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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더티브 May 13. 2019

'육휴' 남편이 3시 하원은 너무 빠르다고 말했다

[반반육아] 남편이 육아휴직하고서야 처음으로 꺼낸 말들


내가 1년 3개월 만에 다시 회사로 돌아가던 날, 남편은 육아휴직을 시작했다. 원래 계획은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육아휴직을 쓰는 것이었지만 상황이 갑자기 바뀌었다.


난 두 번의 임신과 출산을 연달아 하며 약 4년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제는 다시, 제대로 일을 시작해보려던 참이었다. 애를 둘이나 달고 오랜만에 돌아가는 일터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오래 쉬었던 탓에 회사에서도, 개인적으로도 더 큰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과 부담감도 이어졌다. 복귀 한 달 전부터 잠을 이루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리고 어느 날 남편은 자신이 육아휴직을 앞당겨 쓰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왔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부담스러운 상황에 처한 것 같다며 다시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했다. 또 지금이 지난 시간 동안 내가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애써준 것에 보답할 적기인 것 같다고도 말했다.


우리는 아이 둘을 둔 부모가 됐지만 여전히 모든 게 서툴다. 그런데다 둘 모두 편도 2시간에 다다르는 출퇴근을 해야 하니 어린아이들을 안정적으로 돌볼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정말로 그랬다. 바로 지금, 남편의 육아휴직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했다.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그렇게 남편의 육아휴직이 시작됐다.  6개월 동안이었다. 나는 조금은 무거운 마음을 덜고 다시 출근할 수 있었다. 내가 일을 하고 남편이 가사와 육아를 온전히 도맡는 상황은 처음이었다. 우린 낯설었지만 기대로 들뜨기도 했다.


약 한 달의 시간이 지났다. 우린 이 생활에 즐겁게 적응해나가고 있다. 특히 난 남편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말들이 흥미로웠다. 이 말들이 남편의 육아휴직을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일을 시작한 영애를 돕기 위해 남편 승준은 육아휴직을 한다 (출처 : tvN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


"선생님이 / 00엄마가 그러는데..."


남편은 아이들과 더욱 가까워지는 것을 육아휴직의 주요 목표로 설정했다. 원래 아이들과 친하긴 했지만 자신이 제1양육자가 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 목표는 가장 먼저, 가장 쉽게 달성됐다.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물리적인 시간이 절대적으로 더 많아졌고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주요 업무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육아휴직을 시작한 남편은 아이들의 어린이집 대표 부모 연락처를 나에서 자신으로 바꾸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첫째 아이의 학부모 단체 채팅방에 당당히 입장했고 둘째 아이의 키즈 노트 앱엔 남편만 접속할 수 있게 됐다.


어느 날부터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남편은 "00이 선생님이...", "00가 오늘은…"이라며 그날 있었던 아이들의 생활을 미주알고주알 얘기해주었다. 하루 이틀 지나니 "00엄마가/00아빠가 그러는데..."라며 이웃집 소식까지 전했다. 남편의 세계는 어느새 아이들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이들의 지근거리에서 모든 것을 알아가고 있는 남편의 육아휴직 생활은 매우 만족스러워 보인다. 반면에 아이들과 한 발짝 멀어진 나이지만 나 또한 나대로 육아에만 시달리며 지쳤던 마음에 다시 여유를 찾았다.


우리 부부도 육아 스트레스로 싸운 적이 더러 있다. "오빠가 애들 이유식 한 번 사봤냐" "내가 이유식 안 샀다고 이런 말 들을 줄은 몰랐다, 앞으론 내가 사면 되냐"고 유치함의 극을 달리며 다툰 날도 있었다. 내가 화가 난 건 이유식 사는 게 힘들어서가 아니라 남편이 아이들이 어떤 이유식을 먹는지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남편은 남편대로 노력하고 있다는 생각에 억울했다고.


지난 주말 남편은 첫째 아이가 입을 옷이 없다며 마트에 가 이것저것 골랐다. 아이의 사이즈와 취향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난 아이에게 환절기 옷이 없는지 알지 못했다. 사이즈도 한 치수가 커졌는지, 요즘엔 줄무늬 쫄바지를 좋아하는지 전혀 몰랐다. 상황은 완전히 역전돼있었다.


아이들은 엄마보다 아빠를 더 찾는다 (출처 : 마더티브)


"3시 하원은 너무 빨라"


남편이 육아휴직 중이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은 맞춤반이다. 오전 9-10시 사이에 등원해서 오후 3-4시 사이에 하원한다. 난 육아휴직 중 이 시간 동안 가사에 집중도 해봤고 어떤 날은 마냥 쉬기도 해봤으며 한때는 자기계발을 위해 바쁘게 시간을 보낼 때도 있었다. 결론은 뭘 해도 이 시간이 참 빨리 간다는 것.


남편은 종종 낮에 내가 왜 연락이 안 되는지, 왜 이 시간 안에 to-do 리스트를 다 못해내는지 궁금해했을 수도 있다. 난 거의 매일같이 "시간이 없다"는 말을 달고 살았는데 이런 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남편의 눈빛을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육아휴직을 시작한 남편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3시 하원은 너무 빠르다"는 말이 나왔다. 난 그 자리에서 폭소를 터트리며 "거봐, 내 말이 맞지?"라고 맞장구쳤다. 말로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무슨 말을 해도 핑계 같은 등하원 사이의 쏜살같이 흘러가는 시간. 남편이 이 느낌적인 느낌을 이해하다니, 그 어느 때보다 동질감이 느껴졌다.


나 또한 남편의 길고 고된 출퇴근 길과 주말 낮잠 같은 것들에 대해 이해하게 됐다. '그동안 왜 싸웠지?' 싶을 정도다. 미처 일일이 말로 꺼내기 어려웠던, 꺼내더라도 금세 날카로워져 괜한 싸움이 되기 일쑤였던 것들이 역전된 상황 덕분에 해소됐다. 싸우기 전에 대화를 나누는 게 가장 좋지만 육아와 가사의 영역에서 신사적으로 합의를 보기란 말처럼 쉽지가 않다. 서로의 상황에 처해봐야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미련한 우리 부부에게 남편의 육아휴직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출처 : 롯데그룹 광고 '남성육아휴직 - 육아휴직 후 비로소 보이는 것들' 편 중)


"저녁 뭐 먹고 싶어요?"


남편의 육아휴직을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동안 내가 중심을 잡고 해오던 '집안일'을 인수인계한 것이었다. 남편은 육아와 가사에 아주 문외한은 아니었지만 막상 본인이 키를 쥐고 하려니 어려움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마치 부서 이동 후 전임자에게 어려운 부분을 일일이 들고 쫓아다닐 수 없는 것과 같달까.


육아휴직 이틀째 되는 날 퇴근 무렵 남편으로부터 메시지 하나가 왔다. "저녁 뭐 먹고 싶어요?". 이 낯선 귀여움은 뭘까.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남편에게 '저녁 뭐 먹고 싶냐'는 질문을 처음 들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맥락은 처음이었다.


우리 부부는 둘 다 요리에 크게 소질이 없다. 그나마 내가 만들 수 있는 요리 가짓수가 조금 더 많았다. (그나마도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지만 말이다) 그래서 집에서 식사를 할 땐 나의 지휘 하에 같이 준비하거나 내가 요리를 하곤 했다. 대신 남편은 설거지와 청소 등을 맡았다.


그런데 드디어 남편은 식사 메뉴부터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인뿐만 아니라 나와 아이들까지 한 가족을 먹여살리겠다는 의지를 갖고. 그렇게 남편은 매일 같이 밥을 안치고, 고기를 굽고, 생선을 튀기고, 찌개를 끓이고, 반찬을 사서 저녁을 준비한다. (우리집은 반찬은 사서 먹는다)


(출처 : 롯데그룹 광고 '남성육아휴직 - 육아휴직 후 비로소 보이는 것들' 편 중)


남편은 이제 가사에 책임을 느낀다고 했다. 청소와 빨래, 식사 준비 등은 육아와 더불어 자신의 주요 업무라고. 하지만 이걸 정말 혼자 다 하는 건 아니다. 내가 육아휴직 중이었을 때도 나 혼자 다 하진 않았다. 우리집은 가사 주도권을 가진 이가 일의 순서 등을 계획하고 분배할 권한을 갖는다. 내가 평일 저녁 설거지는 남편의 몫이라고 못을 박았던 것처럼 지금의 나 또한 내 몫이 있다. 물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사람이 가사를 조금 더 하게 되겠지만 어쨌든 원칙적으론 형편에 따라 가사를 나눈다. 거의 모든 가사와 육아에 대한 결정권이 남편에게 넘어간 지금, 가사 주도권은 남편에게 있다.


5개월 후 남편의 육아휴직이 끝나면 우리집 업무는 다시 조정이 필요하다. 아마도 그땐 전과는 완전히 다른 이해도 아래서 가사와 육아 업무가 분배될 것이다.


사실 육아휴직을 한 지 일주일 정도 됐을 때 남편은 "집에서 육아하고 살림하는 것도 나름 할만한 것 같다"며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망언을 뱉기도 했다. 단박에 육아휴직 급여가 나오기 때문에, 돌아갈 직장이 있기 때문에, 나와 친정엄마가 육아와 가사를 적극적으로 돕기 때문에 그런 배부른 소리가 나오는 거라고 타박을 놓았다. 그리고 이런 말은 다시 꺼내지 않는다.


다시 일을 시작한 영애를 돕기 위해 남편 승준은 육아휴직을 한다 (출처 : tvN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


남편의 회사는 외국계라 비교적 남성의 육아휴직에 관대한 편이다. 그렇지만 '부서 최초' 남성 육아휴직자가 돼야 하는 부담도 분명 있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을 위해 용기를 내준 남편에게 고맙고, 또 고맙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시작하기 전날 부서 회식이 있었다. 내가 더 긴장했던 탓에 "분위기가 어땠냐"고 슬쩍 물어보니 "뜨거웠다"고 했다. 육아와 육아휴직에 관심을 갖고 있는 남성 직원이 많아 자신에게 많이 물어봤다고 은근히 뿌듯해하는 눈치였다. 미미하지만 육아휴직을 쓰는 남성의 수가 계속해서 증가하는 것만 보아도 이 뜨거운 관심을 알 수 있다.


아빠의 육아휴직은 아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닌 아내 그리고 '가족과 잘 살고 싶은' 자신을 위한 시간이다. 여건이 된다면 이 기회를 꼭 놓치지 않았으면. 나아가 모든 가정이 이런 기회를 누릴 수 있는 사회가 되길 기다려본다.



[반반육아 ①] 저는 '완벽한 남편'과 삽니다

[반반육아 ②] 남편이 육아용품 사면 벌어지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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