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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tif Mar 09. 2024

'Pay it forward'

Ray & Monica's [en route]_129


아마존 배송센터로부터의 전화          



멕시코시티에 40일을 머물면서 멕시코와 치명적인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몇 개월 멕시코에 지내다가 벨리즈와 과테말라를 거쳐 중미, 남미로 내려가려던 마음이 바뀌었다. 이 나라를 다시 느리게, 찬찬히 느끼며 음미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보니 어디에서 다시 시작할까가 다음 물음으로 다가왔다. 그럼 멕시코의 대문으로 가면 되지, 싶은 생각이 들었고 그 대문을 티후아나로 잡았다. 티후아나는 실제 멕시코의 여러 국경 중에서도 입출입하는 사람과 차량이 가장 많은 국경검문소이면서 멕시코의 북서쪽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아내와 나는 멕시코시티에서 미국 샌디에고 샌 이스드로San Ysidro로 간 다음 다시 육로로 티후아나로 입국해 이탈리아 전체 반도만 한 길이의 바하칼리포르니아반도의 남쪽으로 내려왔다.

태평양 연안을 따라 내려오는 동안 예상대로 참 행복했다. 경이로운 자연, 순수한 사람들, 몰랐던 문화... 그러나 외진 반도의 열악한 교통과 숙박을 염려하면서 아열대 사막을 종주하는 일이 육체적으로는 지치는 일이었다.

두 달뒤 이 반도의 남쪽, La Paz에 당도했을 때 에어비앤비를 통해 예약한 곳에서 열흘을 보내고 나니 다시 기운이 돌아왔다. 이 반도의 최남단, 로스카보스Los Cabos를 돌아 코르테스해Mar de Cortés를 건너 본토로 향할 예정이었다. 집을 떠나기 하루 전날, 집주인 옥스나르Oxnar에게 그 계획과 고별의 마음을 전했다. 여러 차례 대화로 마음을 나누었던 아들 또래의 옥스나르와는 그동안 이미 정이 싹튼 사이였다.

"페리를 타기 위해서는 라파스로 되돌아와야 하니 큰 가방을 이곳에 두고 가셨다가 되돌아오셔서 제 생일파티에 참석해 주세요. 그리고 더 계셨다가 가세요."

뜻밖의 제안에 되물었다.

"네 에어비앤비 공간은 모두 예약되었는데 어디에 있으란 말이야?"

"안채에 지금 수리 중인 공간이 있어요. 이곳은 제가 사용하려던 공간이에요. 돌아오실 때까지 마무리해놓겠습니다. "

500평 대지 뒤로 돌아가니 소박한 공간이 있었다. 주방을 겸한 거실도 넉넉하고 구분된 침실도 편리하게 배치되었다. 무엇보다 집안 안쪽이라 길가 소음으로부터 멀고 여우꼬리야자나무를 바라보는 정원 전망도 좋았다.

"이런 곳이라면 며칠이 아니라 한 달은 더 있고 싶구나. 그렇지만 라파스는 월세가 만만치 않은데 내 형편으로는 월세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구나?"

"그럼, 형편대로 하세요!"

그렇게 우리는 되돌아왔고 한 달 예정이 두 달이 되었고 다시 세 달째 접어들었다. 함께 사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서로의 가족과 살림 형편까지 알게 되었다.

그의 안내로 함께한 콘서트와 여행을 찍은 영상을 전해주기 위해 USB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가져온 4GB 용량의 USB에는 동영상 한두 개를 담기에도 모자랐다. 함께한 나들이 길에 100GB USB를 선물했다.

여행길에 선물을 하는 것에는 신중하다. 대부분은 감사편지로 대신한다. 돈이나 물건을 건네는 것은 받는 이를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이 될 가능성에 대한 고민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정도는 그동안 받은 배려들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었다. 영상을 그 USB에 담아 건네고 며칠 뒤에 물었다.

"사진과 영상은 함께했던 친구들에게도 보내주었어?"

"아니요. 제 노트북이 15년이 된 거라 쿨링팬이 고장 났는지 뜨거워지기만 하고 거의 작동이 되지않아요."

그 소리가 며칠간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양육비를 보내지 못해서 딸과 만나지도 못하는 상황을 타개하려면 사업을 키우고 매출을 올려야 하는 형편임을 잘 아는 우리는 컴퓨터 한 대 없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답답했다.

서울의 아이들에게 그 생각을 털어놓았다.

"너희 세명이 그동안 낯선 사람들에게 입은 은혜가 적지 않다. 현재 길 위에 있는 엄마 아빠는 여전히 누군가의 친절 속에 안전할 수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때마다 그들은 'Pay it back(받은 은혜를 당사자에게 돌려주는 것)'대신 'Pay it forward(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하라고 말했다. 영국에서 유학생 영대의 식대를 받지 않았던 식당 주인이 그랬고 홀로 여행할 때 카우치 서핑을 받아준 이들도 그랬다. 이제 우리 차례가 된 것 같다. 노트북이 절실한 옥스나르에게 그 빚을 갚으면 안 될까?"

내 생각은 한국의 컴퓨터를 이곳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상의한 뒤 보내온 답변은 달랐다.

"한국 컴퓨터를 바로 보내면 탁송료도 비싸고 AS도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우리가 '아마존 멕시코AMAZON MX'로 주문할까요?"

그것이 합리적으로 보였다. 배송지 주소를 보내자 둘째 딸이 배송지 우편번호를 물었다. 옥스나르에게 전화해 얻은 우편번호를 그대로 딸에게 전했다.

그날 밤, 우리를 방문한 옥스나르에게 한국의 세 아이들이 네 노트북을 주문했다는 사실과 7일 뒤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아마존 측이 알려온 배송날짜도 전해주었다. 옥스나르는 감격한 표정으로 말을 잊었다. 매일 정원을 오가는 발걸음이 경쾌했다. 마침내 7일째가 되는 날, 옥스나르가 달려왔다.

"아마존에서 전화가 왔는데 노트북이 멕시칼리로 갔데요. 그래서 배달 불가능이라고 하네요. 왜 그렇죠?"

"그럼 주소를 확인해 봐!"

시스템에 기입했던 배송지 주소를 보여주었다.

"맞아요."

"그럼 우편번호는?"

그때야 그가 비명을 질렀다.

"한자가 틀렸어요. 21079가 아니라 23079여야 해요."

딸에게 사실을 알렸다.

"주리야, 옥스나르가 방금 아마존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컴퓨터가 멕시칼리로 갔다는군. 주소는 맞는데 우편번호 오류였어. 멕시칼리는 바하칼리포르니아반도의 가장 북쪽이고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집은 남쪽이거든. 그 컴퓨터는 여기로부터 1400km로 북쪽으로 가버린 거야. 아마존 배송시스템은 지방 물류거점까지는 아마 주소를 스캔하는 것이 아니라 우편번호를 스캔하는 것 같다. 멕시칼리 물류센터에서 배송 담당자가 배송할 주소를 찾아보니 그제야 배송이 잘못된 것을 알게 된 것이지. 멕시칼리는 옥스나르가 10년을 살았던 곳이고 지금도 자녀들이 그곳에 살고 있어서 그의 머릿속은 온통 멕시칼리에 가 있었던 것 같다. 멕시칼리의 배송 담당자에게 주소는 올바르니 그 주소지로 재배송해달라고 부탁하라고 하니, 우편번호는 수신자가 바로잡을 수 없고 주문자만이 바로잡을 수 있다는군. 그러니 네가 다시 아마존 시스템에 들어가서 우편번호를 아래와 같이 바로 잡아다오. 오늘 컴퓨터가 배달될 것을 학수고대했는데 우편번호 한 자리때문에 엉뚱한 곳으로 노트북이 가버려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아! 우편번호는 21079가 아니라 23079 란다. 23079 로 바로 수정해 주길 바란다! 미안해!"

하지만 딸에게 온 대답은 달랐다.

"이미 오배송된 상품은 반품되고 환불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다시 주문해야 해요."

자책하는 옥스나르에게 추가 상황을 설명했다.

"괜찮아. 다시 주문한다고 했으니 걱정할 것 없어! 단지 반품이 완료된 뒤에 다시 주문이 가능하다는군!"

재주문한 송장을 보니 가격도 700페소쯤 올라있고 예상 배송일은 11일 뒤로 늦추어져있었다.

무거워진 옥스나르의 발걸음이 다시 가벼워지려면 열흘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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