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살롱] <뒤에 올 여성들에게> 스토리 살롱이 남긴 질문
<뒤에 올 여성들에게>는 꽤 오랜만에 읽는 회고록 장르의 책이었다. 책 내용 자체가 흥미진진하고 기발한 사건으로 이루어지진 않았으나 저자가 그 오랜 시절, 그것도 미국에서 겪은 일련의 사건들이 지금, 한국 어딘가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으며 주위에서도 흔히 겪을 수 있는 일들이라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보통 책을 혼자 읽는 경우 그 저자의 의도라든가 혹은 책의 내용을 아주 약간 이해하는 정도에 이르는 경우가 많아 책을 읽고도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찾아 읽고는 했다. 그런데 12월 어느 저녁, 나 홀로 도저히 풀 수 없는 그간의 고민들을 나누며 서로에게 공감했던 긍정적인 순간들이 꽤 치명적인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솟구치는 분노가, 짙은 선홍색 노여움이 차를 가득 채웠다. 철제 차대와 유리창은 노여움을 담아내지 못했다. 분노가 도로로 흘러 넘쳐 휘발유에 불붙듯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베이브리지 위에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그날의 분노와 각성이 내 나머지 인생에 에너지를 불어넣어줄 터였다. 그 분노와 각성이 나를 이끌었고, 덕분에 새로운 학문 분야를 만들고, 성차별을 연구하고, 그에 대항해 싸우는 새로운 조직을 세우는 일원이 될 수 있었다. <뒤에 올 여성들에게> 27p
버클리대 강사 시절,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임용에 탈락된 당일, 저자는 페미니스트가 되었다고 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내가 그동안 읽었던 수많은 문학과 드라마에서 말하는 어떠한 특정 '기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특정 '기점'이라는 것들을 보면 보통 자신의 한계를 맞닥뜨리는 순간인데, 그때 번아웃되어 나가떨어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전후로 큰 도전을 시도하거나 사고의 전환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차이가 늘 궁금했다.
나 또한 오랫동안 고착된 '기점'에 머물러 있었다. 이는 결혼 생활 대부분을 육아와 가사에 충실하느라 개인적 욕구를 누르며 사는 게 익숙해진 57년생 전업 주부였던 엄마로부터 기인했노라 추측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너는 나처럼 살지 말아라'라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그때 엄마의 모습이 무척 지쳐 보였던 게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서 결혼 후 아이를 키우며 잠시 멈췄던 일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이직을 준비하며, 밀려오는 초초함과 자괴감을 다루기 꽤 힘들었던 것이 기억난다.
워킹맘 10년째, 가끔 일과 육아에 대한 고충을 털어놓으면 엄마는 '여자가 아무리 커리어가 잘 나가도 자식이 잘못되면 말짱 도루묵'이라며 주위에 소위 사회적으로 잘 나가던 분들이 자식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에피소드를 전한다. 본인처럼 전업 주부로 살지 않되 아이도 잘 키우라는 친정엄마의 메시지로부터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나의 '기점'을 되돌아보며, 또한 저자가 페미니스트가 된 대목을 읽으며 머리가 또렷해진다.
이제 더 이상 혼자 고민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책 초반부에서 중반까지 첫 번째 남편인 샘의 이야기가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저자와 남편이 갈등을 빚는 원인 중 하나였던 육아와 가사의 경우, 남편은 저자에게 성공하고 싶다면 강의도 하고 집안일도 하며 아이들을 돌볼 방법을 찾으라고 말한다. 이 대목을 읽으며 우리는 과거 남편들과의 대화에서 느꼈던 막막함을 자동 소환할 수 있었다. 곧 수많은 질문이 꼬리를 물게 된다.
"수십 년 전 미국의 교수 부부에게도 벌어지는 일이 지금 여전히 나에게 벌어지는 것은 도대체 왜 때문일까? 만약 내가 내 일을 남편의 일만큼 중요하다고 주장했다면 어땠을까? 아니 그전에 내가 내 일을 남편의 일만큼 중요하다고 확신을 갖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이 과연 무엇인가?"
답도 없는 질문들을 곱씹자니 왜 나만 고민하나 싶은 억울함이 들었다. 곧이어 창고살롱 안에서 서로를 레퍼런서(Reference+er)로 부르며 서로의 서사를 나누는 그 행위가 어쩌면 남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장이라서 혹은 더 중요한 일을 하기 때문에 가사와 육아는 후순위를 미루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 사례들을 남성들이 조금 더 많이 접하게 된다면? 여성들에게 아이를 기르고, 삶에 의미 있는 커리어를 꾸려가기 위한 레퍼런스를 찾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남성들도 가정과 아이를 진정으로 포용하고 육아와 가사의 가치를 인정하며 살고 있는 남성 레퍼런서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스포일러 주의) 저자는 첫 번째 남편과 결국 이혼을 한다.
부담이 큰 커리어와 가족을 다 누리는 건 가능한가요?
물론이죠. 두 사람은 자양분이 되는 개인적 관계를 지속하면서 둘 다 만족스러운 커리어를 쌓아갈 수 있어요. 하지만 둘 다 그 길을 가겠다고 헌신할 때뿐이죠. 자기와 파트너가 굳게 마음먹을 때, 그런 관계를 가능하게 할 방법을 찾을 수 있어요
나는 누구와 결혼하느냐 혹은 동반자가 되느냐가 앞으로 내릴 가장 중요한 커리어 결정이며, 함께 사는 사람이 자신의 커리어를 지지하지 않으면 앞에는 아주 길고 어려운 길이 놓일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뒤에 올 여성들에게> 367p
'모두 다 가질 수 있을까?'라는 화두로 같이 이야기하던 의진님이 결혼 후, 아이 없이 약 10년 동안 남편과 수많은 대화를 하며 결혼 생활을 맞추어갔다는 이야기를 나누어 주었다.
의진님의 이야기를 빌어 생각하자니 서로 다른 가치관과 다른 경험을 가진 남녀가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서로 맞춰 가는 과정에서 둘 중 하나가 힘들어 나가떨어지지 않는 비법이란 따로 있는 것 같지 않다. '모두 다 가질 수 있느냐'라는 질문은 결국 한 사람이 더 양보하고 희생하기보다는 각자 또 같이 헌신하겠다는 동업자의 마음, 곧 '진정한 파트너십'의 마음을 먹을 때야 비로소 성립되는 질문이랄까.
의진님이 남편과 나누었던 10년 동안의 대화, 무려 10년이라는 시간을 상상하니 진정한 파트너십이라는 것 자체가 어쩌면 어느 날 갑자기 선물같이 찾아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주위에 조금 더 나은 파트너십을 꾸려가는 레퍼런스가 쌓인다면 쉽게 지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에 올 여성들에게>의 작가는 결국 스스로 자신을 기록해 낸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그 책을 우리가 읽는 거고요. 그런데 세상에는 생각보다 스스로를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기록해줘야 할 것 같아요."
라는 두란님의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서로를 기록해줘야 한다는 말을 들으니, 세상엔 기록된 것보다 기록되지 않은 삶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책을 읽고 함께 대화하는 시간 그리고 서로를 기록하고 읽어주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이라도 성장할 수 있다면?
-각자의 삶이 혼자만의 고민으로 점철되어 끝나는 것이 아닌 그 고민조차 서로 참조할 만한 사례가 되어준다면?
더욱 다채롭고 세밀한 레퍼런스들이 기대된다.
글 : 지영(박작가)/ 편집 : 살롱지기 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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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살롱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