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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더티브 Mar 31. 2020

'n번방' 때문에 꺼내 든 그림책

[엄마의 그림책] 어른과 아이를 위한 성평등 그림책 2권


“아니야!!”

눈물이 그렁그렁 차 오른 아이는 악에 받힌 듯 소리쳤다. 첫 장을 지나 "여자는 남자보다 중요하지 않아 보여요"라는 문장을 읽은 직후였다. 이제 막 8살이 된 소녀의 마음엔 어떤 응어리가 있었던 걸까.


도서관 특강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프로그램 회기에 ‘성 평등’에 대한 주제를 꼭 넣는 편인데 <여자와 남자는 같아요> 책으로 수업을 하던 중이었다.

 


<여자와 남자는 같아요>(풀빛)



현장에서 아이들과 책으로 수업할 때 너무나 기초적인 것들에 대해 “몰랐어요”라는 피드백을 많이 접한다. 그건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어요”의 또 다른 표현이다. 요즘 화두인 ‘젠더 감수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도 ‘친구를 따돌리면 안 돼요’같은, 모두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내용들도 포함된다.

      




<여자와 남자는 같아요> (플란텔 팀 글, 루시 구티에레스 그림)



<여자와 남자는 같아요> 책표지



42년이라는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2020년의 현실은 별반 달라지지 않다. ‘내일을 위한 책’ 시리즈 중 하나로 1978년 스페인에서 출간된 이 책을 신간으로 착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책에서는 일과 지능과 용기는 남자인지 여자인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성은 훌륭한 사람이 되거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바로 뒷장에는 "그런데 부모들이 아들은 중요한 사람이 되도록 교육을 시켜요. 반면에 딸은 중요한 남자의 아내가 되도록 가르쳐요"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현실에서 비슷한 케이스를 상담한 적도 있다. “아들은 사회에서 성공해야 하는 만큼 성적에 신경 쓸 수밖에 없고 딸은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하기 위해 ‘그 정도의’ 조건을 만들어 주려고 한다”는. 그래서 지금부터 어떤 이력을 만들어 주기 위한 학습 플랜을 짜야할까 고민하는 부모. “유치원 교사가 되고 싶지만 엄마가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야 한대요”라는 아이. 이 사이에서 나는 “무엇이든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렴”이라는 내 속내를 밝혀도 되는 걸까. 순간 브레이크가 걸렸다.


책 속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남자가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때문에 여자는 많은 것을 남자에게 맞춰 줘야 해요.”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고 성이 다를 뿐 우리는 똑같은 존재라는 이야기로 책은 끝나지만 지금도 반복되는 현실의 민낯이었다.


      



<여자 남자, 할 일이 따로 정해져 있을까요?> (나카야마 치나쓰 글, 야마시타 유조 그림)



<여자 남자, 할 일이 따로 정해져 있을까요?> 책표지


원래 이 책의 제목은 <이상해!> 였으나 개정판부터는 제목이 바뀌었다. 젠더 감수성이 도마에 오르면서 보다 많은 검색에 유입되기 위한 전략으로 이해되나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크다.


2004년에 출간된 이 책. 저자의 약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48년 일본 구마모토에서 태어나 작가이자 탤런트, 가수로도 활동하는 저자는 1970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인권 운동과 시민운동도 열심히 했고, 한때 정치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1992년 스쿠버 다이빙을 시작한 뒤로 해마다 오십 번 정도는 바다에서 잠수를 즐긴다.      


<여자 남자, 할 일이 따로 정해져 있을까요?>(고래이야기)



이 책에서는 “이상해!”라는 화두가 끊임없이 떠오른다. 엄마와 하나도 닮지 않은 ‘화장도 안 한’ 이모의 직업은 수중 촬영 기사. 게다가 머리도 ‘남자같이’ 짧다. 이모는 “여자네, 남자네, 따질 것도 많네. 자꾸 그러면 물고기들이 흉본다!”며 조카를 데리고 바다로 들어가 물고기의 세계로 안내한다.


흰동가리는 모두 남자로 태어나 가장 크게 자란 녀석이 여자가 된다. 도화돔 수컷은 일주일 정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입 속에서 새끼를 키운다. 해마는 암컷의 알을 받아 수컷의 주머니에서 수정시키고 새끼가 자랄 때까지 품는다. 그때마다 아이도 물고기도 서로 “이상해!”를 외친다. 나에겐 당연해 보이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다.



더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간다. 초롱 아귀 옆구리에 붙어 있는 무언가가 꼬물꼬물 움직인다. “저건 뭐지? 벌레인가?”라는 아이의 물음에 초롱 아귀는 “내 남편이라고!” 발끈하며 묻는다. “땅 위에서는 남자가 여자한테 이렇게 붙어 있지 않아?” 초롱 아귀 암컷은 최대 60cm까지 자라지만 수컷은 고작 1.2~8.7cm에 불과하다. 심지어 암컷을 만나면 몸에 꼭 달라붙어 있다가 마침내 암컷 몸의 일부가 되어 영양분도 암컷의 혈관에서 얻어 살아간다.


다시 육지로 올라와 이모의 집으로 향한다. 아기를 업은 채 앞치마를 두르고 돈가스를 만들어 주는 사람은 이모부다. 그리고 아이는 더 이상 ‘남자인데, 이상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n번방 사건' 이후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받는 ‘대접’과 ‘말’이 다르다.


‘예쁘다’는 말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생긴 모양이 아름다워 눈으로 보기에 좋다.

2. 행동이나 동작이 보기에 사랑스럽거나 귀엽다.

3. 아이가 말을 잘 듣거나 행동이 발라서 흐뭇하다.


나는 아들에게 ‘예쁜’이라는 수식어를 쓰는 걸 좋아한다. 행동이 예뻐서 사랑스러워서. 그런데 그 수식어를 듣는 어르신들의 얼굴엔 못마땅함이 스쳐 지나간다. 발길을 멈추고 “그런 말 쓰면 고추 떨어진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지는 분도 계셨다.


생각해보면 공주대접이란 말은 많이 써도 왕자대접이란 말은 쓰지 않는다. ‘기집애 같이’, ‘머슴아 같이’. 이런 수식어를 아이들도 그대로 따라 얘기한다. 이렇게 ‘여자는’ ‘남자는’ 어떠해야 한다는 성 역할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무의식 속에 스며들어 의식의 구조를 만든다.



''일본 야동' 여배우들, 'n번방' 피해자처럼 착취당한다' 등 여러 기사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WEF(World Economic Forum)에서 발표한 2020년 성평등 지수에 따르면 총 153개국 중 한국은 108위, 일본은 121위에 랭크되었다. 한국은 작년보다 7계단 올라갔지만 남녀의 급여 차이는 한국 34.6%, 일본 24.5%로 일본보다 더 벌어져 있다. n번방 사건은 현재 양국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인식을 고스란히 투영한 현실의 축소판이다.


지난해 뉴욕에서 워킹맘들을 취재하는 동안 엄마가 일을 하는 동안 아빠가 아이를 픽업하고 학교 생활에 참여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다. 아이를 시설에 맡기는 것도 베이비시터를 구하는 것도 엄청나게 비싸 자연스레 여성의 경력 단절 비율이 높다는 뉴욕에서 말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아빠는 일하는 사람 엄마는 집에 있는 사람이 아닌 둘 중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을 돌봐주는 것으로 자연스레 인지하고 있었다.


내 아들만, 내 딸만 잘 키워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여자는’으로 시작하는 어떤 굴레를 씌우지 않는 어른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핑크색을 좋아하고 “엄마 나 예쁘지?”라고 묻는 애교쟁이 아들에게 ‘남자다움’이라는 또 다른 코르셋을 씌우고 싶지 않다. 동시에 아이는 공룡과 로봇을 좋아하는 개구쟁이다. 핑크색과 공룡도 결국 수많은 관심사 중 하나일 뿐이다. 결국 변화는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by. 정유미(엄마의 잠재력에 주목하는 <포포포> 매거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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