기대가 수없이 좌절되는 삶을 견디고 살아내게 하는 버팀목이 된다.
한 사람이 젊은 시절에 느꼈던 열정을 생에 마지막 순간까지 간직하고 산다는 것. "부정할 수 없는 그의 작은 일부"(388쪽)를 쏟아붓고 세상 어딘가에 남겼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혹여나 더 큰 기대를 가지는 것이 허락된다면, 그 작은 일부가 내 뒤에 이 길을 걸을 누군가에게 아주 희미하게나마 앞을 밝혀줄 빛이 되어주리라고 믿는 것. 그것이 아마 이름 없고 앞으로도 이름 없을 연구자가 기대할 수 있는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꿈일 것이다. 삶의 초반부에 가졌던 열정을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꺼뜨리지 않고 품을 수 있다면 그 삶이 헛된 것이라고 어찌 쉽게 말할 수 있으랴. 누구도 내 삶을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나의 내면을 밝혔던 빛은 여전히 이토록 선명할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