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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간의 환자

Ray & Monica's [en route]_357

by motif

길 떠나기 전의 당부, "아프지만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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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ᐧ강민지


#1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내가 제주가 되었다. 아버지가 제주일 때 따라만 하던 때와는 마음 자세가 달라졌다.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


아버지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지방을 쓰면서 그 의미를 톺아보았다.


"배우는 학생으로 인생을 살다 돌아가신 아버지"라는 의미가 담겼음을 알았다. 지금 의미와는 달리 '학생(學生)'이 조선시대 관직이 없거나 품계가 없는 사람을 통칭하는 의미였다고 하더라도 지방을 쓸 때마다 '학생'이라는 말에 특히 마음이 머물렀다.


벼슬길에 올라 나랏일을 맡아 다스리는 자리가 아니라 농부로서 땅과 하늘을 섬기며 절기를 읽고 땀 흘린 대가로 자연이 주는 것에 감사하며 사신 아버지의 평범함이 각별하고 감사하게 느껴졌다. 자연은 거스를 수 없다는 순리를 평생 논에 엎드려 깨우친 아버지는 내가 대학교육과 교과서로 배운 것과는 다른 방식의 학생으로 사신 삶이었다.


아내가 은퇴하고 나도 아내를 따라 은퇴를 결심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평생 땅을 일구며 공부한 것처럼 나도 책이 아닌 삶에 직접 부딪히는 공부 하는 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채우는 일로 급급했으니 은퇴는 비움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고 여겨졌다. 편리함을 쫓고 치장하는 욕망만 내려놓아도 어디서나 끼니를 거르는 일은 없겠다 싶었다.


아내는 2023년 3월 16일 먼저 영국으로 떠나고 나는 내가 맡았던 책임을 인계하고 5월 10일 아내를 뒤따랐다. 그렇게 배낭 하나씩만을 꾸려 함께 '비움'과 '배움'의 여정에 올랐다.


●아내가 떠났습니다.

https://blog.naver.com/motif_1/223047292309


●간절함의 응답, 영국행 원웨이 티켓

https://blog.naver.com/motif_1/223004972336


#2


우리는 익숙한 것으로부터 멀어진 10년을 살기로 했다.


2025년 7월 6일 현재까지 아내는 843일(약 120주, 27개월, 2.31년), 나는 788일(약 112주, 25개월, 2.16년)를 나라 밖에서 살고 있다.


10년이라고 명시한 것은 작은 시련이나 불편에도 결심을 번복하기 쉬운 나약함을 경계함이었다. 초기 이 여정을 기록하는 시리즈의 타이틀을 '출가'라고 이름 지었던 것도 그때문이었다. 좀 더 가벼워지고자 하는 우리의 의도와 달리 무게가 실린듯해서 LA에서부터는 'Ray & Monica's [en route]'로 바꾸었다.


●출가_1 | 10년 기한으로 길을 떠납니다.

https://blog.naver.com/motif_1/223084605263


●출가_52 | Inside America_25 | 12년 전의 앨범에 담긴 쉐릴엄마의 위대한 '모정'

https://blog.naver.com/motif_1/223160402029


●Ray & Monica's [en route]_1 | 히스토릭 코어

https://blog.naver.com/motif_1/223162488241


우리가 '출가'를 알리는 글에 한 블로거께서 아래와 같은 응원을 댓글로 주셨다.


"서른아홉의 이른 나이에 직장인으로서 종지부를 찍고 양평에 내 평생 꿈이었던 집을 짓고 귀촌을 결심하는 데 영향을 주셨던 분이십니다. 이제 만 7년의 시간이 흘렀네요. 양평에서 적당히 벌며 잘 살아가는 것에 대해 여전히 배우는 중이고요. 선생님의 글을 7년간 염탐하다 보니 마음 한구석 선생님 부부를 닮고 싶다는 생각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역시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나 봅니다~ 제 평생의 꿈인 유유자적 지구 방랑을 시작하시는군요. 아 설레입니다. 선생님을 통해 엿보는 훗날 우리 부부의 방랑을 떠올리면요. 여전히 저에게 적지 않은 영향력을 주시는 분. 아프지만 마세요!"


#3


우리는 과테말라_도미니카공화국_푸에르토리코_도미니카공화국 거쳐 다시 멕시코로 왔다.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가 목테수마 2세(Moctezuma II)Moctezuma II)의 아즈텍 왕국을 함락하고 수도 테노치티틀란 그의 궁궐 위에 건설해 총독 관저로 사용했던 '팔라시오 나시오날(Palacio Nacional)'에서 멀지 않은 호스텔에 짐을 풀었다.


이곳에서 아내가 아팠다. "아프지만 마세요!"라고 했던 그 당부가 현실이 되었다. 상한 길거리 음식을 먹은 탓이라고 스스로 진단했다.


"해모(우리 가족과 일생을 함께한 반려견)가 아팠을 때 5일을 굶고 나서 마침내 물을 먹기 시작했어요."


아내는 이 말뒤 굻기 시작했다. 사흘을 굶고 나흘째 일어났다.


아내가 일어나자 이번에는 내가 아팠다. 두통과 함께 열이 나고 모든 관절이 분해된 것 같았다. 나도 아내의 처방에 따랐다. 사흘을 굶었다. 나도 다시 일어났다. 내가 벙커 베드에서 나온 모습을 본 아내가 말했다.


"당신의 허벅지와 엉덩이가 어버님의 몸과 같아요."


아내는 아버지를 간병하면서 목욕도 맡았던 터라 나보다도 아버지의 몸을 더 많이 안다. 뼈만 앙상하다는 얘기였다. 그런 점에서는 아내도 마찬가지이다. 허벅지와 엉덩이에 살점이 만져 지지 않는다. 내가 일어난 것을 자신이 일어난 것보다 더 안도하는 아내가 말했다.


"근육이 빠져서 그래요. 다시 운동하면 금방 살이 붙을 거예요."


무엇이든 줄이는 것이 좋다고 여기는 나는 가뿐해져서 좋다. 내일 다시 출발이다.


●가족의 범주

https://blog.naver.com/motif_1/223387986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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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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