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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더티브 Feb 20. 2019

지옥철에서 책 꺼내는 여자의 속사정

[엄마의 책장] 그 엄마의 독서법 ③


누군가 내게 취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독서’라고 말할 수 있다. 매일 책을 읽는데, 그 시간이 즐겁고 행복하다. 한 달에 5만~10만 원치 꾸준히 책을 사들이기도 한다. 그만큼 
책을 좋아한다. 아니, 좋아졌다.

원래부터 독서인은 아니었다. 글을 다루는 게 직업임에도 한 달에 한 권 겨우 읽을까 말까 했다. 그랬던 내가 불과 2년 전부터 한 달에 최소 4권, 많으면 8권까지도 읽는다. 속독, 발췌독이 아닌 정독으로.

내가 애 엄마라는 걸 아는 지인들은 이쯤에서 꼭 묻는다.
 “회사도 다니고 애도 키우는데 언제 책을 읽어?”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직장맘에게 책을 읽는 여유가 허락되냐는 뜻이다. 나는 일과 육아, 그 사이를 공략한다. 바로 출퇴근 시간이다.


지하철, 오롯이 나를 위한 공간


(출처: unsplash)


나는 경기도 군포에서 서울로 출퇴근한다. 버스, 지하철, 도보 다 합쳐 편도 1시간 반 정도 걸린다. 이중 지하철 이동만 1시간이다. 열차 안은 무언가를 하기에 좋은 공간이다. 비교적 잘 닦인 철로를 일정한 속도로 달리므로 다른 교통수단에 비해 안정적이다. 버스처럼 심하게 흔들리는 일도 없고, 멀미할 일도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아침저녁으로 타는 열차에서 나는 편안함마저 느끼곤 한다. 마치 
육아에서 일로, 일에서 육아로 전환하는 완충지대이자 중립지대처럼 느껴진다. 이곳에서 나는 어느 회사의 직원도 아니고 누구의 엄마도 아니다. 나만 덩그러니 남는다.

친정엄마 옆에서 살기 위해 ‘경기도 통근러’가 된 지난 2017년. 철로 위를 따라 흘러가는 2시간(왕복 기준)만큼은 오롯이 나를 위해 쓰기로 했다. 
해야만 하는 것들은 잠시 내려놓고, 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게 책이다. 평소에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던 일, 지하철이라는 이동 공간 안에서 시도할 수 있는 일, 소모적이기보다는 내 안 어딘가에 쌓인다는 느낌이 드는 일. 독서는 내게 그런 일이었다.

평일 닷새 동안 지하철에서 왕복 두 시간씩 책을 꺼내 읽으면 하루 10시간 읽는 셈이다. 이렇게만 읽으면 한 달에 4~8권 완독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하철 독서에 성공하려면 분야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 그보다는
 ‘취향’이 핵심이다.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니라 읽고 싶은 책 위주로 공략해야 한다. 그래야만 어떠한 상황과 환경에서든 책의 세계에 몰입할 수 있다.

출퇴근 시간대의 ‘지옥철’은 틈과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자리에 앉으면 그날은 로또 맞은 격이고, 두 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설 수 있으면 꽤 운이 좋은 축에 속한다. 대개는 시루 속 콩나물처럼 앞뒤 좌우로 사람들과 몸을 맞댄 채 목적지까지 ‘존버’한다.

그런 상태에서도 책을 펼칠 수 있을 정도도 몰입도 높은 책이어야 한다. 여기서 기준은 나.
 남들이 좋다는 베스트셀러 말고. 서울대 권장도서 말고. ‘뇌피셜’에 근거한 책.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칠 정도로 내가 책인지 책이 나인지 모르는 호접몽스러운 상태로 읽히는 책.

나는 앉아 있든, 서 있든, 짓눌려 있든, 내 눈앞에 책을 펼칠 공간만 허락된다면 지하철에서 언제든 책을 꺼내 펼친다. 가방이 무거우면 선반에 올려놓고 손에는 책만 남긴다. 어쩌다 남편과 같이 출근할 때도 “난 책을 읽을 테니 알아서 시간 보내^^”라며 그를 내 시야에서 지운다. 재밌을 줄 알았는데 막상 읽어보니 진도가 안 나가는 책은 과감히 덮고 다음 후보로 넘어간다. 
지하철 독서의 세계는 오직 내 기준대로 흘러가야 한다.

그래서 너무 무거운 책은 지하철에 들고 나오지 않는다. 벽돌 뺨치는 두께의 책은 일단 제외. 전문 학술 서적도 다음 기회에. 
몰입하려면 눈이 문장을 따라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별도의 ‘독해’ 없이 한 번만 읽어도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의 책 위주로 고른다. 주로 소설이나 산문집을 읽게 되는 이유다. 너무 두껍지 않은 사회과학(주로 대중적인 서적) 서적도 읽는다.


살기 위해 읽는다



지하철에서 읽은 공지영 <딸에게 주는 레피시>


홍학처럼 거의 한 발로 서야 할 정도로 붐비는 출근길, 또는 밤 10시를 넘긴 퇴근길 지하철에선 ‘굳이 이렇게까지 읽어야 하나’ 싶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결국 책을 펼친다. 독서의 효능감을 제대로 느낀 나는 이제 하루라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건 아니고 좀 공허해진다. 내 멘탈을 다잡는 습관 같은 거랄까.

출산 후 육아휴직 때는 집에서 책 읽을 시간이 전무했다. 아기가 잠들고 나면 같이 쓰러져 자거나, 잠이 안 오면 어둠 속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엄지손가락만 까딱였다. 충만한 하루를 보내려 나름 애를 썼지만 의욕과 의지를 자주 잃었다. 내 안의 에너지가 쉽게 바닥을 쳤는데 어떻게 충전해야 할지를 몰랐다.

복직 후 지하철 독서는 그런 내게 주유소와도 같다. 아침에 애랑 한바탕 씨름하면서, 회사에서 감정 노동을 하면서 쌓인 독기(?)를 책을 읽으며 해독한다. 책에서 내 마음과도 같은 문장을 만나거나, 지금의 나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마주할 때면, 좀 더 열심히 살아갈 힘이 차오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이를 사랑하는데 육아는 뜻대로 되지 않던 때, 지하철에서 이러한 문장을 만나며 사랑의 본질을 배우고 더 나아갈 끈기를 길렀다.


“우리는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란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출퇴근길을 주제로 다룬 <릿터> 16호(출처: 민음사)


경기도에서 출퇴근한다고 하면 간혹 서울 사람들은 나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한다. 
“하루에 3시간이나 길에 버리는 거네.” 그러나 내가 지하철에서 만난 사람들은 시간을 허투루 버리지 않는다. 그 길 위에서 전화로 중국어를 배우고,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사랑하는 사람과 통화하고, 영어 단어를 한 자라도 더 외운다. 저마다의 시간을 붙잡기 위해서.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달리는 열차 안에서 책을 펼친다. 그렇게 나의 시간을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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