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 & Monica's [en route]_325
*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ᐧ강민지
#1
안티구아에서의 시간은 성(聖)과 속(俗의 구분이 불분명하다. 지극히 세속적인 것 같지만 그것이 종국에는 신과 연결되는 삶이다.
수많은 성당과 수도원의 물리적 공간은 세속을 초월하는 경계 너머의 세계를 추구하는 곳이면서 대중들에게 그 너머의 세상을 이해하고 확신하게 하는 난제를 풀어야 하는 의무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세속의 삶에서 감수하고 있는 일상의 고통을 보상받을 수 있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내세를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그 방법으로 종교는 그림과 음악을 동원해왔음을 안티구아의 화려하고 장엄한 프로세시온(Procesión 행렬)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프로세시온에 앞서 예배의 중심공간인 성당 본당의 모든 집기를 치우고 단 하루 '벨라시온(Velación)이 만들어진다. 이는 '경배' 혹은 '제사'를 의미하는 스페인어이지만 이곳의 사순절과 성주간 가톨릭 전통에서는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를 기리기 위해 일시적으로 특별하게 성상 이미지를 장식한 제단(祭壇)를 가리킨다. 이날 하루 본당은 마치 오페라극장처럼 꾸며지며 성경 속 특정 상황을 재현하는 아름답고 장엄한 모습으로 연출된다. 평상시에도 성당의 내부는 정교한 성상의 조각과 그림의 전시장이기도 하다.
성주간 성당에서는 콘시에르토(Concierto de Marchas Fúnebres )라는 장송 행진곡 콘서트를 연다. 이 모든 행사에 긴 대기 줄이 생기고 주변은 일시적으로 튜닉(tunic) 같은 전례복이나 소품들 파는 행상과 먹거리를 파는 포장마차가 집결하는 큰 장터가 만들어진다.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조각상과 온갖 장식을 올린 안다스(Andas)는 수십 m 길이의 드라마틱 하게 구성된 미술 세트이다. 연도의 군중들에게 절로 삼가는 마음이 우러나고 경배의 마음이 솟구치도록 해야 하는 것이 이런 종교미술가의 역할이다. 그 뒤를 뒤따르는 브라스 밴드의 장엄한 장송행진곡은 안다스 위의 성상에 이미 몰입된 감정을 고조시킨다.
내세를 더 잘 살려면 현세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설득해야 하는 일이 보통 어려운가. 모두가 '나'를 위해서 사는 삶에서 '남'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것을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2
나는 그리스도학교성당(Iglesia Escuela de Cristo)에 방심한 마음으로 들어갔다가 거대한 벨라시온 제단화에 압도되는 감동을 받았다. 우주에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성모를 조우한 감격스러운 감정이 밀려오면서 절로 '아멘'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단지 몇 장의 그림으로 이런 극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화가의 창의적 그림의 힘이 놀라웠다. 63세의 종교화가, 도밍고 히메네스(Domingo Oswaldo Jiménez Lppez)는 이런 역할을 해온 화가이다. 그리스도학교성당에 인접한 그의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당신의 그림은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붓을 드는 자세도 다를 것 같습니다?
"먼저는 신에 대한 믿음이죠. 그리는 일은 그다음입니다. 즉 예술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종교화를 그린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20대 초반부터이니 약 40여 년이 된 셈이군요."
-이 그림을 시작한 계기가 있었나요?
"어릴 적부터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격려가 결국 이 길로 들어서게 했죠. "
-종교화의 소재와 주제는 제한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성경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그러나 성경 자체는 방대한 이야기의 모음이기 때문에 끝없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성당이나 수도원의 어떤 목적이냐에 따라서도 다양한 창의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이 작업에서 어려운 점은?
"대중이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스러운 삶을 그리지만 관람자 스스로 성스러운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어려움이죠."
-이 작업의 보상은?
"숙제를 풀고 마침내 제단에 걸릴 때 지난 번민이 사라지는 기쁨이 있습니다. 또한 제가 좋아하는 일로 가정을 꾸릴 수 있는 금전적 혜택도 감사한 일이죠."
-당신의 그림이 여러 성당에 소장되어 있습니까?
"많은 성당을 위해 작업해왔죠. 대부분의 작업은 특히 제단화의 경우는 하루 동안만 설치된 후 철거되는 '덧없는 예술(Ephemeral art)'입니다."
'덧없는 예술'을 통해 '영원한 삶'을 표현하는 그의 작업이 유일하게 불변하는 아름다움을 '신'으로 여겼던 기독교가 물리적 아름다움을 덧없는 것으로 간주했던 것과 상통한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당신은 은퇴를 생각해 본 적이 이나요?
"예술은 제게 열정 자체입니다. 제 인생이 끝날 때까지 그림을 그릴 계획입니다."
'예술의 덧없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열정을 고수하고자 하는 그의 각오가 인간의 위대한 건축물들이 한낱 돌덩이로 되돌아간 지진의 잔해 속에서도 가장 귀한 것을 신에게 바치며 찬양을 멈추지 않는 안티구아의 갑남을녀와 다르지 않다.
벨라시온에서 제단화 앞에는 톱밥과 꽃과 과일로 만들어진 경이로운 알폼브라(Alfombra, 카펫)가 만들어진다.
이는 티베트 불교에서 수도승들이 색 모래를 사용하여 며칠 또는 몇 주에 걸쳐 정교한 패턴을 완성한 뒤 스스로 파괴해버리는 모래 만다라와 흡사해 보인다. 무상(無常)과 덧없음의 너머를 지향하라는...
-종교화를 제외하고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나요?
"세계 여러 곳의 자연 풍경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동안 어느 나라들을 여행했나요?
"과테말라를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어느 나라를 여행하고 싶나요?
"전 극동의 문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해서 아름다운 문화와 신화를 가진 한국과 일본을 가보고 싶어요."
나는 자주 신에게 시비를 거는 방식으로 질문해왔다.
"당신은 무슨 이유로 지진으로, 쓰나미로 가난하고 비루할 삶을 응징하나요? 왜 전쟁이나 범죄로 힘을 키운 이들을 더 높이 세우나요?"
나는 아직 그 시비에 대해 답을 받은 바 없다. 무례한 놈이라는 꾸지람도 천국에 큰 뜻이 있다는 속시원한 해명도 듣지 못했다.
평생 그림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한 예수를 묵상했을 도밍고를 통해 신에게 직접 듣지 못한 답을 들을 수도 있겠다, 싶었던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의 작업실을 나왔을 때 한편으로는 다행이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의단은 여전히 순례를 계속할 이유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성금요일, 대단한 규모의 프로세시온이 다섯 성당에서 진행된다. 한동안 분화가 관찰되지 않던 푸에고 화산(Volcán de Fuego)은 검은 화산재 대신 흰 증기를 뿜기 시작했고 안티구아의 자갈길 마다에 무릎을 꿇고 알폼브라를 만들고 있다.
도밍고가 메시지를 보냈다.
"인류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순종으로 생명을 바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성금요일입니다. 그의 죽음이 우리의 삶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Good Friday commemorates the death of our Lord Jesus Christ, who gave His life out of love for humanity and in obedience to His Father. May His death serve as a moment for reflection and give a new direction to our lives).
안티구아의 하늘과 땅은 변함없이 참회와 순종, 헌신으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