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당신은 어떤 이유로?

Ray & Monica's [en route]_235

by motif


패터슨에서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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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 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ᐧ강민지


#1


구태여 버스를 타고 싶었다. 그 운전기사의 마음이 되어 그곳에 당도하고 싶었다. 맨해튼 Port Authority Bus Terminal에서 뉴저지의 대중교통회사에 소속된 버스 161번을 타고 링컨터널을 건넜다. 뉴욕 밖으로 나가는 이 버스에 몸을 맡기자 마음이 더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버스기사는 내 머릿속 그 기사보다는 더 스마트해 보였다. "아 참, 이 버스는 23번이 아니지..." 스스로 착각을 바로잡았다. 그래도 버스가 정차할 때마다 쌍둥이를 둔 부모가 있는지 살피는 나를 깨닫고 속으로 웃었다. 그렇다. 나는 패터슨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버스 속에서 짐 자무쉬의 영화 '패터슨'의 실제 도시 패터슨과 패터슨 버스기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패터슨으로 가기 위해 6시에 잠을 깼다. 패터슨 기사보다 15분쯤은 먼저 일어났지 싶다.


맨해튼에서 불과 30분을 왔을 뿐인데 이렇듯 시골스럽다니... 시골스러운 기사 패터슨이 살만한 느린 도시였다. 내가 저것을 탈까, 잠시 고심했던 기차가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 기차도 그리 빠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행이다. 만약 그 기차가 내가 탄 버스보다 훨씬 바른 것 같았으면 '구태여'탄 버스조차도 후회될 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불러준 이를 좀 더 빨리 만나고 싶은 성급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2


"이곳을 한번 방문하시는 것은 어떠세요? 패터슨(Paterson)인데요. 미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이슬람교인들이 살고 있고 페루에서 온 사람들이 '리틀 리마(Little Lima)'라는 타운을 이루고 있어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온 사람들도 큰 그룹을 이루고 있는 곳이고요. 또한 국립역사공원으로 지정된 폭포가 있어요. 패터슨 그레이트 폴스 국립역사공원(Paterson Great Falls National Historical Park)이라고요."


나는 이분이 없었다면 결코 패터슨을 방문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짧은 뉴욕 체류 기간 동안에 뉴욕 안에서도 나의 호기심을 잡아끄는 곳이 많은 탓이다.


그러나 이분의 메시지를 받고 나는 바로 마음을 바꿨다. 그녀와는 이미 첼시의 갤러리 가에서 짙은 하루를 보낸 터였다. Esther 이영림 선생이다.


에스더님의 메시지는 마치 동네 아이들과 뛰어 놀다 보니 배가 고파진 해거름의 “저녁 먹어라!”는 어머니의 목소리 같다.


그녀가 알려준 집은 우리가 내린 버스정류소뿐만 아니라 패터슨 기차역으로부터도 지척이었다.


#3


허그 후 안내된 곳은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거대한 공간이었다. 공간은 지금까지 막 영화를 촬영하다가 우리가 들어서자마자 잠시 멈춘 듯 신박했다. 갤러리 같기도 하고 라이브러리 같은가 하면 바같고, 거실인가 싶기도 했다가 게임룸 같기도 했다.


"ㅎㅎㅎ 놀랄 것 없어요. 팬데믹이 이 공간을 낳았답니다. 그전에는 우리 회사에서 사용하던 창고였어요. 이제 물류가 좋아져서 이렇게 큰 창고가 필요 없어져서 한동안 비어있었는데 마침, 팬데믹으로 문을 열지 못하는 시간이 온 거예요. 그때 지금이다, 싶어 이 공간을 이렇게 바꾸어 본 겁니다. 우리 가족들의 이벤트공간이자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죠. 이곳에서 결혼식을 비롯한 각종 가족행사도 했고요. 우선 무엇으로 드실래요? 커피나 음료?"


그녀는 바로 고혹적인 커피향을 만들어냈다.


"이 바의 위층인 DJ box는 원래 목사님의 설교 강단이었다고 해요. 그러니까 원래 이 공간은 교회였던 거지요."


교회에서 창고로, 창고에서 다목적 문화공간으로 건물의 용도가 변화하는 모습이 우리 인생의 여정과도 닮았다.


"이 공간이 이렇게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작은아버님과 제 남동생의 공력이 커요. 작은아버님은 거의 프로 목수 수준이고요, 동생은 감각이 은근 프로 입입니다."


자신의 역할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건축을 전공한 에스더님이 아트 디렉팅을 맡았으니 이렇듯 다양한 색깔을 포용하면서도 조화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저 그림은 제 친구 소현이의 작품이고요 이 그림들은 좀 사연이 있습니다. 저희 어머님의 지인분이 그림밖에 모르는 화가이셨는데 그 분이 신앙생활에 몰두하시면서 붓을 놓고 그림을 저희 창고에 맡기셨습니다. 십 수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보인의 창조활동보다 더 큰 창조주의 공부에 몰입하고 계시는 이유로 그림이 여전히 이곳에 있을 수밖에 없게 된 거예요. 그리고 저 모서리의 첼로는 첼리스트인 제 지인의 가족분이 제게 준거에요. 2011년 한국 대통령이 오셨을 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백악관 국빈 만찬을 비롯해 중요한 장소와 행사에서 공연을 했었었죠."


서가의 장서 속 사람들뿐만 아니라 공간은 사람들의 사연들로 빼곡했다.


에스더님은 우리 부부를 패터슨 영화 속 폭포로 안내했다. 나는 에스더님과 아내를 그 폭포를 배경으로 서게 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금 옆으로 움직이게 하고 울타리도 넣어 다시 찍었다. 이번에는 그런대로 흡족했다. 내 머릿속에는 자꾸 패터슨이 앉았던 구도가 각인되어 있었음을 알고 메리 엘렌 크레이머공원(Mary Ellen Kramer Park)으로 걸어가면서 두 사람에게 사실을 고백했다.


폭포 위로 가자 소리는 나이아가라폭포 같은 천둥소리를 냈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의 5부작 서사시 '패터슨'에서 처럼...


"이 퍼세익 폭포는 미시시피강 동쪽에서 수량 기준으로 나이아가라 폭포에 이어 두 번째로 큰 폭포라고 합니다.“


에스더님이 말했다. 어쩐지... 사실 폭포의 상류에서 본 퍼세익 강(Passaic River)강의 수량은 상당했다. 눈을 감고 소리로만 구분하라면 나이아가라 폭포와 구분하기 어려울 것 같다.


#4


점심 식사를 위해 우리를 안내한 곳은 알바샤(Al-Basha, الباسا)라는 정통 중동 요리를 내는 중동 레스토랑이었다.


"이 도시에 2개의 알바샤가 있어요. 우리는 파인 다이닝을 전문으로 하는 이곳이 아니라 테이크아웃하거나 배달을 하는 다른 곳에서 자주 픽업해먹어요. 저희 입에 잘 맞는 음식이거든요."


이미 중동 음식에 경험이 많은 그녀가 다양하게 주문을 했다. 우리를 패터슨으로 부른 이유에 이 도시의 다문화 환경에 대한 노출뿐만 아니라 이 중동 음식점을 경험하도록 하고 싶었던 뜻도 있었지 싶다.


알 바샤 메자(Al-Basha Mezza 여러 종류의 스프레드spread)에 열중하고 있는데 믹스 마샤위(Mix Mashawi 고기구이 모둠)가 나와서 놀랐다. 샐러드와 피타 (Pita)에 발라먹는 여러 종류의 전채 스프레드만으로 충분한 비건 식사가 될 만한데 양고기, 닭고기, 소고기의 마샤위는 반도 먹지 못할 만큼 푸짐했다. 시원한 민트 레모네이드(Mint Lemonade)가 이렇게 맛있는 줄은... 친절한 매니저와 에스더님이 스프레드 하나하나를 설명해 주었지만 낯선 이름을 다 기억하는 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분위기도, 비건 옵션을 포함한 메뉴도, 손님도, 깍듯한 스텝들조차 모두 트렌디한 모습의 레스토랑을 나와서 이미 메시지로 밝힌 중동, 페루, 도미니카의 커뮤니티들을 돌았다. 각기 자신의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제각각이지만 모두들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면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모습들이 역력했다.


패터슨 시에서는 이곳 페루 인구를 약 3만 명 가까이로 추정하고 있고 Market Street 주변에는 음식점, 베이커리, 여행사 등 이들의 사업체와 문화가 집중되어 있으며 시의회에서 그 거리의 일부를 Peru Square로 지정했다. 매년 열리는 패터슨 페루 퍼레이드는 이 시의 중요한 연례행사이다.


우리가 식사를 한 알바샤는 팔레스타인 라말라(Ramallah, رام الله)에 기반을 둔 중동식을 내고 있다. 이곳은 서안 지구(West Bank)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사실상 수도이다. 패터슨 시의회는 2023년 5월 15일, 메인 스트리트(Main Street)의 5블록 구간을 '팔레스타인 웨이(Palestine Way)'로 명명했다. 약 5개월 뒤쯤인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전쟁이 발발했다. 올해 9월 22일, 이스라엘군이 라말라에 있는 알자지라(Al Jazeera) 지국을 급습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관할하에 있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군의 작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5


영화 속 시인의 마음으로 온 패터슨의 거리에서 잠시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러나 다시 에스더님의 공간으로 돌아와 커피를 한잔 마시자 머리가 맑아졌다.


작은아버님과 동생까지 함께 유쾌한 웃음으로 과거를 반추했다.


에스더 일가가 모두 미국으로 건너오게 된 것은 할머니의 모험 때문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노동 프로그램의 일부인 간병인(caregivers)이나 유모(nannies)로 여성들이 미국으로 건너왔는데 당시 할머니께서 이 프로그램의 유모로 지원을 한 것이다. 한국에 남편과 자식을 두고 지구 반대편으로 떠날 용기를 낸 것이다. 할머니의 모험은 결국 오늘날 모든 일가가 좌초 없이 태평양을 건넌 단초가 되었다.


에스더 가족들과 페루인들과 도미니카인들과 팔레스타인들과 유대인들과... 그리고 길 위에 있는 우리 부부조차도 모두 어쩌다 흩뿌려진 디아스포라(Diaspora)임에 틀림없다. 추방된 디아스포라인지, 제국의 디아스포라인지, 비즈니스를 위한 디아스포라인지, 노동을 팔기 위한 디아스포라인지, 유목 디아스포라인지만 다를 뿐이다.


에스더와 작은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퀸즈로 바로 가는 셔틀에 오른 뒤에도 오랫동안 떠나지 않았다. 우리부부가 여러 번 손을 흔들어 인사를 반복한 것이 '먼저 가시라'라는 의미인 줄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화에서처럼 일주일간의 패터슨은 아니더라도 나에게 패터슨에서의 하루는 잔잔했지만 몇 번의 감정 파도가 휘몰아친 날이었다. 언제 나는 사람을 보고도 태연했던 패터슨의 살찐 그라운드호그(Groundhog)처럼 천연스러울 수가 있을까?


●이민 1.5세대, Esther 이영림


https://blog.naver.com/motif_1/223599445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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