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 & Monica's [en route]_323
*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ᐧ강민지
#1. 종려주일
4월 13일 일요일, 새벽에 눈을 떴다. 거리는 이미 사람들로 북적였다. 손에는 종려나무 잎을 다듬어 넣은 꽃다발이 하나씩 들려있다. 십자가, 예수상이나 성모상이 꽂힌 꽃다발이다.
예수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종려주일(Domingo de Ramos, Palm Sunday)로 성주간이 시작되는 날이다. 십자가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군중은 겉옷을 벗어 나귀 앞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환영했다. 종려주일부터 부활절(20일 일요일) 전날인 성토요일(Holy Saturday)까지가 성주간(Semana Santa, Holy Week))이다.
안티구아 도시 전체가 들썩인다. 성당의 종소리가 더 높고 두 블록 옆에서는 대포 소리 같은 폭음이 계속 들린다. 성주간 프로세시온(행렬, Procesión de Semana Santa)를 알리는 소리이다.
오늘 하루만 해도 예수상을 거대한 가마인 '안다스(Andas)'에 올리고 도시의 골목 골목을 도는 프로세시온이 5개나 열린다. 도시의 각기 다른 성당에서 예정된 골목을 도는 이 행렬은 참여 인원이 수천 명이라는 점에서 상상이 되지 않는 규모이다.
나는 그중에서 가장 큰 프로세시온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라 메르세드 성당(Iglesia de La Merced)으로 향했다. 이 성당은 메르세드 수도회(Orden de la Merced)의 신앙과 활동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안티구아에서 역사적·문화적·종교적으로 가장 상징적인 성당이다.
도심의 도로는 이미 교통이 통제되어 도시 외곽의 주차장과 도심을 연결하는 전기셔틀버스만 오갈 뿐이다.
#2. 나사렛 예수(Jesús Nazareno)
아침 8시부터 자정까지 16시간 계속될 행렬의 출발지인 라 메르세드 성당 주위는 군중으로 뒤덮여 한 발짝 들일 공간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주변의 옥상까지 인파로 점령된 상태였다. 성당 입구의 큰 영상 모니터에서 성당 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성당의 ‘나사렛 예수(Jesús Nazareno)'상은 이 도시의 신자들에게 가장 깊은 신앙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안티구아 프로세시온의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다.
1654년 조각가 마테오 데 수니가(Mateo de Zúñiga)가 제작한 바로크 양식의 이 성상이 1655년에 이 성당에 안치되고 추종자가 너무 많아 스페인 당국이 폭동의 두려움 때문에 옮겨졌다가 다시 돌아옮으로서 더욱 상징적인 성상이 되었다. 성당의 힘이 자라는 것을 국가의 권력이 두려워한 것이다.
1717년 후안 바우티스타 알바레스 이 톨레도(Juan Bautista Álvarez y Toledo) 주교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 최초로 축성되었다. 시에서는 이 성상을 도시의 '보호자이자 변호자'로 공식 선언했으며 지진, 전염병, 화재, 홍수 등 재난으로부터 도시를 지키는 수호자로 여겨졌다. 신자들도 개인의 환난 앞에서 이 성상 앞에 무릎을 굵고 극복을 간구한다.
도로 모서리 섬돌 위에서 까치발로 안다스 위, 금실로 수를 놓은 초록색 튜닉 (tunic)을 입은 성상이 거대한 군중의 중앙을 지나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성모의 안다스가 장송 행진곡과 함께 예수 성상을 뒤따랐다. 절로 경건한 마음이 된다.
군중이 어느 정도 흩어진 뒤에야 성당에 다가갈 수 있었다. 성당 앞에서 '루나 예나(Luna Llena)'라는 극단에서 예수의 삶을 재현하고 있다. 종탑의 종이 오랫동안 울린 뒤 성당 안에서는 미사가 시작되었다.
#3. 알폼브라
성주간의 이 도시를 경이롭게 만드는 또 다른 요소는 나사렛 예수의 행렬이 자나는 도로에 만들어지는 알폼브라(Alfombras, 카펫)이다. 이는 안티구아의 가장 독특하고 상징적인 문화적 요소로 색색의 물들인 톱밥, 꽃, 과일, 채소 등 자연 재료를 사용해 하룻밤 사이에 도로 위에 거대한 그림이나 기하학적 문양을 정교하게 만든 것이다. 프로세시온이 밟고 지나가도록 하는 예수님에게 올리는 가장 정성스러운 헌물(offering)이다.
가족이나 공동체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만드는 이 거대한 경배와 감사의 퍼포먼스는 안티구아 성주간 행렬의 시각적 하이라이트이다.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에게 이 알폼브라 제작 과정을 안내하고 설명하느라 여행사들의 가이드들이 총동원되고 여행자들은 이 경이로운 광경을 사진에 담느라 여념이 없다.
우리 숙소 주인 마틸다는 올해 들어 벌써 3번째 알폼브라를 만들었다. 이번 알폼브라를 위해 정원의 고무나무 가지와 로즈마리 가지, 야자수 잎을 잘랐다. 가장 아름답게 핀 헬리코니아 로스트라타(Heliconia rostrata : 별칭 바닷가재발톱꽃(Lobster Claw flower))꽃 세 송이도 모두 잘랐다. 가장 귀한 것들을 아낌없이 내 놓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물론 꽃시장에서 미리 꽃을 사다 놓기도 했다. 모든 식구들이 동원되어 몇 시간에 걸쳐 거대한 꽃과 식물의 카펫을 만들었다.
아침 8시에 성당을 출발한 이 프로세시온은 밤 8시가 되어서 숙소 앞에 당도했다. 모두 힘을 합쳐 알폼브라를 만들었던 사람들이 연도에 서서 성호를 그었다. 이 행렬은 아직 가지 못한 골목들을 두루 지나 자정쯤에 다시 성당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4. 영적 시간
이 도시에는 장애를 가진 이들이 유독 많다. 듣지 못하는 이, 말하지 못하는 이, 다리를 사용할 수 없는 이... 그들은 사연을 적은 종이를 돌리거나 들고 시내 치킨 버스 속에서, 길모퉁이에서, 카페의 입구에서 구걸을 한다. 그런데 복잡한 치킨 버스에서도, 카페 주인도 그들을 귀찮아하지 않는다. 지나가는 원주민 대부분은 동전 하나라도 건네고 지난다. 그들도 결코 넉넉해 보이는 이들이 아니다.
분명 부모 세대보다 내 세대에, 10년 전보다 지금 훨씬 넉넉하게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타인의 사정에 귀를 닫고 자신에게 더 집착하는 것 같다. 모든 관심이 나와 우리에게만 맞추어진 미래의 풍경은 어떨지,
18세기 지진으로 폐허가 된 이 도시의 무너진 바위 더미에서 돋는 새싹 같은 마음의 순은 자신의 귀중한 것을 봉헌하고 헌신의 마음을 끊임없이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서 돋아난 것이 아닐까 싶다.
성주간을 수난주간(la Semana de la Pasión)이라고도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에 기억하는 것이다. 지금 안티구아 세마니 산타의 거리는 '너'에게 마음을 맞춘 헌신으로 가득하다. 알폼브라의 바다 위를 항해하듯 나아가는 나사렛 예수의 안다스, 어둠 속 안다스를 따르는 수천 명의 묵묵한 발걸음, 수백 개 향로(Thurible)에서 만들어진 숯의 연기와 향의 향기, 마야인의 피리 소리... 이 모든 것이 내게는 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