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 & Monica's [en route]_351
*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ᐧ강민지
#1
특정 주거지에 얽매이지 않는 부유하는 지금의 삶에서 새로운 곳에 도달했을 때 관심갖는 것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현재의 모습 너머의 발단에 관한 것이다. "왜 지금의 모습일까?"라는 의문이다. 이 의문이 어느 정도 해소되면 현재의 시작이 되었던 시간에 대한 사람과 상황에 닿아있는 느낌을 갖게 된다.
특정한 도시에 발 딛는 순간 세상을 처음 대하는 아이처럼 여러 시각적 정보를 수집한다. 그 정보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다시 답을 찾기 시작한다. 마야구에스(Mayagüez)에 당도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약된 숙소로 가는 중에 지나친 콜럼버스 광장(laza de Cristobal Colon)에 우뚝한 그의 동상을 보면서 그가 이곳에 왔었을까, 그때는 언제일까가 이 도시를 알아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콜럼버스는 그의 두 번째 항해 중이던 1493년 11월 19일, 현재의 푸에르토리코 섬에 도착했으며 그 지점은 첫 유럽인 정착지인 카파라(Caparra)가 위치했던 지금의 올드 산후안 맞은편 구아이나보(Guaynabo)로 추측한다. 그는 이 섬을 세례자 요한이라는 뜻의 산후안 바우티스타(San Juan Bautista)라고 명명하고 섬의 서쪽으로 항해하면서 북서쪽 해안의 알미란테 만(Almirante Bay)에 상륙했다. 기록은 그기까지이다.
도시의 약사에 따르면 마야구에스는 타이노(Taíno) 원주민들이 오랫동안 거주하던 곳으로 1760년 스페인 식민지 개척자들에 의해 정착지로 개발되었다. 후에 광장이 만들어지고 그가 이곳에도 왔을 것이라는 추정으로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2
마야구에스는 'La Sultana del Oeste(서부의 여왕)'이라는 별칭이 있다. 이 '시적인' 느낌의 표현에 시적인 느낌을 내기 위해 아무 관련 없는 오스만 제국에서 술탄(무슬림 황제)의 아내나 여왕을 지칭하는 'Sultana'라는 낱말을 넣었을 리 없겠다,는 의문이었다.
산후안에서 이곳을 연결하는 사설 밴 회사의 이름도 'Línea Sultana(술타나 라인)'이었다.
이는 19세기 낭만주의 시기에 우아하고 고상한 도시의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귀족 여성이나 이국적인 여인에 비유했던 사조가 반영된 것으로 본다. 마야구에스에서도 도시의 경제적, 문화적 위상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낭만적인 표현이 도입된 것이다.
콜럼버스 광장(Plaza Cristóbal Colón)의 터번과 베일을 쓴 여성이 램프를 들고 있는 오달리스크(odalisque : 술탄의 궁정 내 하렘의 여성) 청동 가로등 또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영향이 적용되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의 ‘그랑 오달리스크(Grande Odalisque)'처럼 19세기 유럽 미술에서 동양적 관능미와 이국적 매력을 상징하는 예술적 주제로 차용되곤 했다.
#3
광장 앞 가톨릭 성모 칸델라리아 대성당(Catedral Nuestra Señora de la Candelaria) 내부 벽면에 붙은 작은 동판의 짧은 메시지로 시선이 갔다.
"1873_1974
A LA MEMORIA DEL
DR. RAMON EMETERIO BETANCES, DE DON SEGUNDO RUIZ BELVIS Y DE LOS ABOLICIONISTAS MAYAGUEZANOS
QUE EN EL ATRIO DE ESTA SANTA IGLESIA COMPRABAN LOS NIÑOS ESCLAVOS EN LA PILA BAUTISMAL PARA REINTEGRARLOS A NUESTRA S OCIEDAD COMO HOMBRES LIBRES. GLORIA A DIOS Y LOOR A ELOS EN EL 101 ANIVERSARIO DE LA ABOLIGION DE LA ESCLAVITUD.
ROTARY
INTERNATIONAL
LOS ROTARIOS DE MAYAGUEZ
1873_1974
101주년의 뜻을 기념하며
라몬 에메테리오 베탄세스 박사, 돈 세군도 루이스 벨비스, 그리고 마야구에스의 노예 해방 운동가들을 기리며
노예 어린이들을 사들여 이 성스러운 교회 뜰에서 그들은 세례 받게 하여 우리 사회에 자유인으로 다시 통합시켰음을 기억합니다.
노예제 폐지 101주년을 맞아 하나님께 영광을, 그분들께 찬양을 올립니다.
_마야구에스 로터리 회원 일동"
노예폐지 101주년이 되는 1974년에 설치된 이 기념동판은 푸에르토리코 19세기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어준다.
1493년 11월 19일에 푸에르토리코에 상륙한 콜럼버스는 그가 처음 발을 딛는 곳마다 치렀던 의례대로 이 섬을 'San Juan Bautista(산후안 바우티스타 세례자 요한 )'으로 이름 짓고 스페인 국왕 부부(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를 대신해 섬을 점령했음을 선언한다.
"“En el nombre de Sus Majestades Católicas, tomo posesión de esta isla y todas las tierras adyacentes.(가톨릭 전하의 이름으로 이 섬과 그에 인접한 모든 땅을 점령하노라.)”
이는 이 땅의 주인으로 살아온 원주민 타이노족 멸족의 시작을 의미한다.
스페인 점령지에서 실시된 식민지 통치제도인 '엔코미엔다 제도(Encomienda system)'를 통한 노예화와 착취, 유럽에서 전파된 질병으로 원주민의 수가 급감하자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수입하여 설탕과 커피 생산 노동력과 군사적 목적에 충당했다.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은 1873년 3월 22일 스페인 의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방되었다. 이는 1863년 1월 1일에 노예 해방 선언한 미국보다 10년 늦은 것이다.
#4
1851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창립된 ‘시에르바스 데 마리아(Siervas de María 마리아의 시녀들)'라는 수녀회가 1897년 9월 15일 마야구에스에 설립된다. 그 수녀회 건물은 현재 호텔로 운영되고 있다. 그 역사적 가치를 살려 복원된 스페인 식민지 스타일의 호텔, '포사다 호텔 콜로니얼(Posada Hotel Colonial)'를 방문했다.
소담한 호텔의 현관 벽에 걸린 마야구에스의 옛 역사적 건축물 사진들 가운데 이 도시를 뒤흔든 지진에 대한 설명을 담은 액자가 함께 걸려있었다.
"El terremoto de San Fermín de 1918
El 11 de octubre de 1918, a eso de las diez de la mañana, la Isla de Puerto Rico fue sacudida por un intenso terremoto (con epicentro en el Cañón de la Mona y una intensidad estimada entre 7.3 y 7.5 grados). Si bien se sintió en toda la Isla, fue más fuerte en la parte oeste de Puerto Rico y, especialmente, en Mayagüez
El fenómeno sísmico produjo miedo y consternación a todas las clases sociales de Mayagüez debido a que se habian destruido 700 casas de mampostería y más de mil de madera quedaron damnificadas. El pueblo en general tenía una gran incertidumbre y creia difícil que Mayagüez pudiera reconstruirse.
Entre los edificios públicos destruidos por el terremoto se encontraban, el Cuartel de Infantería en el sitio que ahora existe un edificio nuevo fabricado para el correo por el Gobierno Federal de los Estados Unidos. La duana de dos pisos que fue edificada en tiempos de España y en el sitio se ha edificado por el Gobierno Federal una Aduana nueva de un solo piso. La casa consistorial o Municipio quedó inservible y tuvo luego que destruirse para edificar el nuevo consistorio que ahora tenemos. La Iglesia Católica, Apostólica y Romana, perdió sus dos elegantes torres, y fue grandemente averiada, necesitando reparaciones que luego se hicieron.
_Tomado de http://www.mayaguezsabeamango.com
1918년 산 페르민 지진
1918년 10월 11일 오전 10시경 푸에르토리코 섬은 강력한 지진(진앙지는 모나 해협의 해저 협곡이며, 강도는 약 7.3~7.5로 추정)으로 흔들렸다. 지진은 섬 전역에서 감지되었지만, 특히 푸에르토리코 서부 지역과 마야구에스에서 가장 강하게 느껴졌다.
이 지진으로 마야구에스의 모든 사회 계층이 공포와 충격에 빠졌다. 700채의 석조 주택이 파괴되고 1,000채 이상의 목재주택이 피해를 입어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주민들은 큰 불확실성에 휩싸였고, 마야구에스가 재건될 수 있을지 의심했다.
지진으로 파괴된 공공건물로는, 현재 미국 연방정부가 우체국 건물로 사용 중인 자리에 있던 보병 부대 막사, 스페인 시대에 지어진 2층 세관 건물(현재는 1층 새 세관 건물로 재건됨), 사용 불가로 철거 후 새로 지어진 시청 건물, 그리고 두 개의 우아한 탑을 잃고 큰 피해를 입어 수리가 필요했던 가톨릭 성당이 있다.
_출처 http://www.mayaguezsabeamango.com "
이런 실마리를 통해 성당(Catedral Nuestra Señora de la Candelaria)의 지붕이 왜 옛 사진 속 모습과 다른지, 알칼디아(Alcaldía)와 세관 건물에서 왜 오래된 시간의 깊이를 느낄 수 없었는지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마야구에스에서 도시의 골목들을 느리게 거닐다 보니 시간의 경계를 넘게 되었다. 시간의 문은 곳곳에서 손잡이 돌려주기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