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편을 내꺼 만들어 살기
우리집 가까이에 4년제 대학교 하나가 있다. 캠퍼스를 나오면 좁은 도로 하나를 두고 길 건너에는 남자기숙사가 있는데 주말이 되면 기숙사 특유의 풍경이 펼쳐진다.
금요일 저녁이 되면 집에 다녀오기 위해 기숙사를 나서는 학생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일요일 저녁이 되면 집으로 향했던 걸음들이 이틑날 출발지였던 기숙사로 방향을 바꾸어 돌아온다.
몇 일 전, 일요일 저녁이었다. 밖에 나갔던 일을 마치고 그날도 평상시와 다름 없이 기숙사 담벼락을 걷고 있었다. 먼 발치에서 한 학생이 기숙사 입구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와 마주한 한 성인남자가 보였다.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그들은 바퀴가 달린 작은 여행가방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서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무언가 말을 하고 있는 듯 보였고, 아버지는 말을 마친 아들의 어깨를 말없이 두어번 두드려주고는 기숙사로 들여보냈다.
'톡톡'
부자가 주고 받은 말은 단 몇 마디도 채 되지 않았다. 내가 대여섯 걸음을 걷는동안 모두 끝이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들과 이별하던 아버지의 손길에서 수백, 수천마디를 대신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 귀에는 분명 이렇게 들렸다.
"사랑한다, 내 아들."
"함께해서 즐거웠다."
"힘내라."
"또 보자."
아버지의 토닥임동안 천천히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아들은 가방을 끌고 기숙사 건물 입구로 향했다. 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던 아버지는 뒤돌아서 길 건너에 정차해놓은 자가용 으로 향했다.
비상등을 켠채 서 있던 차의 조수석 문 앞에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엄마였다. 그녀 역시 아들이 눈 앞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고며 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남편이 차로 돌아오고 운전석에 앉아서 핸들을 다시 잡을 때까지 계속 그렇게 서 있었다. 아들이 걸어간 방향을 향해...차가운 봄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머리를 쓸어올리던 그녀의 몸짓과 눈짓도 수천마디의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아들, 못 보는 동안에도 잘 지내렴..."
"사랑해, 우리 아들..."
"또 보자."
그들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마음이 내게는 선명하게 보이고 진하게 느껴졌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아들을 키우고 있을 부모의 마음이 내게는 강하게 전달이 되었다. 어깨를 토닥이던 아버지의 손길, 아들이 눈 앞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온몸으로 배웅하던 엄마의 몸짓...그들은 그렇게 기도로, 사랑으로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느린 걸음으로 걸으면서 기숙사 담벼락을 지나쳤다. 그들의 모습은 단 몇 분만에 내 눈 앞에서 증발되었지만, 따뜻했던 부모와 아들의 모습은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향처럼 내 마음 한 켠에 스며들었다. 아버지의 마음이 백마디의 '사랑해'보다 달콤하고 진하게 느껴졌다. 돌아서서 걸어가는 아들의 뒷모습까지도 배웅하던 엄마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자 봄날 저녁 옷깃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가 얄밉지만은 않았다.
나도 아들을 키우는 엄마다.
몇 년전까지만 해도 아들을 둘 키우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결혼을 기점으로 덜컥 갖게 된 큰 아들,
그 아들 때문에 굉장히 속상한 적이 많았다.
한 아들은 연애때부터 내 가방을 들어주던,
다른 부모님 밑에서 나고 자라 나의 큰아들이 된,
'남의 편'이라는 별칭을 붙어있는
아들이고,
또다른 한 아들은 내 뱃속에서 자라서 내가 그의 가방을 들어주고,
내가 부모가 되게 해주었던,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
아들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분명 내 가방을 들어주었던 연애시절의 나의 남친도,
지금까지도 집 안에 무거운 거 옮길 일 있을 때마다 항상 힘을 써주는 나의 남편도,
실은,
그를 낳고 키운 부모님의 기도와 사랑으로 자란 아들이었다.
물론,
그가 방금전에 내가 만났던 따뜻한 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들은 아니라할지라도,
수백마디의 '사랑한다'는 표현은 들어보지 못하고 자랐을 지라도,
그가 어릴 적에도
무거운 것을 들 때는 대신 들어주는 아버지와
돌아서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눈길로 배웅했을 어머니가 있었다.
그 역시 부모의 기도와 사랑을 먹고 자랐을 것이다. 물론 내가 기숙사 앞에서 본 부모의 모습과는 버젼이 좀 달랐겠지만..
그런 사랑을 먹고 자란 그를 나는 수년간 구박했다...
덜 자랐다고...
남편에서 아버지로 빠른 트랜스포메이션을 못한다고 구박하며 얼른 더 자라라고 재촉했다.
키워야 하는 '큰아들'이라고 이름표를 붙여가면서...
순간,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그도 이미 내아들의 가방을 들어주고,
그도 이미 내아들의 어깨를 토닥일 줄 아는 아버지인 것을...
몇 일전 전철에서도
'아들' 때문에 가슴이 뭉클한 적이 있었다.
전철을 타고 가는 데 옆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커플이 앉았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군복을 입고 있었고 비슷한 나이의 여자와 데이트를 하는듯 보였다. 휴가나온 군인남친과 민간인 여친의 대화를 듣는 동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내남자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남자가 말했다.
"나 있지...배고파."
"여기 이거 먹어."
"야. 군인한테 이걸 내미냐?"
"먹기 싫음 말아라. 뭐!"
여자 아이가 내민 것은 다름아닌 초코파이였다. 휴가 나온 군인에게 초코파이를 내밀었으니 그 남자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휴가만 손꼽아 기다린다는 군인인데, 한창 먹성 좋은 청년이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그런데 여친의 손에서 초코파이를 보았으니 얼마나 실망했을까...만약 남자의 배곯음을 그의 엄마가 알게 되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곁에서 듣고 있던 나는, 여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는 동시에 군복입은 남의 아들에게 밥 한끼 든든하게 사서 먹이고 픈 충동이 일었다.
마치, 내 아들이 배를 곯고 있는 것 같아서... 나도 아들을 키우는 엄마라서 그런지 오지랖이 솟구쳐올랐다.
그러다가 불현듯 나랑 함께 사는 '큰아들'이 떠올랐다.
'나는 과연 우리집 큰아들을 잘 먹이고 있는가...?'
부부가 십년 정도를 살고나면 전우애가 생긴다더니, 나역시 그 전우애라는 것이 마음 한 견에 자리잡게 되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다. 그런 이유로 자꾸만 이런 장면에서 그 '아들'이 떠오르는걸까? 아니면, 십년 넘게 엄마로 살아오며 이제는 제법 엄마스런 마음이 내 안에 세팅이 된 것일까? 하지만 이 것 하나는 확실히 알 것 같다.
'남편이라 쓸 지언정, 내남자라 읽으며 평생을 함께 해야겠다!'
오늘도 길거리에서 수많은 아들들을 만나고 스친다. 누군가의 기도와 사랑으로 컸고, 또 커가고 있을 그들.
나와 함께 살고 있는 큰아들도, 내가 낳은 아들도 모두모두 건강하고 행복하면 참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저녁에 퇴근하는 나의 큰아들의 큰엉덩이 한 번 토닥여줘야겠다.
아...
이런 게 사랑인가보다...
아니면
이런 게 엄마마음인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