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 & Monica's [en route]_238
*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 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ᐧ강민지
#1
지난 10월 5일, 뉴욕 맨해튼에서 뉴욕 한인회가 주최하는 '2024 코리안 퍼레이드ᐧ페스티벌(2024 Korean Parade & Festival in NYC)'이 개최되었다.
퍼레이드는 낮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 6th Ave((Avenue of the Americas) 와 38th St~27th St에서 펼쳐졌다. 팬데믹으로 5년 만에 재개되었다.
페스티벌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맨해튼의 코리아타운으로 불리는 West 32nd St의 5th Ave에서 Broadway까지 차량이 통제되고 거리 위에 설치된 공연 무대와 부스들에서 다양한 행사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공연을 즐기거나 도로 양편의 기업과 단체의 홍보부스와 먹거리 및 체험부스에서 K-Culture의 다양한 궁금증을 대화와 체험으로 풀 수 있었다.
West 33rd St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과 맞대고 있는 이 거리는 1980년대 후반부터 한인 가게들이 집중되기 시작해 현재는 한식당, 베이커리 카페, 주점 등 한국의 먹거리뿐만 아니라 네일숍, 마트, 병원, 은행, 보험사, 여행사 등 한인들의 생활에 밀접한 업종들의 한글 간판으로 빼곡하다.
우리 부부는 미드타운 맨해튼의 차 없는 거리를 달뜬 마음으로 거닐며 가장 다문화 된 사회인 뉴욕에서 한국을 느끼는 설레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의 한인 행사는 최초의 이민자가 이곳에 발을 딛고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겹으로 쌓인 시간의 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연히 이곳에 있지만 그것이 우연일까 또한 의심했다.
맨해튼 32가에서의 삶이 고물가의 터전에서 아파도 가게의 문을 열어야 했던 나름의 절박한 처지를 감당해온 결과로 여겨졌다.
1980년대에 이민 와서 그런 노동으로 살다가 얼마 전에 은퇴한 한 이민지가 말했다. "미국 땅에 내렸지만 미국의 문화도, 미국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그렇다고 문화를 배우겠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닥치는 대로 일해서 생계를 해결하면서 현장에서 부딪히며 배워야 했죠. 처음에는 몰라서 내 몫을 뺏기고 몰라서 되찾을 수 없었어요. 한국의 가난과 실업을 피해 11명이 함께 왔었는데 결국 9명이 한국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이민 온 분의 정착률은 약 18%인 셈이다.
뉴욕의 첫 한인 이민자는 한국의 최초 여성 의사로 알려진 에스더 박(Esther Park 본명 김점동)과 박여선 부부로 알려져 있다. 에스더 박은 의료 선교사이자 교육자인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의 통역과 조수로 지내면서 의사의 꿈을 갖게 되었고 그의 도움으로 9살 연상의 박여선과 혼인한 후 19살이던 1895년 함께 뉴욕 땅을 밟았다. 당시 조선의 사회적 여건상 아버지는 미혼의 여성이 홀로 외국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로제타 셔우드 홀의 고향인 뉴욕 리버티에 정착해 리버티공립학교에서 고교 과정을 배우고 1896년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해 1900년 5월 졸업함으로써 의학 학위를 받아 의사가 되었다. 남편도 함께 의학 공부를 했지만 부인의 졸업을 3주 앞둔 때에 폐렴으로 숨졌다. 의사가 된 에스더 박은 졸업한 해에 5년간의 미국 생활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가 서울과 평양에서 환자 치료에 전념하다가 남편과 동일한 폐렴으로 1910년, 34세에 생을 마쳤다. 이 부부의 미국 사연은 미국 입국 당시부터 미국 여러 신문에 소개되었다. 에스더 박 부부의 뉴욕 도착해를 기준한다면 뉴욕의 한인 이민은 올해로 130년이 되는 셈이다.
#2
한국을 떠난 사람들 중에는 좀 더 나는 삶을 찾아 떠나왔지만 또 어떤 이는 한국에서 거의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새로운 터전에서 제로 베이스로 시작하기 위해 온 이들도 있었다. 그러므로 뉴욕 한인들의 삶은 새롭게 구축하거나 복원하는 것에 가까웠다.
아내가 무대 앞 관객석에서 공연을 즐기는 동안, 나는 32가 한인 가게 몇 곳을 방문했다.
세계를 휩쓴 K-pop과 K-movie의 이미지들이 곳곳에서 소비되고 있었다. 그 익숙함 때문에 나도 맨해튼에서 생경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서점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곳도 있었다. "이 비싼 임대료의 맨해튼에서 책을 팔아서..."라는 불가사의한 의문에 사로잡혔다. 주요 매대를 채우고 있는 것은 K-pop의 상품들이었다. 도서들은 구간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곳의 독자들에게 맞게 잘 큐레이션 된 도서목록을 통해 맨해튼의 트렌드를 감각할 수 있기를 바랐던 기대와는 달랐지만 물가 위협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하는 투쟁의 결기로 읽혔다.
아내와 함께 부스들을 살폈다. 한인회사의 홍보부스와 요식업체들의 부스들이 많았지만 한국에서 온 서울경제진흥원과 하이서울기업들, 동해·독도 홍보관과 종교단체의 부스도 있었다.
대한불교조계종 부스에서는 진용스님께서 열심히 '2024년 한-미 전통불교문화교류 ; 마음의 평안, 세계의 평화'에 대해서 알리는데 애쓰고 계셨다. 하루 전날 한국에서 오셨고 아흐레 동안 이어질 밭은 스케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차에도 불구하고 시종 밝은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았다. 비구니 스님의 경쾌함은 "Why so serious?"라고 묻는 법문 같았다.
짜장면을 팔고 있는 부스가 있었다. 집을 오가는 버스 속에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베이사이드의 '넌짜장난짬뽕'이라는 한글 간판만 보아도 입안에 군침이 돌곤 했다. 이번이 그 소원을 풀 기회다 싶었다. 아내는 다른 것을, 나는 짜장면을 주문했다. 그릇이 비어갈 때쯤 주방을 담당하신 남편께서 물었다. '면을 더 드릴까요?'라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면이 아니라 온전히 한 그릇이 더 나왔다. 겸연쩍어하는 내 표정에 "여행 중이시죠? 여행자는 늘 배가 고프니까요." 사실 더 고된 여행 중인 사람은 우리 부부보다 이 부부의 삶의 여정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덤으로 준 짜장면 한 그릇까지 깨끗이 비우고 일어서면서 맨해튼 삶의 고된 여정 중에도 한국인의 토속적인 정을 그대로 간직한 이 부부에게 느낀 마음을 전했다. "특출한 짜장면의 맛이 어디에서 비롯되어나 싶었더니 부부의 행복한 동행과 협업에서 비롯되었군요. 그러니 이 맛을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octo.nyc )" 식사 동안 부부가 일하는 태도를 지켜보면서 내 마음에 고인 말이었다.
결국 개인의 삶으로 돌아가보면 자신을 충만하게 하는 순간들은 경연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몫을 충실히 살아온 시간들일 성 싶다. 그 무대가 한국이거나 미국이거나 또 그 어디이거나...
돌아오는 지하철역에서 마주친 어린 소녀가 독도의 모형에 색을 칠하는 체험행사에 참가했던 자신의 독도 작품을 들고 있었다. "이 섬의 이름을 알아?" 소녀에게 물은 질문의 대답은 그녀의 아빠가 부스에서 받은 영문 독도 만화 책자를 보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오늘 축제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딸과 함께 나왔어요. 집에 가서 이 책자를 딸과 함께 읽으려고요.”
●미주한인 이민 140년을 되돌아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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