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티브X포포포] 기혼여성 페미니즘 탐구모임 ‘부너미’ 대표 이성경
written by 마더티브 에디터&창고살롱 커넥터 홍현진
성경님을 처음 알게 된 건 육아 휴직 시절, 페이스북을 통해서였다. 등센서 때문에 좀처럼 품에서 떨어지지 않는 아이를 안고 스마트폰 들여다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던 날들. 성경님이 올린 사이다 글을 읽고 있으면 꽉 막혔던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엄마가 쓰는 글이지만 엄마로만 머물지 않는 글. 페미니즘 렌즈로 엄마의 삶을 예민하게 들여다보는 글. 육아 휴직 끝나고 편집부 돌아가면 이분 꼭 필진으로 섭외해야지 생각했다. ‘마더티브’의 시작이었던 ‘주간애미’를 기획하면서 첫 번째 필진은 고민할 것 없이 성경님이었다.
내가 퇴사와 이직을 거치는 사이 성경님은 기혼여성 페미니즘 탐구모임 부너미를 결성했고 2019년 봄 엄마 11명이 공저자로 참여한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민들레)를 펴냈다. 그리고 2020년 봄, 1년 만에 다시 11명의 기혼 여성을 모아 <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와온)를 출간했다.
기혼 여성의 페미니즘과 섹스. 한국 사회에서 논쟁적일 수밖에 없는 주제를 두 권의 책으로 펴내는 과정에서 성경님은 기획 단계부터 시작해서 함께 글 쓸 필진을 모으고 수개월에 걸쳐 모임을 진행하고 출판사와 필진 사이를 조율했다. 텀블벅 진행과 출간 후 홍보까지 생각하면 그야말로 대장정이었다.
“혼자서는 쓰지 못했을 이야기를 ‘함께’의 힘으로 출간합니다. 각자 독립적으로 글을 쓴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하고 서로의 글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 프롤로그 중에서
함께, 공적 글쓰기의 힘은 뭘까. 어려움은 없었을까. 두 권의 책 너머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인터뷰를 빙자해 밤 10시, Zoom 앞에서 심야 수다를 나눴다.
- 1년 만에 또다시 공저로 두 번째 책을 냈어요. 첫 번째 책 내고 만났을 때 다시는 안 하겠다 그랬잖아요(웃음).
“두 번째 책 만들 때도 계속 그랬어요. 다시는 안 한다고. 그랬더니 편집자가 아마 또 몇 개월 있다 아이템 있다면서 전화 할 거라고(웃음). 첫 번째 책 편집자랑 두 번째 책 편집자가 같거든요.”
- 그래도 두 번째는 좀 달랐을 것 같아요.
“첫 번째 책은 저도 처음이었고 의견 조율하는 것도 어려웠어요. 시행착오가 많았는데 두 번째 책은 순조롭게 진행됐어요. 참가자들도 ‘섹스’라는 주제를 가지고 6~7개월 집중적으로 책 읽고 영화 보고 섹스 관련 경험담 쏟아내고 글 쓰고… 살면서 이렇게 집중적으로 섹스를 탐구해 본 적이 없으니 너무 재밌는 거예요. 만나서 깔깔깔 하면서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 6~7개월 동안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이 있었던 건지 궁금해요.
“저희 목표가 한 사람당 A4 7장씩 쓰는 거였어요. 처음부터 7장 쓰기 어렵잖아요. 각자 다른 주제 정해서 초고를 처음에 A4 용지 2장 쓰고, 그다음 달 A4 용지 4장 쓰고, 그다음 달에 6장 쓰고. 매달 오프라인으로 집중적으로 만났어요. 그다음 달에는 한옥에서 1박 2일 모여 서로 피드백을 했어요. 이건 별로다. 이건 어떤 사례가 들어가는 게 좋겠다. 그렇게 글을 완성한 다음 세부 교정하고. 출판하는 데까지 시간이 또 걸렸고요.”
- 공저가 결코 쉽지 않잖아요. 서로 주제를 나누고 톤을 맞춰야 하고 시간도 더 오래 걸리고요. 하물며 11명이라니. 이렇게 많은 사람과 공저를 하기로 한 이유가 있나요? 그것도 두 번이나.
“사실 공저자 많은 걸 출판사에서 별로 안 좋아하더라고요(웃음). 저는 글을 잘 쓰는 것보다 책을 내는 과정에서 함께 탐구해 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A4 7장 뚝딱 써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필진들끼리 서로 이야기하면서 배우는 과정이 좋았어요. 울고 달래주고 서로 연대하면서 외롭지 않은 시간을 경험할 수 있었죠. 책 내는 과정에서 삶이 변한 분도 많고요.”
- 기혼 여성들이 섹스를 주제로 이렇게 솔직한 이야기를 공적으로 들려준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이 책에 담기지 않은 재밌는 내용도 많아요. 유지은쌤 원고 초반에 외국인 남자친구가 좋아하는 체위가 뭔지 물어보는 대목이 나와요. 섹스는 우리가 함께 즐겁기 위해서 하는 건데 네 성감대를 너한테 물어보지 누구한테 물어보냐고요. 그걸 보고 다른 사람들이 너무 쇼킹한 거예요. 우리는 성감대 어디냐는 질문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데...(웃음) 멤버들이 유지은쌤 초고를 남편한테 읽어주면서 배우라고 그랬대요.”
- 맞아요. 저도 그 대목이 인상적이었어요.
“부부끼리 ‘네가 좋아하는 영화 뭐야’, ‘좋아하는 음식 뭐야’ 묻듯이 좋아하는 체위 뭐냐고 물어보는 게 건강하고 자연스러운데 그걸 너무 수치스러워하거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게 정말 문제였다는 걸 알게 됐어요.
김우림쌤이 해준 이야기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게 프랑스에서는 섹스를 기쁨이라고 가르친대요. 우리는 한 번도 섹스를 기쁨이라고 배워본 적 없잖아요. ‘임신하면 큰일 난다’, ‘섹스는 못된 짓이다’ 죄책감, 불안을 심어주는 교육을 받았죠. 섹스에 대해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신선하고 저도 많이 배웠어요.”
- 부너미가 처음에는 페미니즘 책 읽기 모임으로 시작했던 걸로 기억해요. 어떻게 책을 쓰게 된 거예요?
“처음에는 책 읽고 독후감 쓰고 문집 만들고 그랬죠. 제가 ‘민들레’ 출판사에서 만드는 격월지 <민들레>에 페미니즘 관련해서 1년 동안 기고를 했어요. 거기에 부너미 활동과 엄마들의 당사자 글쓰기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썼는데 그걸 보고 출판 제안이 왔어요. 출판사에서는 3~4명 정도 잘 쓰는 사람들이 여러 주제를 쓰자고 했는데 저는 반대했어요. 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경험을 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두 번째 책도 다양한 부부의 모습을 담고 싶었고요. 첫 번째 책 편집자가 회사를 나와서 출판사를 차렸는데요. 두 번째 책도 같이 만들게 됐어요.”
- 두 책을 함께 낸 편집자가 남자분이라고 들었어요.
“첫 번째 책 낼 때는 편집자가 넋 빠진 표정을 많이 했어요. 회의할 때마다 엄마 11명이 쉴 새 없이 이야기하니까(웃음). 첫 번째 책 낼 때는 필진들이 편집자 의견에 동의를 안 하기도 하고 마감을 안 지키기도 하고. 중간에서 제가 많이 힘들었어요. 이번에는 아예 처음부터 이야기하고 시작했어요. ‘편집자 말은 하늘이다, 무조건 듣자’(웃음).
저는 이 모임에서 콘텐츠를 풍부하게 만드는 게 제 역할이라고 선을 명확하게 했어요. 책이나 다큐를 추천해주거나 경험을 들려주거나 공간 대여하고 식사 예약하고... 운영 면에서 서포트 하는 거지 출판에 대한 건 전적으로 출판사의 권한이라고요.”
- 그럼 6개월간 처음 멤버가 끝까지 간 건가요?
“네. 다들 같이 모여서 탐구하고 글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재미를 느낀 것 같아요. 무엇보다 사람들을 끝까지 글 쓰게 만든 원동력은 벌금이었죠(웃음). 그런데도 마감 어기는 분들이 있어서 그 돈으로 맛있는 거 사 먹고요. 애초에 타이트한 일정을 강제성 있게 잡아놓고 그걸 사람들이 인지한 상태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니까 순조롭게 마무리됐어요. 편집자가 공저 책이 이렇게 일정 맞춰서 나오기 어렵다고 고맙다고 하길래 제가 한마디 했죠. ‘돈의 힘입니다’(웃음).”
- 이렇게 단호하게 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는데 한없이 기다려주고 이해해줄 수 없으니까요. 제가 부너미 이전에 다른 독서 모임에 참여한 적 있는데 너무 느슨하게 하니까 책 안 읽고 오는 사람도 있고 당일에 안 나오기도 하고. 의욕이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2017년에 부너미 만들 때 처음부터 단호하게 원칙을 정했어요. 모임에 무임승차하지 말자고요. 무조건 읽고 무조건 쓰고 무조건 말할 것. 최소한의 선을 정한 거죠.”
- 제가 성경님 글 처음 본 게 2016년이었어요. 그때 이미 페북 스타(?)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전에도 공적 글쓰기를 하셨나요?
“페북 이전에는 공적 글쓰기도 안 했고 페북도 안 했어요. 카카오 스토리에 육아 일기만 올렸죠. 남편이 주차 못 하는 사람한테 ‘김여사’라고 말한 것 때문에 열 받아서 페북에 글 처음 쓴 게 2016년 초였어요. 분노가 도저히 갈 곳이 없어서 글쓰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반응이 좋았어요. 저도 다른 사람들 페북 글 읽게 되면서 페미니즘에 눈을 뜨게 됐고요. 저는 남편이 은인이라고 생각해요. 그때 남편이 나를 분노하게 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육아일기 충실히 쓰고 있을 텐데(웃음).”
- 그렇게 공적 글쓰기를 시작해서 ‘함께 글쓰기’로 넘어가게 된 게 흥미로워요. 계속 혼자 쓸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힘들게 사람들을 모은 거예요?
“<82년생 김지영> 책과 영화를 봤을 때 답답함이 많았어요. 현실에서는 저것보다 훨씬 다양한 기혼 여성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치열하게 살고 있는데. 그들의 이야기는 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데. 혼자 글 쓰게 되면 제 이야기밖에 못 하잖아요. 저의 경험 이상은 이야기 못 하니까요.
출판사에서 출간 제안이 온다는 게 저한테는 되게 귀한 기회였어요. 대단한 커리어우먼, 슈퍼우먼 그런 것도 아니고 평범한 기혼여성 이야기를 실어주겠다는 거잖아요. 그 기회를 몇 명만 갖는 것보다는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가는 기혼 여성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담고 싶었어요. 내가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나와 다른 환경에 있는 주제 당사자가 이야기했으면 했어요. 인세는 11분의 1이지만 귀한 경험을 같이 나누는 게 좋았어요.”
- 설마 다음 책도 구상 중이신가요?(웃음)
“또 할 거예요! 제가 지금 성 평등 교육 활동을 하고 있는데요. 아이들과 전래동화 같이 읽다 보면 답답하더라고요. 엄마들이랑 전래동화를 성 평등 관점에서 같이 분석하고 새로운 관점으로 쓰고 싶어요. 시중에 전래동화 다시 쓴 이야기가 있기는 하지만 저는 더 많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존 신데렐라가 출판사별로 15개 버전이 있다면 새로 쓴 신데렐라도 15개 정도는 돼야죠.
정말 큰 목표는 전집을 만드는 거예요. 명작동화, 전래동화 30권, 50권 세트로 나오는데 새로 쓴 버전도 그 정도는 나와야죠. 혼자 하면 힘들겠지만 한 10명 모이면 집단 지성이 있잖아요. 돈의 힘도 있고(웃음), 마감 때가 되면 아이디어도 나오는 거고 어떻게든 결론이 나오겠죠.”
- 정말 대단해요. 그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오는 거예요?
“제가 읽고 싶은데 없으니까 만드는 거예요. 첫 번째 책도 그렇고 두 번째 책도 그랬고요. 제가 필진들에게 계속 그 이야기를 했어요. 각자 읽고 싶은 책, 읽고 싶은 글을 쓰라고. 동화책도 내가 읽고 싶은 걸 쓰면 쓸 수 있지 않을까요? 현진님도 함께 해요.”
“우리 삶의 패턴은 제각기 떠돌아다니는 것들이 아니라, 잠시라도 함께 박자를 맞추어 움직이는 것들 사이에서 생겨난다.” -<멀고도 가까운>
성경님의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리베카 솔닛의 문장을 떠올렸다. ‘울컥’에서 시작된 개인적 글쓰기가 함께 글쓰기로 이어지고 책 한 권, 한 권으로 엮이는 모습. 그 책에서 용기를 얻어 누군가 글을 쓰기 시작하는 모습. 머지않아 또다시 멋진 작품을 만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 글은 엄마의 잠재력을 주목하는 <포포포> 매거진 3호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