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 & Monica's [en route]_327
*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ᐧ강민지
#1
멀리서 폭음 소리가 들렸다. 산호세 대성당(Catedral San José)에서 부활을 축하하는 아침 9시의 부활 프로세시온(Procesión 행렬)을 알리는 환희의 신호였다.
3시간 정도 도심을 도는 부활하신 예수를 모신 안다스(Andas 운반 플랫폼)는 꽃으로 소박하게 꾸며졌다. 안다스를 메는 이들도 쿠쿠루초(cucuruchos 남성 운반자)와 까르까도라스(cargadoras 여성 운반자)가 함께 참여했다. 밴드도 시니어의 타악기 주자로만 구성되었다. 삼갔던 불꽃과 폭음을 사용하는 마야식 축하도 되살아났다. 총독궁(Royal Palace of the Captains General) 앞에서 한 청년이 콘페띠(confetti 색종이 조각)을 뿌렸다. 슬픔은 장엄하게 기쁨은 박소하게 꾸리는 프로세시온이 특징이다.
성주간과 부활절의 마지막 프로세시온은 유니언 공원(Parque Union) 옆 '산토 에르마노 페드로 성당(Iglesia Santo Hermano Pedro de San José Betancur)'에서 꾸렸다.
의료 및 사회 복지 기관인 '산토 에르마노 페드로 사회사업재단(Obras Sociales del Santo Hermano Pedro)'과 함께 있는 성당이다. 이 사업단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병원이다. 스페인과 캐나다, 미국에서 온 자원봉사 의료진들이 진료와 수술을 제공하는 병원으로 형편에 따라 거의 무료이거나 최소한의 처치 비용으로 치료를 제공하고 있다. 과테말라 전역에서뿐만 아니라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에서 치료를 받으러 온다.
이 성당과 병원의 기원은 페드로 데 산 호세 베탄쿠르(Pedro de San José Betancur)는 1626년에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의 테네리페 섬에서 태어나 24세에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로 과테말라로 이주해 1667년 사망할 때까지 병자와 고아, 노인을 돌보는 일로 일생을 헌신했다. 2002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된 에르마노 페드로는 '아메리카의 프란치스코'로 불리는 자선과 봉사, 겸손과 희생의 상징이다.
1시에 교회를 떠난 '성 베드로 사도 성당의 프로세시온은 병원에서 자선 공연으로 모금하는 봉사를 하고 있는 에드윈 베자라노(Edwin Bejarano) 가수를 비롯한 에르마노 페드로 성인의 헌신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남녀노소가 차례로 참여한 안다스 운반자들에 앞섰고 그 앞을 마야인들의 전통복장을 한한 무희들의 춤사위로 길고 긴 톱밥과 꽃의 알폼브라(Alfombra) 길을 열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의 사순절과 성주간, 부활절의 기도와 묵상, 구원의 장엄한 의식은 끝이 났다.
#2
부활절 다음날,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013년 콘클라베에서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프란치스코’라는 교황명을 선택했다. 13세기 '가난한 이들의 성인'으로 불리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본뜬 이름이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힘없고,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을 부드러운 사랑으로 끌어안는 것이 교황이 해야 할 일이다."_프란치스코 교황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이민노동자의 아들,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Jorge Mario Bergoglio)에서 12년간 교황직을 수행하면서 프란치스코 이름을 택했던 뜻으로 일관했다.
테네리페 섬의 목동이었던 페드로 데 산 호세 베탄쿠르가 안티구아로 온 뒤 벨렌 수녀원 근처에 초막 병원을 짓고 거리의 병자들을 안거나 업어와 치료받도록 했다. 그는 자신이 돌보고 있는 사람들의 누더기 옷을 입고 그들을 돌보기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종을 울리며 거리를 누볐다. 그는 성 에르만도 페드로(Santo Hermano Pedro)로 이 도시에 남아 여전히 헐벗은 자와 병자를 수호하고 있다.
"한 사회가 얼마나 위대한지는 그 사회가 궁핍한 이들,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통찰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에 빗대어보면 자신의 휴가를 활용해 오는 의료진들이 있고 돈이 없이도 치료받을 차례에 줄을 설 수 있는 병원이 있는 안티구아는 위대한 사회의 초석이 놓인 셈이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부터 부활절까지 46일간의 시간을 통해 18세기 도시, 안티구아에서 하늘을 가슴에 담고 사는 삶에서 일상과 기도를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주간은 그 삶을 총체적으로 리뷰하고 기도와 어긋난 삶의 각도를 다시 조율하는 시간이었다. 마치 지구 자전의 불규칙성 때문에 발생하는 오차를 보정하기 위해서 해마다 윤초가 추가되듯...
나의 궤도를 떠나온 곳에서 사랑의 궤도를 이탈하지 않기 위해 이렇듯 조바심 내는 사람들을 만났다. 내내 부활을 기뻐하다가 마침내 스스로 부활하는 사람들이 인생을 통체로 바꾸고 싶다면 사랑하라고 온 도시의 퍼포먼스로 말했다. 사랑은 꽃길이 아니라 꽃길을 가꾸어 가는 그 자체임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마침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이 거대한 안티구아의 성주간에 함께한 시간의 행운을 통해서 사랑은 가장 강력한 혁명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는 없어도 한 발 한 발 사랑 쪽으로 나아갈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