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 & Monica's [en route]_335
*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ᐧ강민지
#1
여행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이유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숨이 멎을 듯한 붉은 일출일 수도, 돌담 사이에서 순을 낸 풀 한포기일 수도, 길에 박힌 돌부리 일 수도, 따뜻한 미소를 머금은 사람일 수도 있다.
이번에는 리처드(Richard)였다. 우리는 사마나(Samaná)에 사흘만 머물고 다음 행서지로 떠나려는 계획이었다. 그만 리처드의 쿨한 태도 속에 반전처럼 배인 세심함에 아내가 반한 것이다.
그날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그다음 마을에 이어지는 버스는 있는지, 그 마을에 당도해도 15km 정도의 바다를 건너야 하는데 막배를 탈 수 있을지 전혀 알 수 없는 일이라 숙소 예약을 하지 않은 터였다.
늦은 오후 사마나 선착장에 내려서 가까운 곳을 찾아든 곳이 리처드의 집, Best bed and Breakfast in Samana 였다. 이름속에 기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직관적인 숙소였다. 체크인을 마쳤을 때 그는 2가지를 강조했다.
"나는 이 도시에 대해 거의 모르는 것이 없으니 무엇이든 물어라. 아침은 원하는 메뉴를 원하는 시간에 해주겠다. 나는 요리가 취미이다. 망설이지 말고 주문해다오."
그는 정말 모르는 것이 없었다. 세계에서 거의 제일 아름답다는 비치는 어디에서 버스를 타고 갈 수 있으며 버스에 내려서는 어떻게 보트로 갈아탈 수 있는지, 원주민이 남긴 암벽화는 어디에 있고 그곳을 어떻게 갈 수 있을지, 앞집 개의 이름과 성격은 어떤지...
#2
그는 캐나다 퀘벡이 본향으로 20살에 경찰로 시작해 20년간 근무했다. 한 직장에서 20년이 되자 안주하는 느낌이 들었다. 새로운 경험을 위해 모험을 시작할 때라는 신호로 해석했다.
생소한 분야인 호텔사업을 시작했다. 경찰도 사람들의 안녕을 도모하는 일이고 호스피탈리티 사업 또한 사람의 휴식과 회복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보았다. 모든 역량을 집중해 작은 호텔을 열었다. 본인과 취향이 맞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11월에 이미 영하의 날씨로 떨어져 4월이 지나야 봄이 시작되는 비수기를 버티기 어려웠다. 영업을 하지 않는 한겨울에도 시설 유지비는 계속지출되었다. 1년에 6개월 영업으로는 사업적으로 밸런스를 맞출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사계절 영업이 가능한 카리브해의 호텔들에 주목했다. 그중에 스페인과 카리브해의 몇 개 나라에서 수십 개의 호텔을 운영하고 있는 '피녜로 그룹(Grupo Piñero)'에 주목했다. 호텔경영의 경험을 인정받아 바로 매니저로 입사할 수 있었다. 부인과는 이혼했고 아들 하나는 이미 장성했으므로 홀로 캐나다를 떠나는 것을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멕시코 근무를 시작으로 자메이카를 거쳐 도미니카에서 근무로 25년이 흘렀다.
퇴직 후 무위도식하는 것은 자신의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65세에 새로운 선택을 했다. 사마나를 지상의 천국이라고 생각한 그는 이곳에 자신의 호텔을 열었다. 10년간 조식을 직접 만들어 주는 B&B를 운영하면서 적당한 노동과 소통을 계속 하니 나이든다는 생각이 들지않아서 좋았다. 몸을 욺직일 수 없을 때까지 일을 계속할 예정이다. 사후에도 이 땅을 영면의 장소로 여기고 있다.
#3
아내가 리처드 집에 머무는 것을 특히 좋아하는 것은 그의 인생 경험을 듣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아침식사 때문인듯싶다.
평생 아침을 차려주는 생활을 하다가 한국을 떠나서도 여전히 직접 식사를 해서 먹는 곳을 찾아다니는 저비용 여행자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28년간의 호텔리어가 차려주는 아침을 앉아서 받는 것에 무척 감격해하고 있다. 다른 사람이 차려주는 조식을 먹고 동네 산책 나가는 경쾌한 뒷모습에서 밥짓기와 치우기의 고단함을 덜었다는 사실보다 존중받는 존재로서의 자아에 더 흡족해하는 모습이 읽힌다.
아내가 골목으로 사라진 뒤 리처드에게 그 얘기를 했다.
"아내가 당신이 차려준 아침을 받으면서 자아존중감이 많이 높아진 것 같다.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어서 고맙다."
"부인이 행복해야 남편이 행복하다."
"맞다. 오늘 나도 함께 행복을 선물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