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난 좀 잘 컸다."

Ray & Monica's [en route]_329

by motif

모두 사랑

[꾸미기]20250420_100615tt.jpg



*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ᐧ강민지


#1


샌프란시스코 대성당의 흰색 파사드는 갓 산을 넘어온 아침 햇살을 받아 한결 해말갛다. '십자가의 길(La Via Crucis)'을 향해 걷고 계신 연로한 수녀님의 발걸음에서 기도와 봉사와 헌신으로 일관하신 에르마노 페드로(Santo Hermano Pedro) 성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평생을 병자와 함께하며 고통을 통감하고 치유를 위해 헌신한 성에르마노 페드로의 무덤이 있는 샌프란시스코 대성당은 기적과 치유를 기원하는 신자들의 순례지이다. 무덤은 기도하는 이들의 간절함으로 둘러싸여 있다. 에르마노 페드로 박물관(Museo del Hermano Pedro)에 가득한, 병자가 회복한 기적의 흔적들은 기적이 아니라 기도의 힘으로 여겨졌다.


안티구아 부활절의 아침은 여느 날처럼 고요했다. 세마나 산타(성주간)의 수많은 군중과 장엄한 행렬의 연속에서 고조되었던 감정은 수녀님의 발걸음처럼 다시 고요해졌다.


마지막 부활 행렬에 함께하고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짐을 꾸렸다. 떠날 채비를 마치자 안티구아에서의 마지막 날도 저물어있었다.


#2


다음 행선지는 도미니카 공화국. 과테말라 시티의 라 아우로라 국제공항(Aeropuerto Internacional La Aurora, GUA) 공항에서 산토도밍고(Santo Domingo)의 라스 아메리카스 국제공항(Las Américas International Airport, SDQ)으로의 아라젯(Arajet) 항공권을 예약해 두었다.


21일(월), 아침 8시 45분 발이었다. 저렴하면서 직항인 이 노선을 예약하면서 한 가지 우려가 있었다. 안티구아에서 라 아우로라 공항까지의 이동이었다. 1930년대 과테말라 시티의 도심에서 약 6킬로미터 남쪽에 건설된 이 공항은 도시의 확장으로 현재는 도심속 공항이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도시에 가까운 위치에 공항을 둠으로서 공항 이용자들의 접근성과 물류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했던 애초의 의도는 무색해지고 이제는 수도의 발전을 저해하는 장애가 되고 있다. 과테말라 시티의 악명 높은 도로 상습 정체의 요인이 되는 것은 물론 대기 오염과 소음 문제를 야기하면서 도시민의 삶을 저하시키고 있다.


6개월 전 과테말라 시티 입국 시 한 시간 거리가 2.5배로 늘어났던 경험을 상기하면 탑승수속에 맞추기 위해서 도대체 몇 시에 안티구아를 떠나야 할지 감을 잡기가 곤란했다. 다른 여행자들의 경우, 주로 하루 전날 공항 인근에서 숙박함으로써 정체의 두려움을 피해 간다. 여러 경험자를 통한 탐문 결과 새벽 4시에 숙소를 출발하면 월요일 출근시간대를 피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대임을 알았다. 이로써 월단위 요금으로 지불된 숙박비를 포기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3


그러나 이 상황을 우리보다 더 염려한 지인이 있었다. 주재원으로 공항 인근의 호텔 레지던스에 살고 계신 부부였다.


"혹시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오는 일요일 저녁에 과테말라 시티로 오셔서 저희 집에서 묵으시고 월요일 도미니카로 가시는 게 어떠신지요. 월요일 새벽부터 택시 타고 이동하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님을 잘 압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오십시오."


평소 형용사를 사용하지 않으시는 과묵한 분의 만연체 제안이었다.


낯선 이에게 하룻밤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 얼마나 마음 쓰이는 일인 줄을 알기 때문에 그저 '고맙습니다'로 받기에는 망설여지는 배려였다. 아내와 상의 끝에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노고라도 줄여드리기 위해 우리는 숙소에서 저녁을 먹고 출발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지난 6개월간의 삶을 통해 마치 안티구아가 집처럼 느껴졌는데 떠나려니 친척 집을 나서는 것처럼 아쉽습니다. 저희는 천천히 짐을 챙겨서 이른 저녁식사를 여기서 하고 여유롭게 떠나려고 합니다. 해서 선생님댁에는 8~9시쯤으로 도착하도록 할까 합니다. 이미 선생님댁 주소를 알아두었고 선생님댁도 이미 한번 방문했던 터이니 저희가 선생님댁을 찾아가는 것은 조금도 불편이 없습니다. 버스로 시내에 당도하면 저희가 시내에 왔다는 것을 알려드리기는 하겠지만 어디에서 버스를 내렸는지는 말씀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저희를 마중 나올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세요. 레지던스 로비에서 연락드리면 현관에서 뵈면 됩니다. 두 분께서 저희의 출국 날까지 기억해 주시고 마음 내어주신 것만으로도 이미 솜 이불을 안고 있는 것처럼 포근하고 감격스럽습니다. 식사 준비, 전혀 신경 쓰지 않기를 간곡하게 당부드립니다. 이곳 아내가 해둔 밥을 다 비우고 가야 해서 떠날 때 이미 배가 너무 부른 상태일 것입니다."


저녁을 함게 하자는 요청과 버스에 내리면 차로 마중 오시겠다는 요청을 뿌리쳤다. 저녁이 아니라도 틀림없이 다음날 아침식사를 피해 갈 수 없을 터이고 우리는 이미 과테말라 시티의 지리에 훤해 안전하게 우리가 갈 수 있는 상황에서 이 부부의 아까운 일요일 시간을 낭비케하고 싶지 않았다.


#4


저녁 식사와 설거지까지 끝내고 우버를 호출했다. 숙소까지 올 수 없다는 메시지가 떴다. 세마나 산타 중에 모든 버스가 도심으로 출입하는 것을 막았으므로 우버를 믿고 있었다. 부활절의 모든 행렬이 끝난 저녁임에도 우버의 도심 접근 조치도 풀리지 않았음을 그제야 알았다.


도시 외곽으로 걸어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갑자기 다급한 마음으로 바뀌어 도심 밖 국도를 향해 어둠 속을 서둘러 걸었다. 한 가족이 우리 뒤를 따랐다.


"오, 도시 밖 차량이 지금까지도 들어오지 못할 줄은 몰랐어요. 우리도 과테말라 시티의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들은 세마나 산타 행사 참여를 위해 콜롬비아에서 온 친척과 함께 안티구아에 나들이한 일행이었다. 긴 이동 끝에 국도변에 정차된 한 트럭을 섭외해 안티구아와 과테말라 시티의 중간에 있는 산 루카스(San Lucas)까지 가기로 했다. 트럭으로 열두 굽이 높은 고개를 넘으면서 어둠 속 빛으로 멀어지고 있는 안티구아와 작별했다.


산 루카스에서 함께 내린 뒤 운전자에게 요금을 지불하려고 하자 이미 지불되었다고 했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일행이었던 가족의 가장이 함께 지불한 것이었다.


"천사는 언제나, 어디에나 계시는군요. 이 어두운 고갯길에서도 활동을 멈추지 않으시고..."


가장에게 부드러운 말로 감사를 전했다.


"이 아름다운 천사는 3년 동안 연애하고 2년 전에 결혼한 제 부인입니다."


콜롬비아에서 과테말라 시티의 근무로 왔다가 과테말라 여성을 만나 결혼했다고 했다. 부인으로 수개 받은 여성은 딸이나 조카쯤으로 짐작했던 젊은 여성이었다. 다시 그 사연을 물었을 때 부인이 답했다.


"저는 25살이고 남편은 50살입니다."


나이 차이가 많은 이유를 물었다.


"저는 나이 많은 남자를 좋아해요."


다정한 부부에게 다시 한번 나의 질투 어린 감사를 전했다.


"전 당신의 남편보다 나이가 더 많은데..."


함께 폭소하는 것으로 고갯마루에서 이별했다.


#5


과테말라 시티의 주재원 부부께는 계획보다 늦어진 우리 부부에 대한 염려를 드리는 것으로 저녁 식사 준비보다 더 큰 수고를 드린 셈이 되었다.


부부의 환대와 함께한 포근한 대화는 고향의 가족을 만난 듯 따뜻했다. 호텔처럼 잘 준비해 놓은 방에 눕자 울컥하는 마음이 밀려왔다.


한식의 아침상은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엄마의 밥상이었다. 권민·김미경 부부께서는 대성당 사진이 걸린 거실의 테이블에서 은퇴한 시간조차도 마치 수도사처럼 일하고 공부하고 있었다.


부부가 평등하게 출입하고 있는 부엌 입구의 유리문에 고국의 따님이 보내온 글이 붙어있었다. 부모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담은 글 속에는 따님을 구도자로 키운 것이 아닌가 싶게 자타를 아우르는 단단한 성찰이 담겨있었다. 지구 반대편으로 멀어져 사는 가족이지만 누구보다 마음 가까운 가족이었다.


부부는 기어코 차로 우리를 공항 출발 입구에 내려놓는 것으로 우리를 이겼다.


"난 좀 잘 컸다.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알고 누군가를 쉽게 미워하지도 않는 사람으로 컸어. 20대 후반이 되어서 날 돌아보니 주어진 상황에 불평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있더라. 난 이게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해.


또 나는 불행을 모르고 자란 것에 자만하지 않고, 불행하게 자라지 않음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랐어.


유년시절부터 엄마아빠가 선물해 준 추억들은 살면서 주저 않고 싶거나 힘들 때 다시 일어서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모든 게 고맙고 또 고마워. 다른 곳에 있지만 우리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보자!_단"


#사랑 #안티구아 #과테말라시티 #산토도밍고 #도미니카

[꾸미기]20250420_100615.jpg
[꾸미기]20250420_203514.jpg
[꾸미기]20250420_205441.jpg
[꾸미기]20250420_210714.jpg
[꾸미기]20250421_062758.jpg
[꾸미기]20250421_062814.jpg
[꾸미기]20250421_063004t.jpg
[꾸미기]20250421_063209t.jpg
[꾸미기]20250421_070732 복사.jpg
[꾸미기]20250421_071228.jpg
[꾸미기]20250417_091017.jpg
[꾸미기]20250417_091045.jpg
[꾸미기]20250417_091106.jpg
[꾸미기]20250417_091235.jpg
[꾸미기]20250417_091249.jpg
[꾸미기]20250417_091325.jpg
[꾸미기]20250420_201946.jpg
[꾸미기]20250420_202203.jpg
[꾸미기]20250420_214635.jpg
[꾸미기]20250420_214649.jpg
[꾸미기]20250421_053901.jpg
[꾸미기]20250421_053926 복사.jpg
[꾸미기]20250421_060802.jpg
[꾸미기]20250421_060835.jpg
[꾸미기]20250421_062840.jpg
[꾸미기]20250421_063157.jpg
[꾸미기]WhatsApp 이미지 2025-04-21, 10.12.34_8f1573c3 복사.jpg
[꾸미기]WhatsApp 이미지 2025-04-21, 10.12.34_e6de5467t.jpg


keyword
작가의 이전글"그걸 어떻게 알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