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 & Monica's [en route]_347
*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ᐧ강민지
#1
푸에르토리코 서쪽 끝, 마야구에스(Mayagüez)로 이동해 린콘(Rincón)과 카보로호(Cabo Rojo) 등 특징적인 몇 개 지역을 탐사하는 거점으로 삼고자 했다.
이 나라에서는 도시 간을 연결하는 어떤 대중교통도 존재하지 않은 현실은 버스를 주로 이동 수단으로 활용하는 자유여행자의 입장에서는 난감한 일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자차를 이용하고 여행자들은 렌터카와 택시를 제외하고는 대안이 없다. 우버는 가까운 도시 정도에서 활용 가능하지만 장거리 도시는 택시와 다를 바가 없다.
다행히 마야구에스까지는 한 사설회사, 리니아 술타나(Línea Sultana)에서 하루 몇 차례의 밴을 운영한다는 정보를 찾았다.
올드 산후안(Viejo San Juan)에서 산후안만(Bahia de San Juan)를 건너 셔틀 회사에 인접한 카타뇨(Cataño)지역까지 운행하는 페리를 타기로 했다. 산후안 내의 시내버스 탑승은 모든 사람이 무료이고 페리의 운임도 저렴해서 만의 한가운데에서 거의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올드 산후안을 비롯해 인접 도시들을 360도로 조망할 수 있다.
페리 터미널(Terminal de Lancha San Juan)의 요금은 일반인이 0.5달러, 60~70세 시니어는 0.25달러, 71세 이상이 무료이다. 이곳에서는 71세 이상은 되어야 노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올드 산 후안 여객선 터미널(Terminal de Lancha San Juan)에서 페리에 오른 지 30분 만에 만을 건너 카타뇨여객선터미널(Terminal de Lancha Cataño)에 닿았다. 페리에서 내리자마자 버스회사에 전화를 했다. 스페인어만 가능한 회사 직원과의 통화에 페리를 함께 타고 오면서 친밀해진 할머니께서 도와주었다. 통화를 마친 할머니는 몇 시, 어디에서 셔틀을 탈 수 있을지를 상세히 알려주었다.
카타뇨 주민인 할머니가 알려준 픽업 지점인 월그린 약국(Walgreens Pharmacy) 주차장에서 예약한 밴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픽업 시간보다 30분이 지났지만 모습을 보이지 않아 회사로 전화를 했다. 운전사가 전화를 할 것이라고 했다. 다시 20분이 지나고 운전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현장에 도착했는데 우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영어 사용에 제한적인 그를 대신해 약국 직원이 통화했다. 그가 있는 곳은 고속도로 입구의 다른 약국이었다. 월그린 매장이 미국령을 포함한 미국 내 8,700개가 넘는다는 것을 할머니도 나도 간과한 것이다. 우리와는 15분 거리의 고속도로 진입로 입구의 월그린에 있다는 운전사는 너무 늦은 탓에 우리를 픽업할 수 없다고 했다. 이 셔틀은 오후에 두 차례 출발하는 밴의 두 번째 셔틀이었다. 하루가 딜레이 되는 상황에서 멘탈이 붕괴된 상태로 어떻게 상황을 수습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2
길거리에서 고민을 하고 있는 중에 승용차 한 대가 우리 옆에 멈춘 뒤 한 남자가 창문을 내리고 외쳤다.
"도움이 필요한가요?"
그렇다고 답하자 그는 차의 방향을 약국 주차장으로 돌려 주차한 다음 우리에게로 왔다. 형편을 들은 그는 버스회사로 전화해 내 상황을 스페인어로 설명하고 다른 방도가 없을지를 물었다. 그가 들은 대답도 같았다.
"그 셔틀이 오늘의 마지막 출발이었습니다."
전화를 끊은 그가 우리보다 훨씬 이성적으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설명했다.
"첫째 오늘 꼭 마야구에스로 가셔야 한다면 택시와 우버, 렌터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 경우 160km가 넘는 길을 갔다가 되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수백 달러를 지불해야 할 겁니다. 다른 방법은 차를 렌트하거나 이곳에서 1박을 하고 내일 첫 셔틀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묵었던, 이 도시에서 가장 저렴한 그 호스텔로 되돌아가기로 하고 예약 앱을 열었다. 예약이 가능했다. 그 사이 이미 30분이 흘렀다. 기꺼이 우리를 위해 가던 길을 멈추어 준 이의 이름을 그제야 물었다.
"훌리오(Julio Melendez)입니다."
"감사합니다. 당신의 친절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곳의 높은 물가 때문에 이 근처의 호텔을 예약하는 대신 묵었던 호스텔을 예약했습니다."
"이해합니다. 이곳의 물가는 미국 본토와 다름없습니다. 어떤 것은 본토보다도 높습니다. 섬의 특성상 수입해야 하니까요.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니요. 다시 바다를 우회해서 산후안으로 돌아가야 하는 곳입니다. 당신의 진행 방향과도 반대입니다. 숙소까지는 우버를 이용하겠습니다."
"걱정 마시고 숙소의 주소를 주세요."
그는 우리의 사양을 받아들이지 않고 아내의 배낭을 차량으로 가져갔다. 잠시 뒷좌석을 정리해야 하는 것에 양해를 구했다.
"제 아내와도 인사하세요. 아내는 며칠 전에 출산했고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차에서 내리지 못했습니다. 아기는 병원에 있습니다. 뒷좌석의 아이는 저희의 착한 딸입니다.”
훌리오 씨가 우리의 상황을 수습하는 동안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녀의 상황을 인지한 우리는 다시 한번 훌리오 씨의 호의를 사양했다. 그는 우리의 요청을 수락하는 대신 아내와 딸에게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다. 차가 출발했다.
#3
차가 출발할 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비가 10분도 지나지 않아 세찬 소나기로 바뀌었다. 우기로 접어든 탓에 하루에 한두 번씩 내리는 폭우를 훌리오 씨는 미리 예상한 것인가? 훌리오 가족은 우리를 두 번 위기에서 구해준 셈이 되었다. 우리를 두고 떠나 버린 야속한 셔틀버스 운전자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게 해주었고 자칫 배낭까지 흠뻑 젖을 뻔한 상황에서 또 한 번 구출해 주었다.
잔뜩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딸과 대화를 시작했다.
"우리는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빠져있었고 네 아빠가 차를 세우고 우리를 궁지에서 구해주셨어. 아빠가 천사임이 틀림없는 것 같아."
"맞아요. 천사세요."
"언제부터 아빠의 정체를 알았나요?"
"제 평생 그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우리는 한국에서 온 여행자, 안수와 민지라고 해."
"전 나탈리아(Natalia)예요. 9살이고 4학년이에요."
"천사와 함께 사는 기분이 어때?"
"저와는 달리 영어를 잘 하는 천사라서 더욱 좋아요."
"아빠가 천사이니 가족 모두가 천사인 거지. 넌 영어를 더 잘할 기회가 많기 때문에 전혀 걱정할 것 없어."
"네. 더 많이 공부할게요."
"우리는 7일 뒤에 산토도밍고로 돌아갈 예정이야. 하지만 우리는 결코 이곳에서 만난 천사 가족을 잊을 수 없을 거야.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래. 한국 혹은 세계의 어디에선가..."
우리가 이 나라를 떠난다는 말에 나탈리아는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천사는 눈물이 많은 것을 알고 있지. 네 눈물을 보니 그것이 확실하네."
그 말에 다시 스스로 눈물을 닦고 우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우리가 또 무슨 말을 할지 궁금증이 어려 있었다.
"넌 정말 감성적이구나. 이렇게 공감 능력이 뛰어나니 그 감정들을 시, 혹은 이야기로 쓰면 그것이 문학이란다. 정말 감성이 풍부해서 작가도 될 수 있고 네 동생으로부터도 사랑받는 언니가 될 수 있을 거야."
"푸에르토리코로 다시 우리를 만나러 오실 건가요?"
"지금은 교통이 편리한 시대가 되어서 점점 지구가 작아지고 있단다. 그래서 이곳과는 지구의 반대편인 한국에서 우리가 올 수 있게 된 거지. 네가 어른이 되는 때에는 더 작아질 거고 더 쉽게 오갈 수 있겠지. 우리가 다시 오거나 네가 한국으로 올 수도 있을 거야."
나탈리아와 수다를 주고받는 사이 호스텔 앞에 차가 멈추었고 비도 그쳤다.
우리가 내리려 할 때 '잠깐만요!'를 왜 친 그녀가 어린이용 태블릿으로 우리의 얼굴 사진을 찍어 순식간에 큰 하트 두 개를 그려 넣어 보여주면서 자신의 마음이라고 했다. 그녀는 어른의 마음도 순식간에 울컥하게 만드는 마음을 가진 소녀였다. 나탈리아와 작별하는 사이 훌리오 씨가 우리의 가방을 내려놓고 미소로 띤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내일 아침 8시쯤에 셔틀버스회사로 전화하셔서 차를 예약하시고 이곳의 주소를 알려드리세요. 운전사가 픽업하러 올 거예요. 그럼 우리는 둘째 딸을 만나러 가보겠습니다."
#4
익숙한 숙소에 다시 짐을 풀고 나니 셔틀을 놓친 해프닝이 나탈리아 가족을 만나기 위한 의도된 일처럼 느껴졌다. 감사를 전하지 않고는 잠들 수 없었다.
"오늘은 저희에게 가장 당혹스러운 날이었지만, 또한 온 가족이 천사인 당신 가족을 만난 가장 행복한 날이 되었습니다. 따님의 재능과 감수성에 대해서도 감동했습니다. 모든 친절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음날 아침, 훌리오 씨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리니아 술타나 버스 회사의 퀴크 크루즈 씨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당신 부부를 숙소에서 픽업하도록 당부드렸습니다. 9시 30분쯤에 숙소에 도착 예정이라는군요. 저희는 신생아와 함께 병원에 있어서 전화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 두 분 모두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
모든 것이 그의 말대로 풀렸다. 화창한 햇살 아래 카리브해를 따라 차가 달리는 중에 우리의 상황을 전했다.
"버스에 탑승하여 서쪽으로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이 순조로우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새로 태어난 따님이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하여 영광과 평화 속에 성장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또한 아내의 건강이 속히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현명하고 아름다운 딸에게 저희의 사랑을 전해주세요."
한 시간 뒤 훌리오 씨의 메시지가 왔다.
"우리 가족으로부터 인사드립니다. 사랑하는 아기가 막 천국으로 떠났어요. 아기는 건강 상태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갔지만 우리 부부는 우리 곁의 아름다운 딸을 계속 잘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당신 부부는 우리의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위로한 진정한 천사였어요, 부디 아름다운 날들이 되시길..."
머리가 텅 비어버리는 충격이었다. 뒤이어 눈물이 핑 돌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서서히 안개가 걷히듯 정신이 되돌아오면서 차 속에서의 퍼즐이 맞추어지는 느낌이었다.
월그린 약국 주차장에서 훌리오 씨와 내가 상황을 정리하고 숙소 예약까지 마쳤을 때 했던 첫마디가 생각났다.
"먼저 걱정하고 계실 부인께 이제 안심하셔도 된다고 말씀드리시죠."
그는 우리와 떨어져 길가에서 배낭을 지키고 서 있는 아내의 불안한 마음을 속으로 계속 염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친절과 배려는 의지가 아니라 그의 체화된 습관이었다. 그것이 나탈리아가 아버지를 천사로 믿었던 이유이지 싶었다.
한 생명이 위독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에게 보여준 훌리오 씨의 '따뜻한' 이성과 아내와 딸의 '차가운' 감성은 내게 닥치는 모든 상황을 대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단지 며칠간 지구를 방문했던 그 여린 생명이 훌리오 가족의 둘째 딸이었음에 대해 얼마나 행복했을까.
#어떤친절 #지구나들이 #푸에르토리코 #세계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