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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더티브 Apr 29. 2019

저는 '완벽한 남편'과 삽니다

[반반육아] '더치페이 육아'의 기쁨과 슬픔

친구들을 만나면 꼭 듣는 말이 있다. 너희 오빠 참 좋은 남편이야.” 아내에게 자상하고 요리도 잘하고 살림도 열심히 하고 애도 잘 보니 그 만한 남자가 어디 있냐는 뜻이다.


그의 평일 일과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전 6시. 일어나자마자 쌀을 씻어 밥솥에 안치고 어린이집 가방을 싼다. 아이가 일어나면 겨우 씻기고 아침을 먹이고 옷을 입히며 동시에 출근 준비를 한다. 오전 8시 20분.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회사에 지각한다. 더 놀겠다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 등원시킨 다음 서둘러 출근한다.

오후 7시. 일을 마친 후 곧장 집으로 달려온다. 최근 1년간 회식이나 저녁 약속에 참석한 횟수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 도착하자마자 후다닥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세탁기를 돌린다. 아이와 놀아주다가 목욕시킨 뒤 재운다. 다시 일어나 빨래를 널고 어린이집 도시락통을 씻고 쓰레기를 버린 다음, 밀린 드라마를 보거나 내가 주문한 아이 반찬을 만들거나 낮에 회사에서 못 끝낸 일을 처리하다가 잠든다.

맞다. 나는 참 좋은 남편을 만났다. 그와 나는 가사와 육아를 공평하게 분담하고 있지만, 노동 강도나 시간으로 따져보면 그가 좀 더 많이 한다. 통계청 조사에 근거하면 내 남편은 대한민국 3% 안에 드는 남자다(2018년 일·가정 양립지표에 따르면 남편이 가사를 주도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남편 3.7%, 아내 2.8%였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매우 이상적인, 그야말로 완벽한남편과 살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쯤에서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을 언급하고 싶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내가 불행하다는 뜻은 아니다. 부지런하고 사려 깊은 남편 덕에 행복하지만, 그 속에 나만의 고충 또한 존재한다. 내게는 두 가지가 없다.

내 편이 없다


육아빠가 부러워요(출처: KBS)


남편이 가사와 육아에 적극적이라고 해서 내가 노는 건 아니다. 그가 아침에 이것저것 하는 대신, 나는 그보다 더 일찍 퇴근 후 집으로 달려와 아이 하원을 도와주는 친정엄마와 바통터치를 한다. 그러기 위해 출근 시간을 앞당겼다. 남편이 아이를 씻기면 나는 어질러진 장난감을 치우고, 남편이 반찬을 만들면 나는 온라인으로 채소나 과일, 두부 같은 걸 주문해둔다.

우리는 대부분 톱니바퀴처럼 동시에 움직이므로, 쉬지 못하고 바쁘게 움직이는 건 나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과 육아의 병행이 버겁다고 하소연하면 위로는커녕 이런 답이 돌아오곤 한다. 남편이 그렇게 해줘도 힘들구나.”

사실 육아 영역에서 육체 노동은 남편이 나보다 좀 더 많이 하지만, 아이의 스케줄을 계획하고 알아보고 결정하는 건 대부분 내 몫이다. 아이 발달에 맞게 식단을 짜고, 어느 기저귀가 아이 피부에 맞는지 따져보고, 아이에게 필요한 놀이를 찾아보고, 내복 길이가 짧아지면 새로 장만하는 일들은 주로 내가 한다. 부모로서 책임지고 결정해야 하는 일들을 거의 내가 다 짊어지고 있으므로, 우리의 육아가 완전히 ‘평등’하다거나 남편이 나보다 더 육아에 적극적이라는 세간의 평가에 100% 동의하기 어려웠다.

양육의 책임과 평가가 엄마에게 쏠린 구조를 지적하면 회사 남자 선배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마디 했다. 그런 남편 어디 없다. 너무 뭐라고 하지 마.” 친정엄마도 늘 사위 편이다. “네가 그렇게 비실비실하게(?) 굴면 김 서방은 얼마나 힘들겠니.”

스테파니 스탈이 쓴 <빨래하는 페미니즘>을 읽다가 무릎을 친 대목이 있다.

“오전에는 내가, 오후에는 남편이 실비아를 돌보기로 했다. 표면적으로 이러한 공동 육아는 놀라우리만치 그리고 어찌 보면 지나칠 정도로 평등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 사람들이 우리 부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깨달았다. 사람들 눈에 내가 실비아를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의무였지만 남편이 실비아를 돌보는 것은 감지덕지한 은혜였다. 그들 눈에 비친 남편은 성자나 다름없었다.”


내가 하는 청소, 설거지, 요리, 빨래, 정리, 육아는 사람이 먹고 싸고 자는 것만큼 아무렇지 않게 여겨졌다. 매일 아이 밥상에 1일 3찬을 올리고 아이가 입는 옷을 직접 손빨래하는 정도가 아니면 엄마의 노동은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미는 게 현실이다. 반면에 남편은 어떠한가. 아이만 안고 나가도 ‘육아빠’라며 주목받는다. 내가 유모차를 끌고 카페에 가면 한가롭게 커피마시는 아줌마 취급받는데, 남편이 그렇게 하면 라떼파파라고 칭송받는다. 하나만 해도 열 배 칭찬받는 남편이 가끔은 부럽다.

출구가 없다


나의 남편도 회사 남성 선배들 사이에서 '공공의 적'이었다지... (출처: JTBC)


세상의 시선이야 내가 냉소하며 넘기면 그만이다. 더 큰 난제는 따로 있다. 너무 완벽한 남편에게서 헤어날 출구가 없다. 내가 말하는 출구는 그야말로 ‘탈출구’다. 육아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틈새가 없다. 남편이 나보다 좀 못하거나 덜해야 그걸 핑계로 “나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라며 큰소리 칠 수 있는데, 우리는 레알 ‘반반육아’다.

남편과 나는 처지가 정말 비슷하다. 일단 같은 회사에서 같은 직군으로 일한다. 근무 시간도 같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평일 저녁에도, 주말에도, 웬만하면 우리는 함께 집에서 아이를 돌본다. 둘 다 밖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느긋하게 보내지 못한다는 뜻이다.

한 육아 선배는 주말마다 하루씩 번갈아가면서 전담육아를 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면 한 명이 개고생하는 대신(ㅠㅠ) 다른 한 명은 자유시간을 누릴 수 있으니까. 나도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 말을 출산 전에 들었는데, 막상 애를 낳고 보니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남편은 헤비스모커여서 한두 시간에 한 번은 담배를 피워야 숨통이 트인다. 나는 덩치값을 못하는 저질체력이어서 한나절만 육아해도 방전된다. 남편과 나는 장거리 경주에 약한 사람들이었다. 부모가 되고서야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깨달았다.

그렇다고 육아라는 감옥 안에서 기약없이 견디기만 할 순 없었다. 남편과 나 둘 다 내향적 인간이어서 하루에 한 번이라도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급속히 쌓인다.
  
대승적으로 번갈아 자유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딱 두 시간씩만. 여기서 핵심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균형이다. 내가 오후 2시 38분에 나가면 오후 4시 38분까지는 반드시 집에 당도해야 했다. 남편도 마찬가지다. 만약 한 사람이 정해진 시간을 초과하면, 다른 사람도 그만큼 더 시간을 보내게 해줘야 했다. 균형을 맞춰주지 않으면 갈등과 불화로 번졌다. 그렇게 서로 0.1만큼의 양보도 허락하지 않았다.

일본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던 시절, 한류에 관심 많은 일본 중년 여성 두 명과 함께 점심을 한 적이 있다. 그들은 내게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둘중 한 사람이 계산하겠거니 싶었는데, 두 사람은 내 밥값을 정확히 반으로 나눠서 냈다. 쪼갤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까지 헤아려 철저하게 더치페이하는 광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던 기억이다. 나와 남편의 모습을 보며 그때 그들이 생각났다. 우리는 더치페이 육아를 하고 있는 셈이다.

더치페이 육아의 장점은 당장 독박육아를 안 해도 된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부채가 없어 좋다. 서로 시간을 빚지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심리적 부담이 없는 건 아니다. 매번 분 단위로 육아 시간을 계산하다보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더치페이 육아의 단점은 서로 부채가 없는 대신 그만큼 부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일이 많아서 회사에서 평소보다 늦게 퇴근한 적이 있다. 회사 업무 때문이지만 어쨌든 그때 난 육아에서 벗어나 있었고, 남편은 혼자서 애를 씻기고 재웠다. 결과적으로 내가 남편에게 빚을 졌기 때문에 칼같이 되갚아야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몸살 기운이 온몸에 퍼져 아침에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 몸이 안 좋아서 그러는데 조금만 더 누워 있으면 안 될까...?” 남편은 매우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 그래라고 대답했다. “많이 안 좋아?” “괜찮아?” “좀더 쉬어”라는 안부가 아닌 기계적 단답.

나의 아픔에 공감해주지 않는 남편에게 서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는 남편이 이해됐다. 육아에 시달리다 보면 몸이 힘들고, 몸이 힘들면 누군가를 배려할 마음의 여유조차 생기지 않으니까. 나도 그랬다. 심지어 나는 애를 씻기다 허리를 삐끗한 남편에게 “괜찮아?”라고 묻기는커녕 “조심 좀 하지 그랬어!”라며 화를 낸 적이 있다.

30분 정도 누워 있다가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남편은 입술이 한 접시 나온 채로 설거지 중이었다. “미안해.” 아픈 게 내 잘못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나 때문에 남편이 고생했으므로 사과부터 해야 했다. 남편이 등을 돌려 영혼 없는 눈빛과 음성으로 내게 말했다. “좀 더 쉬어.” 본심이 아닌 걸 아는 나는 남편이 원하는 말을 꺼냈다. “나갔다 와. 혼자 시간 좀 보내다 와.” 남편은 “괜찮아~”라고 했지만, 그의 눈빛은 외출이 가져다줄 설렘과 자유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육아는 개인전이 아닌 단체전이니까(출처: unsplash)


내 편도 없고 출구도 없는, 이도저도 못한 채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는 것처럼 보이는 반반육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이가 독립할 때까지 이러한 분담 구조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할 것 같다. 계속 서로를 견제하며 한 사람이 상대의 희생을 발구름판으로 삼아 자유를 전횡하는 일을 막을 테다. 이것이 애초 우리가 가기로 약속했던 길이기 때문이다.

남편과 나는 부모가 되기 전부터 일궈왔던 서로의 일과 삶을 지켜주기 위해 다소 느릴지라도 함께 가기로 마음먹었다. 누군가 육아로 인해 걸음을 멈추거나 방향을 틀지 않도록, 각자 홑몸으로 달리던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걷기로 했다. 초원의 사자처럼 자유롭게 뛰던 개인들이 갑자기 2인 3각을 하려니 답답한 건 당연했다.
  
우리의 육아는 개인전이 아닌 단체전이다. 두 사람이 함께 뛰는 경기다. 종목이 바뀌었으니 남편도 나도 새로운 룰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아이가 태어나고 지금까지 일종의 적응기가 아니었을까.
  
최근 아이의 세 돌을 기점으로 우리의 더치페이 육아에 균열이 나기 시작했다. 결정적 계기는 나의 제주도 2박 3일 회사 워크숍이었다. 완벽한 승기를 잡은(?) 남편도 지난해 연말에는 모처럼 술자리에 다녀왔다. 올해부터 우리는 좀더 큰 모험을 시작했다. 남편은 올 여름 해외출장을 앞두고 매주 수업을 듣는다. 나는 지난 3월 안식월에 홀로 3박 4일 여행을 다녀왔다. 언젠가는 주말에 하루씩 번갈아가며 한 명은 애랑 놀고 다른 한 명은 자유 시간을 누리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우리는 이 답답함과 지지부진함을 좀 더 견뎌보기로 했다. 제자리걸음처럼 보여도 우리는 조금씩 나아가고 있으니까.



[반반육아 ②] 남편이 육아용품 사면 벌어지는 일

[반반육아 ③] '육휴' 남편이 3시 하원은 너무 빠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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