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tif Feb 18. 2024

막다른 골목은 끝이 아니다

Ray & Monica's [en route]_120


옥스나르의 멕시칼리



미국과 멕시코 국경은 약 3,145km. 이 국경에는 양국의 필요에 만들어진 쌍둥이 도시들이 있다. 샌디에이고 San Diego와 티후아나 Tijuana, 엘패소 El Paso와 시우다드 후아레스 Ciudad Juárez, 러레이도Laredo와 누에보라레도Nuevo Laredo, 브라운즈빌Brownsville과 마타모로스Heroica Matamoros 등이 해당 도시이다. 멕시칼리는 미국의 칼렉시코Calexico와 쌍을 이루고 있다.

미국과 국경을 맞댄 멕시코의 도시들을 방문하는 낯선 여행자는 여전히 두려움이 앞선다. 마약과 살인에 관한 뉴스와 그 뉴스와 살인율 통계를 바탕으로 그것을 극대화한 영화와 드라마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학습된 결과가 측두엽 깊숙이 숨어서 공포와 두려움을 해석하고 처리하는 편도체가 공포감이라는 메시지를 낸다. 그 두려움을 가진 곳에 도착하면 우리의 감각들은 혐오 자극 정보를 수집하고 편도체는 더욱 바빠진다.

라파스에서 이미 한 달 너머 한집에 살고 있는 32살의 숙소 주인 옥스나르Oxnar와 멕시칼리에 함께 가기로 한 뒤 그는 우리 부부의 편도체를 여러 번 활성화시켰다. 멕시칼리는 2년 전까지 10년간 공부하고 일했던 곳이므로 멕시칼리의 구석구석에 해박한 사람이었다.

"멕시칼리를 라파스처럼 생각하면 안돼요. 그곳에는 모든 창문에는 철제 방범창이 달렸고 담장 위에는 날카로운 철가시들로 둘러져 있죠. 제가 그곳에 사는 10년 동안 3번의 도둑이 침입했었습니다. 그때마다 제가 물리치긴 했지만 어느 한 날도 방심할 수 없었어요. 밤이 되면 강도나 도둑질에 전념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거든요."

그는 연거푸 조심을 당부했다.

"그렇다면 어느 지역을 조심해야 하고 어떤 사람을 경계해야 할까?"

"도시 전체가 위험하고 모든 사람을 다 조심해야 해요."

아내가 물었다.

"그럼, 너도 조심해야 하는 거야? 그곳에 가면 다시 멕시칼리 사람이 되는 셈이지 않아? "

"하하! 그럴지도요. 특히 가방을 가지고 다닌다면 더 조심을 해야 하고 스마트폰은 밖으로 노출하지 않는 것이 좋아요. 그래야 범죄의 타깃이 되는 것을 줄일 수 있죠. 아무튼 안전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곳은 없어요. 언제나 나쁜 일은 뜻밖에 일어나고 도난 또한 마찬가지죠. 직업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먹고 사는 방편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직업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어요. 평소 가지고 싶었던 물건을 보면 자연히 도덕을 잊을 수 있으니까요."

"우리나라에서는 물건을 보면 마음이 생겨난다,라는 뜻의 '견물생심Seeing is wanting'이라고 하지."

"무엇인가를 보면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은 동양과 서양이 다르지 않은가 봐요?"

막상 멕시칼리국제공항Aeropuerto Internacional de Mexicali 사막 위 활주로에 내렸을 때 내 편도체는 오히려 제 역할을 놓고 있었다. 신뢰하는 아들 같은 청년, 옥스나르를 대동했다는 안심 때문인 것 같았다.

공항에서 나와 시내로 들어오면서 만나게 되는 것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만든 높은 철제 국경 장벽이다. 이 장벽은 2017년 그의 취임과 함께 시행된 국경 장벽 건설 프로젝트의 산물로 그의 강경한 반이민 노선의 가시적 상징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2019년 4월, 칼렉시코를 방문해 새로 보강한 저 철책을 점검하면서 이렇게 말했죠. '미국은 꽉 찼다. 더는 당신들을 받을 수 없다 We can't take you anymore. Our country is full.' 그때 제 여자친구는 칼렉시코의 다국적 배송회사에 근무 중이었는데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저 시스루 기둥 사이로 손을 넣어 강철기둥만을 껴안을 수 밖에 없었지요."

트럼프 장벽은 미국으로 입국하고자 하는 중남미의 다른 이민자들뿐만 아니라 젊은 연인의 사랑도 가로막은 셈이다.

미국행 보행자 전용 국경 검문소Garita Centro Peatonal와 자동차국경 검문소Puerto Fronterizo Mexicali I를 지나자 검문소 아래 첫 동네, 푸에블로 누에보Pueblo Nuevo 지역이 나타났다. 장벽의 한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트럼프가 장벽을 다시 세우기 전에는 담장의 높이가 구간마다 달랐어요. 바로 저 지점이 가장 낮았죠. 저는 이민자들이 저 담장을 넘는 모습을 매일 보았습니다. 넘자마자 모조리 미국 국경수비대에 체포되었죠. 그것은 이곳의 일상이었어요."

골목으로 방향을 바꾼 뒤 말했다.

"저 집 안에는 미국 국경 밑으로 연결된 터널이 있었던 곳입니다. 이 도시에서도 여러 터널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 터널은 보통 마약 운송 루트로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서쪽으로 10여 분을 가자 루이스 도날도 콜로시오Luis Donaldo Colosio 지역이었다. 반파된 집과 쓰레기가 방치된 공터, 그 사이의 골목마다에도 포장마차들이 자리 잡고 끼니를 벌고 있다.

"오른쪽 저 골목으로 들어가면 제 두 번째 여자친구의 집이 있어요. 저곳에서 두 아들을 얻었고 결국 그녀가 저를 내쳤죠."

이번 멕시칼리 여행은 둘째 아들의 다섯 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살았던 동네라고 하니 비로소 이 동네의 온기가 느껴졌다.

쇼핑몰을 나와 주차장으로 가다가 발길을 멈추고 그가 말했다.

"아마 이 주차장 어디쯤이었을 것 같군요. 제가 여자친구와 아이를 태우고 후진을 하려고 하는데 어떤 녀석이 다가와 나를 운전석에서 끌어내 느닷없이 얼굴에 주먹을 날렸어요. 그리고 도망가 버렸어요. 그 일이 왜 벌어졌는지 지금도 알 수 없어요. 저는 코 뼈가 부서졌고 수술 후 한동안 병원에 입원했어야 했어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른 자동차의 블랙박스에 그 장면이 녹화되어 있었고 범인을 잡아 인권위원회를 통해 1만 5천 페소의 치료비를 변상 받을 수 있었죠."

멕시칼리에서 가장 맛있다는 타코집Asadero Acatlán de Juárez으로 갔다. 저녁 9시가 넘었지만 사람들로 꽉 찼다. 이곳의 특징은 개별 메뉴 외에도 일행이 함께 먹을 수 있는 모둠 주문이 가능한 점이었다. 각종 고기 재료와 양념, 토르티야를 별도로 내 주어서 각자의 취향에 맞게 자신만의 타코를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제공 되는 소스의 종류가 다양하고 내용도 충실하죠. 가격이 착해서 서민들 누구에게나 문턱이 낮고요. 드라이브스루도 가능해서 차에서 내리지 않고 포장해 갈 수도 있어요. 여전히 이 도시 최고의 타케리아(Taquería 타고를 판매 가게)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가족들과의 외식은 주로 이곳이었습니다."

사거리 신호 대기 중에 불을 훤히 밝힌 버거킹이 눈에 들어왔다.

"저곳이 두 번째 여자친구를 만난 곳이에요. 그녀는 홀에서, 저는 주방에서 일했어요. 제가 첫째 여자친구에게서 도망친 후 우여곡절을 겪고 난 뒤 겨우 마음을 다 잡고 잘 살아보려고 엄청 노력할 때였죠. 저 가게에서 영업이 끝나고 모든 직원이 퇴근한 뒤에도 제 홀로 남아 패티를 만들던 기름진 주방을 청소한 뒤 새벽에 바닥에서 잠을 자고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하곤 했죠."

테카테에서 돌아오면서 새 빌딩을 지날 때 말했다.

"오, 저 대학이 저를 멕시칼리로 오게 했죠. 새로운 건물이 신축되었네요. 대학으로 바로 연결되는 새로운 고가도로도 생기고요. 저는 더 좋은 대학에서 공부해 더 좋은 수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란 작은 도시, 평화로운 라파스를 떠나 이곳으로 왔었죠. 더 밝은 미래를 위해서 객지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19살의 제게는 공부보다 사랑이 더 쉬웠고 더 급했습니다. 이 도시의 저는 홀로였고 어렸고 외로웠습니다. 대학에서 사랑에 빠졌고 그녀를 만난 몇 개월 뒤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딸아이를 낳고 1개월 만에 그녀로부터 도망쳤어요. 시시각각 변하는 극단적인 그녀의 기분을 도저히 맞출 수 없었습니다. 그녀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제가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저의 모든 날들이 꼬이기 시작했죠."

다음날 그는 그 대학 동기로부터 얻은 딸을 찾아갔다. 그 딸의 엄마는 2개월 전부터 그와 연락을 두절시켰다. 아이가 성장했으니 양육비를 더 올려달라는 요구를 미루고 나서부터였다. 미성년 딸에게 휴대폰이 없으니 엄마만이 유일한 소통 창구였다. 첫째 딸의 생일은 막내 아들과 열흘 차이. 라파스에서 1400km를 온 이번 기회에 딸의 열 살 생일파티를 함께 하고 싶었다. 결국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하지만 딸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을 감당할 수 없으니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무작정 집을 찾아갔다. 대문 밖에서 이름을 부르자 전 여자친구의 남자친구와 딸, 딸의 남동생이 그를 맞았다. 새 남자친구는 이 문제는 자신이 당사자가 될 수 없다며 대문을 열어주는 대신 아들과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집에 없었으므로 성근 철망 담장을 사이에 두고 딸을 마주 볼 수 있음이 다행이었다. 잠시 뒤 철망을 잡고 있는 딸을 향해 먹먹한 가슴에서 나오는 소리로 옥스나르가 말했다.

"아빠 사랑해?"

"응. 많이 사랑해!"

멕시칼리를 떠나는 날 아침은 몹시 숙고 체크아웃으로 분주했다. 옥스나르는 얼굴만 보고 헤어졌던 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라파스로 돌아가면 언제 딸을 다시 볼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다. 아빠를 잊지 않고 있다는 딸의 마음을 확인했지만 쑥쑥 자라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 같은 초조함도 함께 커졌다. 10대로 접어든 딸에게 옷이라도 한 벌 선물하고 떠나고 싶었다. 그동안 몰라보게 자란 딸의 키를 묻는 문자를 엄마에게 보냈다. 매장을 몇 바퀴 도는 동안에도 답변은 없었다. 결국 옷 대신 게임 세트로 품목을 바꾸었다.

다시 방문한 집의 대문은 굳게 잠겨있었고 그의 외침에 어떤 답변도 없었다. 결국 공항으로 가야 할 시간이 임박해 더 지체할 수 없었다. 옆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젊은 부인이 나왔다. 선물을 그 부인께 맡기고 차에 올랐다.

"10분쯤전에 모든 식구들이 집을 나갔데요. 아마 딸의 신체 사이즈를 묻는 문자를 보고 제가 올 것을 예감했던 것 같아요."

그는 딸의 노란 집을 다시 한번 눈에 담고 출발했다.

아빠와의 이별을 서러워하는 형제를 몰 주차장에서 아이들의 외할머니에게 인계하고 차를 공항 가는 서쪽 길로 돌린 뒤 말했다.

"갈수록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사랑해야하는 지는 더욱 모르겠습니다."

우리를 따라오는 트럼프 장벽이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내 배에서 꼬르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오늘 한 끼도 먹지 못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옥스나르에게 물었다.

"배고프지 않아?"

"아니요!"

공항에 가까워질 때쯤 옥스나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이곳에 살 때는 거의 모든 시간 멕시칼리가 미웠습니다. 항상 떠나고 싶었죠. 그런데 정작 이곳을 떠난 뒤부터 이곳이 좋아졌습니다. 제 세 아이들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꼭 그것만도 아닌 것 같아요. 이곳에서 혼란스러웠던 그 모든 시간이 점점 더 그리워지는 것을 보니요."

비행기가 다시 멕시칼리 공항을 이륙하자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인생이라는 답이 없는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숙제에 너무 짓눌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가 함께 했던 이번 여행에서 차를 몇 번 되돌렸듯 막다른 골목에서는 차를 되돌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막다른 골목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방책의 시작인 것이다.


#국경에서의사랑 #옥스나르 #Oxnar #멕시칼리 #멕시코여행 #바하칼리포르니아반도 #세계일주

작가의 이전글 가장 긴 여행을 떠나다, '여행자의 하룻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