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 & Monica's [en route]_334
*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ᐧ강민지
#1
도미니카의 동남부, 라 로마나(La Romana)에 발길을 멈춘 이유 중의 하나는 예술마을 '알토스 데 차본(Altos de Chavón)'의 방문을 위해서였다.
차본강 위 높은 언덕에 16세기 지중해 스타일로 구현한 마을에는 예술가 작업실과 갤러리, 장인 공방과 수공예품 상점, 카리브해 지역의 원주민인 타이노(Taíno)인들의 예술과 고고학 자료들이 전시된 고고학 박물관(Regional Museum of Archaeology), 성 스타니슬라우스 성당(St. Stanislaus Church), 뉴욕 파슨스 디자인 스쿨(Parsons School of Design)과 제휴한 알토스 데 차본 디자인 스쿨(Altos de Chavón School of Design), 5,000석 규모의 원형극장(Altos de Chavón Anfiteatro), 레스토랑과 카페, 기념품 상점 등이 있다고 했다.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예술과 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공간으로, 방문객들에게 아름다운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는 이 예술마을이 왜 그곳에 조성되었고, 왜 카리브해식이 아니고 지중해식 마을이어야 했는지, 창작과 전시, 교육, 공연 등 애초의 기능과 역할들이 42년이 지난 지금까지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 궁금했다.
#2
라 로마나의 숙소에서 마을까지는 약 9km 정도. 우버를 호출했다. 하지만 우버는 미화 20달러 정도의 웃돈을 요구했다. 시 외곽에 있고 운행거리에 비해 우버 비용이 너무 작게 책정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른 운전자를 호출했지만 같은 요구였다. 이 도시의 단합된 관행 같았다.
예술마을이 있는 단지 입구에서 차는 리셉션 건물로 안내되었다. 친절하고 상냥한 표정의 리셉셔니스트가 우리를 맞았다.
"이곳은 사유지, 카사 데 캄포(Casa de Campo)로 알토스 데 차본은 이 단지의 일부로서 신분이 확인된 분만 출입 가능합니다."
우리의 신분이 확인되자 다시 다음 조건을 얘기했다.
"이곳 거주자와 단지의 시설 예약자가 아닌 분의 입장료는 1인당 미화 50달러입니다."
"저희는 우버를 타고 왔습니다. 우리를 목적지에 내려놓고 돌아갈 운전자는 들어갈 수 있는지요?"
"죄송합니다. 운전자도 동일한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럼 운전자를 여기서 돌려보낸다면 알토스 데 차본까지 저희 부부가 걸어갈 수 있는지요?"
"불가능합니다. 거리상으로도 그렇고 실제 단지에서 외부인이 걸어서 이동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그럼 어떻게 알토스 데 차본으로 이동할 수 있나요?"
"단지 내 전용 택시가 운영됩니다. 요금은 15달러로 호출해 드릴 수 있습니다."
우버 운전자를 보내고 단지 내 택시를 부르기로 했다. 교통비까지 합하면 단지 입장에만 150달러 이상 소비되는 셈이었다.
상냥한 그녀가 영수증을 건네주고 지도를 펴서 상세한 설명을 했다.
"알토스 데 차본에서는 더 이상의 입장료 없이 갤러리와 박물관 입장이 가능합니다. 카사 데 캄포(Casa de Campo Resort & Villas)는 7,000에이커(약 8백60만 평. 여의도 면적의 약 10배) 규모의 호텔, 리조트 및 주거 커뮤니티입니다. 당일 방문자는 알토스 데 차본외에 마리나(Casa de Campo Marina)와 미니타스 비치(Minitas Beach)의 방문이 가능합니다. 5식에 모든 영업이 중단됩니다. 다른 두 곳도 단지 내 택시를 호출해서 이동 가능합니다."
#3
택시 속에서 본 단지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느껴졌다. 알토스 데 차본 입구에 내려서 리셉션에서 준 영수증을 제출하는 것으로 입장이 가능했다.
골목길처럼 굽은 돌담이 친근함을 주지만 정교하게 디자인된 배치와 조경으로 사치스러움을 드러냈다.
마을 전체를 산호석으로 바닥을 포장하고 집과 담을 만들었다. 전체가 산호석 마을이었다. 이 많은 돌들은 현지에서 채취한 것을 현지 장인들이 직접 손으로 깎고 다듬어 만든 것이라고 했다. 돌과 테라코타, 목재를 사용한 건축은 1976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1982년에 개장했지만 건축의 애초 취지처럼 마치 중세 마을처럼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1976년 인근 도로를 내는 공사에서 많은 돌이 나왔고 이 돌을 활용하여 산토도밍고 역사지구같은 16세기 분위기의 마을을 만들면 좋겠다는 안을 당시 Gulf+Western 회장이었던 찰스 블루돈(Charles Bluhdorn)이 냈다. 예술과 문화, 교육의 중심지가 되도록 하고 하고 싶었던 그의 구상을 도미니카 공화국 건축가 호세 안토니오 카로(José Antonio Caro)와 이탈리아의 디자이너이자 영화 촬영 감독인 로베르토 코파(Roberto Coppa)가 프랑스 남부의 예술가 마을, 생폴 드 방스(Saint-Paul-de-Vence)처럼 예술적 영감을 주는 지중해풍 마을을 재현하는 것으로 구체화시켰다.
500여 년의 시간을 재현한 놀라운 마을이었다.
#4
끌리듯 언덕의 난간으로 갔다. 석재의 계단과 난간이 놓인 언덕이 자연스럽게 차본강과 협곡 건너 자연을 조망하는 전망대가 되었다. 중세 요새마을 생폴 드 방스의 성벽에서 내려다본 전망과는 다른 풍경에 가슴이 탁 터인다.
마을의 중심인 성 스타니슬라우스 성당(Iglesia católica Saint Stanislaus Church) 앞 광장에는 결혼식 무대를 꾸미는 일이 한창이다, 아담한 성당은 기도처로 보다 석조 성당의 건축적 아름다움을 지닌 고풍스러운 배경을 원하는 결혼식과 특별한 이벤트의 명소로 더 알려져 있는 듯싶었다.
갤러리와 박물관을 들린 다음 어렵게 디자인 학교(Altos de Chavón School of Design)를 찾았다. 고장 난 ATM기가 있는 건물의 위층이었다. 계단을 올라갔지만 벽에 인물 스케치만 걸려있을 뿐 문이 잠긴 각층에 학교가 운영되고 있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없었다.
상황을 수소문한 끝에 학교는 산토도밍고로 옮겨지고 건물은 임대되어 주거로 사용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레스토랑과 카페, 상점들을 제외하고는 문이 열린 예술가의 작업실이나 공방을 찾지 못했다.
소나기가 내렸지만 프랭크 시나트라, 엘튼 존 등 많은 스타들이 무대에 올랐다는 원형극장을 찾아 나섰다. 마침내 5,000석 규모의 원형극장 위에 섰을 때 우람한 텅 빈 구조물이 기능이 거세된 그리스 원형극장의 유물 같았다.
공방이 문이 닫히고 마을 전체가 활기를 읽은 모습은 “아름답지만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라는 비판에 수긍할만했다.
좁고 번잡한 생폴 드 방스와 달리 넓고 한가한 알토스 데 차본의 차이는 역사적 유적과 유적의 인공적 재현이라는 것이다. 두 곳 모두 마을 밖 세상과는 단절된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마르크 샤갈이 살고 묻힌 미로들 사이에 70여 개가 넘는 갤러리들이 빼곡한 생폴 드 방스는 더 젊어지는 반면 아름답고 넓고 세련된 알토스 데 차본은 늙어간다는 것이다.
#5
차본강 하구의 카리브해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마리나(Casa de Campo Marina)는 30~250피트 길이의 요트 350척을 수용할 수 있는 요트 스립을 갖추고 있으며 최고급 서비스와 시설이 구축되어 있다. 이탈리아 건축가 지안프랑코 피니(Gianfranco Fini)가 지중해의 전통적인 항구 마을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했다고 한다.
요트로 카탈리나 섬(Isla Catalina), 사오나 섬(Isla Saona) 크루즈를 즐 길 수 있으며 나우프라기오 델 카피탄 키드(Naufragio del Capitán Kidd) 난파선 지역에서 다이빙을 즐기거나 차본강 탐험을 나설 수도 있다.
헬리포트, 슈퍼마켓, 영화관과 20개 이상의 부티크 가게와 레스토랑, 바, 하드웨어 스토어가 있어 일상용품과 필수품 구매가 가능한 쇼핑 구역이 있다.
마리나에서 4km 서쪽에 카사 데 캄포의 전용 해변인 미니타스 비치(Minitas Beach)가 있다. 우리가 당도했을 때는 이미 폐장 시간인 5시에 가까운 데다가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해 특히 카리브해의 일몰이 아름답다는 이 전용 해변을 누릴 수 없었다. 타월의 대여는 입장료에 포합되어있었다.
#6
이 모든 호화로운 것들을 배타적으로 누릴 수 있는 카사 데 캄포(Casa de Campo)는 '시골집', 시골 별장'을 뜻하는 의미와 달리 모든 것이 럭셔리의 상징으로 건설되었다.
멀티밀리어네어 사업가 찰스 블루돈은 1974년 소도시 정도의 넓이를 가진 사탕수수 농장 부지를 설탕 회사(Central Romana Corporation)로부터 인수해 럭셔리 리조트 ‘카사 데 캄포'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1983년 그의 사망 후 판훌(Fanjul) 가문을 주축으로 한 컨소시엄에 매각되었고 새로운 소유주들은 리조트를 더욱 고급화하는데 집중했다.
도미니카 공화국 최초의 럭셔리 리조트로 문을 연 이곳은 247개의 객실을 가진 호텔과 50채의 고급 빌라, 카리브해 최고로 꼽히는 골프 코스, 티스 오브 더 독(Teeth of the Dog)', 예술마을, 마리나 등을 갖춘 '억만장자의 천국'으로 불리고 있다.
예술마을 알토스 데 차본 다음으로 내 관심을 주목하게 한 것은 마리나도 골프장도 리조트도 아니었다.
이곳을 별장으로 활용하거나 혹은 실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의 주택이었다. 2,300개 부지의 개인 빌라가 있으며, 이 중 약 70%는 대규모 부지로 구성되어 있다. 개인 빌라들의 가격은 최소 50만 달러에서 최대 4천만 달러로 억만장자의 천국으로 불리는 이유를 알 만했다. 이 단지의 부동산 중계업체의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만의 프라이빗 오아시스를 갖는다고 상상해 보세요!"
오션뷰, 리브뷰, 골프장뷰, 정원뷰 등 위치마다 각기 다른 장점들을 극대화하는 배치이다. 이번 분기에 매물로 나온 빌라의 최고가는 오션뷰로 3천5백만 달러였다. 그 소유주들은 비밀에 부쳐져있지만 도미니카공화국의 스포츠 스타들을 비롯한 각국의 갑부들로 거론되고 있다.
#7
예술마을 알토스 데 차본 때문에 방문했던 곳에서 억만장자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접하고 카사 데 캄포에서의 주거 환경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풍요 속에 있지만 배타적인 이유로 빈약해진 것이 많았다. 문화와 예술을 추구했지만 비문화되었다. 한계 밖으로 탈출했지만 갇히고 말았다.
억만장자가 되는 행운으로 풍요를 획득했지만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서 배타적이 되어야 했다. 원하는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자유를 얻었지만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알토스 데 차본의 성 스타니슬라우스 성당 앞 광장에서 지루한 표정의 당나귀에게로 갔다. 방문객의 자녀들에게 자신의 등을 내어주는 것이 나귀의 역할이었다. 나귀만 보면 내 어린 시절 고향에서 농사일의 모든 무거운 짐을 감당했던 충실한 나귀 생각에 발길을 멈추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단번에 우리나라에서 종적을 감춘 나귀에 대해 홀로 애달아 하곤 한다.
순박한 나귀 옆에서 한가하게 수다를 즐기고 있는 세 남자에게 끼어들었다. 나귀 주인 페드로(Pedro)가 나귀, 마가리타(Margarita)가 10살의 암컷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8년간을 함께 살았다는 페드로에게서 마가리타를 향한 각별한 정이 느껴졌다. 페드로에게 물었다.
"마가리타가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날에는 무엇을 하나요?"
이 물음을 옆에 있던 다른 사내가 받았다.
"우리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마가리타와 사랑을 나누지요!"
폭소가 가라앉기 전에 페드로가 그의 어깻죽지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이곳에서 자유롭고도 즐겁게 사는 사람은 자신의 품을 팔 수 있는 한자락 자리를 얻은 사람들인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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