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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더티브 Mar 24. 2020

엄마 둘, 아이 셋... 우린 어쩌다 동료

[마더티브X포포포] 손님에서 소상공인 동료가 되기까지 

@포포포 매거진



동네 산책길에서 만난 예쁜 패브릭 소품 가게, '곤약달닝'


올해 다섯 살이 된 딸이 두 돌이 되기 전, 우리 모녀는 동네 구석구석을 참 즐겁게 구경하고 다녔다. 딸이 어린이집을 다니기 전이라 24시간을 함께 하던 시절이었다. 소위 핫하다는 ‘망리단길’에 살아서 카페나 레스토랑, 소품 숍이 많아 멀리 나가지 않아도 먹거리와 구경거리가 즐비했다. 


그러다 인적이 조금 드문 골목에 자리한 간판이 없는 정체 모를 예쁜 소품 가게를 발견했다. 두세 번을 방문했는데도 문이 닫혀 있길래 이윽고 창문에 붙어있는 메모지에 적혀있는 전화번호를 눌렀다. 아늑한 분위기에 은은한 플라워 패턴이 담긴 베개, 쿠션, 에코백 등의 패브릭 소품들이 조화롭게 놓여 있었다.


십여 분 정도 구경했을까.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에 직업은 속이지 못한다고 결혼 전부터 에디터로 일해왔던 터라 처음 만난 사장님께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가게 이름은 어떻게 지은 거예요?’, ‘사장님도 자녀가 있나요?’, ‘메인 아이템이 무언가요?’ 등등. 


아직도 기억에 남는 답변 중 하나는 가게 이름의 뜻. 자녀들의 이름에 어울리는 받침을 붙여 ‘곤약달닝’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완성한 것이다. 사장님의 센스에 반했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이후 종종 가게에 방문하며 베개와 쿠션을 꽤 여러 개 구입했다. 



쇼핑을 즐겨 하지만 마음에 온전히 들지 않으면 주머니를 절대 열지 않는 나에게 곤약달닝의 제품은 매력적이었다. 예쁜 건 기본이고, 얼굴에 직접 닿는 베개를 사용해보니 부드러운 감촉은 물론 일주일에 두세 번 세탁해도 쉽게 헤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했다. 실제로 그때 구입한 베개와 쿠션은 우리 가족의 침대와 소파를 아직도 지키고 있다.     



육아와 함께 다시 시작한 에디터 업무 그리고 시작된 진로 고민


딸이 등원하기 시작했다. 두 돌 하고 몇 개월이 지난 때였다. 비교적 어린이집을 늦게 보낸 편이라 아이는 잘 적응했지만 문제는 나였다. 에디터 일을 다시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크게 힘들지 않았다. 메일로 자료를 받아 집에서 원고를 정리하는 수준이었기 때문. 그러다 차츰 두 개의 매체에서 칼럼을 배당 받고, 촬영하러 스튜디오나 취재지로 나가고, 마감하러 잡지사에 갔다. 


마감하러 사무실에 갈 때면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남편과 친정엄마의 도움이 있어 아이에게 큰 문제없이 다행히 시간은 흘렀지만 이런 생활을 하다 보니 왜 워킹맘이 힘들고, 경단녀가 생기는지 그제야 진정으로 체감했다. 


새벽 두세 시쯤, 집에서 원고를 쓰다 보면 자다가 내가 옆에 없어 눈을 비비며 문을 열고 나온 딸아이를 품에 안고 노트북 자판을 두드린 적도 있었다. 마감하느라 아침 7시에 택시를 타고 귀가하던 중 우는 딸을 등에 업고 골목을 서성거리는 친정엄마와 마주한 적도 있었다. 


몸도 마음도 지칠 때쯤 함께 에디터로 일하다 창업한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 진짜 힘들다. 편집장 되고 싶은 것도 아닌데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이 맞을까?” 


물으니 


“에디터 일도 좋지만 네 일을 시작해봐. 너도 브랜드 만들고 싶어 했잖아. 차근차근 준비해봐”


라는 조언이 돌아왔다. 사실 나도 이전에 도전한 적이 있었던 일이었다. 특별한 날에 입는 딸과 엄마의 드레시한 커플룩이 컨셉이었다. 딸이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아이디어가 샘솟아 드레스 몇 벌을 스케치하고는 아무런 준비 없이 동대문에서 천을 떼서 샘플실을 알아보고 실제로 세 벌을 제작했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비슷한 또래의 딸아이를 키우는 동네 언니들이 보내던 신기한 눈길을 잊을 수 없다. 실패 요인은 두 가지. 무난한 것보다는 개성 있는 스타일을 좋아했던 나는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신기한 드레스를 선보였었다. 한동안 육아만 하다 보니 트렌드와 동떨어져 있었고 TPO 분석도 없이 느낌대로 디자인했던 이유였다. 


두 번째는 의상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패턴을 못 뜨고, 재봉은 더더욱 못했기에 남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던 제작 시스템이었다. 결국은 ‘언젠가는 이번 일도 경험이 되겠지’라는 생각만 막연히 하고 ‘온실 스튜디오’라는 맘 앤 도터스 커플 드레스 브랜드를 조용히 접었다.     



주얼리 디자이너로서의 두 번째 도전빈티지 무드+α=젤리 프로덕션


5개월여 동안 두 매체 일을 나름 치열하게 하다가 하나를 정리했다. 수입은 줄어들었지만 다른 진로를 모색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선배 말대로 차근차근 준비해서 내 브랜드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종목은 주얼리. 이전 경험을 통해 내가 직접 만들 수 있어야 적게라도 수입이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평소에도 주얼리를 즐겨했기에 접근하기도 수월했다. 


한두 개씩 만들어보니 디자인은 얼추 잡히는 것 같은데 재료가 문제였다. ‘너도 하다 보면 알 거야. 재료에서 제품의 희소성이 갈리더라. 나는 나중에 해외를 여행하게 되면 원단을 구매해올까 싶어’라는 선배의 말이 와 닿았다. 그러다 우연히 레진 작업을 하는 젊은 작가의 워크숍에 참가해 레진을 다루는 법을 익혔다. 작년 여름이었다. 


기온이 높으면 금방 굳는 성질의 레진과 한 차례 싸우니 가을이 왔다. 브랜드 기본 컨셉은 평소 좋아하는 빈티지 무드로 잡고 그 안에서 다양한 스타일을 선보이는 것이 나의 계획! 브랜드 이름은 젤리처럼 다채로운 색상과 모양을 지니고, 협업을 즐긴다는 다짐을 담은 ‘젤리 프로덕션(Zelly Froduction)’. 




이렇게 브랜드명도 정하고 몇 개의 아이템을 완성했는데 어느 날 동네에 사는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어느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사무실 오프닝 행사의 일환으로 마켓을 여는데 망원동 로컬 브랜드 섭외를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라 흔쾌히 수락하고 선배와 미팅을 했다. 


내가 즐겨 가던 망원동에 자리한 개성 있는 매장들을 소개했다. 그간 내가 작업한 아이템을 선배에게 보여주니 젤리 프로덕션도 셀러로 참여하면 좋겠다고 했다. 당연히 참가했고 나는 그 플리마켓에서 가져간 제품의 2/3 정도를 판매했다. 생각보다 많이 판매가 이루어져 기쁘기도 했지만 실제로 내가 만든 아이템을 고객의 입장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망원동 효재곤약달닝 정세나



내가 처음 참여했던 플리마켓이자 섭외를 도왔던 자리에 ‘곤약달닝’이 빠질 수 없었다. 선배와 함께 곤약달닝 매장에 가서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셀러로 참여하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그날이었던가. 문득 ‘나도 그런 작업실 겸 쇼룸이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그러던 중 ‘듀오 비즈니스’라는 동업을 다룬 내가 진행한 칼럼이 매체 SNS에 게재되었고, 이를 내 개인 계정에 리포스트 했는데 곤약달닝 사장님의 댓글이 달렸다. 무언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고, 이윽고 우리는 매장을 함께 사용하는 ‘동료’가 되었다. 호칭도 사장님에서 ‘언니’로 바뀌었다. 같은 공간에서 작업하며 이야기를 나누니 취향이 겹치는 지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성격도 비슷한 점이 있었고, 결정적인 것은 둘 다 엄마라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었다. 그래서 더 좋았다. 그리고 알았다. 곤약달닝 매장 문이 왜 자주 닫혀있었고, 내가 전화를 해야만 언니가 왔었는지를. 올해 초등학교 2학년생이 되는 아들과 여섯 살이 되는 딸을 키우는 남매 엄마가 사업을 병행하기란 참 어려운 거였다. 




이제 사업자등록을 준비하는 병아리 자영업자인 내가 봐도 언니의 하루는 엄청나게 바쁘다. 아침에 아들을 등교시키고, 이어 딸을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나면 매장에 출근해 작업한다. 그러면 곧 점심 시간. 함께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나면 아들이 하교할 시간이다. 다행히 학교가 매장 근처라 아들과 함께 매장에 돌아와 언니는 작업을 이어하고, 아들은 숙제를 하거나 그림을 그린다. 


그렇게 한두 시간을 보내면 딸이 하원 할 시간이다. 미싱 앞에 앉아 있을 만하면 아이들을 챙겨야 하는 엄마인 언니가 참 아쉽고 안쓰러웠다. 감각과 재능이 충분한 사람인데 작업 시간이 많이 부족해 보이고, 정신적으로 또 체력적으로 힘들어 보였다. 거기에 살림은 거의 효재 선생 수준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아이가 간식을 흘릴까 봐 큰 쟁반에 과자나 과일을 담아주는 나와 달리 언니는 유리 접시와 작은 볼에 오밀조밀하게 간식을 담아 두 아이를 챙기고 있었다. 


라면 하나를 끓여도 청경채와 콩나물을 넣고, 마지막에는 나무젓가락으로 예쁘게 세팅하는 주부 9단이었다. 직접 시안을 찾아 인테리어를 했다는 집은 프렌치 컨셉에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더한 공간이자 청소를 자주 하는 티가 팍팍 나는 집이기도 했다. 동료가 되고 언니의 하루를 지켜보니 나의 고됨은 참된 것이 아니었다.     



자매 같은 우리 사이는 소상공인 동료



같은 공간에서 작업하고 또 오는 손님을 응대하며 제품을 판매하는 우리는 긴 시간을 함께 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속 이야기를 털어놓을 정도로 친해졌다. 한 살 터울의 딸아이를 키우는 언니 덕에 옷도 물려받고, 서로 먹거리도 나누고 있다. 10년 전 직장생활을 하다 결혼을 하며 꽤 오랫동안 혼자 작업을 이어 온 언니는 종종 내게 동료가 생겨서 참 좋다고 말한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집에서 작업하다 보면 몸이 조금만 피곤해도 눕기 마련이고, 주부이기에 집안이 흐트러져 있으면 집부터 치우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작업은 뒷전이기 마련. 하지만 작업실이 생기고, 또 동료가 있어 딸을 등원시킬 때면 나도 출근하는 기분으로 집을 나선다. 작업실은 가끔 아이들의 이색적인 놀이 공간이 되기도 한다. 가운데 빈 공간에 피크닉 매트 하나만 깔아주면 아이들은 소풍을 나온 것처럼 놀이를 즐기고, 매장의 큰 창문은 스케치북이 되기도 하니까. 


작년 겨울에는 언니와 자카드 원단과 타조 깃털, 빈티지 비즈 등을 사용해 칵테일 백을 함께 만들었다. 언니의 여성스러운 감성과 나의 글래머러스한 무드를 합친 아이템으로 판매는 원활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첫 컬래버레이션 아이템이라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올해 우리는 본격적으로 판매를 해볼 요량이다. 함께 여러 플리마켓도 참여하고, 다양한 협업 아이템도 선보일 계획이다. 언니의 차분함과 나의 적극적인 면을 잘 살리면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라 믿는다.



by. 포포포 김성실(젤리 프로덕션 대표)




이 글은 엄마의 잠재력을 주목하는 <포포포> 매거진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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