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 & Monica's [en route]_357
*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ᐧ강민지
#1
늘 씩씩하고 건강했던 아내가 앓아눕자 비로소 덜컥 겁이 났다. 그동안 건강에 관한 인사와 염려를 주고받긴 했지만 그것은 의례에 가까운 대화였다. 아내가 당사자가 되는 일을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못했다.
사흘을 굶고 아내 스스로 일어서자 마치 당번 교대하듯 내가 누웠다. 아내는 그간의 피로가 누적되어 병이 된 듯 싶었지만 나는 아내가 회복하자 긴장이 풀리면서 안심이 병이 된 듯싶었다.
벙크 베드의 2층 침대 바닥을 보며 사흘을 누워있는 동안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침대 바닥을 받친 철망이 마치 감옥의 창살 같았다. 때때로 스페인군에 의해 포로가 된 아즈텍인의 환영이 어른거렸다. 그 속에 내가 있었다. 철망을 피해 눈을 감아도, 돌아누워도 다시 의식을 잃을 때까지는 갇힌 감옥의 환영은 사라지지 않았다.
차차 의식이 명료해지자 내 옆에 있는 이는 스페인군의 간수가 아니라 아내임이 분명해지고 다시 글을 읽을 의욕이 자랐다.
보내주신 염려와 기도의 말들이 약이 되고 일어설 에너지가 되었다. 누군가가 '가장 정다운 말'이 무엇인지를 불특정 다수에게 물었던 모양입니다. 그중에서 수위를 차지했던 말들이 "밥은 먹었니", "참 대견하다", "일찍 자", "수고했어", "어디 아프니?", "힘내!" 였다고 합니다. 너무 흔히 들어서 식상하다고 느꼈을 말들이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도대체 누구 때문에 익숙한 말이 되었지, 궁금해졌습니다. 떠오르는 사람의 목소리가 있었다. 모든 어머니들의 사랑의 다른 표현들이었다.
내가 누워있는 동안 다양한 곳에서 온 그 어머니의 목소리들이 쌓여있었습니다. "아프지만 마세요^^", "기운 내세요!", "걱정과 기도만 합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햇살 속을 걷고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식당 손님들의 대화 소리도ㅡ 미소 띤 웨이트리스의 친절함도 각별하게 느껴졌다. 식사 후 1년 만에 처음으로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달콤한 독약도 먹었다.
실패라고 여겼던 것들이 실패가 아니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지곤 한다. 사흘씩 앓았던 날이 마음이 우화하는 시간이었음을 다시 햇살 속 거리를 거닐며 알았다.
#2
푸에르토리코로 보내주신 청람 시인의 특별한 시 2편은 이번 창살 속 환영의 시간 동안 나의 과거와 현재를 조망하고 성찰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시인에게 부끄럽지 않은 시간을 걷겠습니다.
이안수 작가께
푸에르토리코, 먼 곳으로 건네는 안부
푸에르토리코의 빛 아래,
낯선 골목을 걷는 선생님의 발걸음이 문득 제 마음에 닿았습니다.
바다 건너 건너온 그 한 줄 안부,
길 위에서 보내신 그 짧은 숨결은
마치 오래된 편지처럼
제 마음을 조용히 두드렸습니다.
노정이 녹록지 않다 하셨지요.
그러나 저는 압니다.
그 고단함마저 품어
다시 삶으로 발효시키는 이가
선생님이시라는 것을.
공항의 불빛보다,
길가의 낯선 풍경보다,
더 오래 반짝이는 것은
그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빛이라는 사실을
선생님의 글을 통해 늘 배워왔습니다.
“나머지 삶을 길 위에서 공부하며 사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는 그 말씀,
얼마나 곱고도 아름다운 문장입니까.
삶을 공부라 부를 수 있는 분,
기쁨을 노정이라 여기시는 분.
그런 분의 여백 깊은 하루는
언제나 한 편의 시가 되어
우리를 살아 있게 합니다.
부디,
길이 너무 거세지 않기를,
그늘이 길게 늘어질 때는
따뜻한 마음들이 지붕이 되어 드리기를.
부디,
머무는 풍경마다
다정한 손짓과 고운 향기가 머물기를,
다시 길을 나설 땐
문득 돌아보고 싶은 작은 정원 하나
가슴에 품게 되시기를.
멀리서 조용히 기원합니다.
무사한 여행,
깊은 사유,
온 세상에 대한 사랑,
그리고 여백 있는 여생.
그 모든 것이 선생님 삶의 문장마다
은은히 녹아들기를.
언젠가
한 잔의 따뜻한 차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날을 기다리며,
이 먼 안부에
작은 시 한 편을 띄웁니다.
사랑과 평안을 담아
_by 청람 김왕식
https://blog.naver.com/wangsik59/223874546501
___
모티프원, 신선이 내린 집
_파주 헤이리의 어느 하루
파주 언덕 끝,
바람보다 느린 책갈피 하나
잎새 사이로 숨은
작은 숨결의 집이 있다
그곳 이름, 모티프원
말보다 조용한 것이 머무는 집
세상에 닳은 발자국들이
잠시 잠든다는 전설이 있다
주인장은 수염으로 안개를 빚는 사람
시의 뿌리를 끌어올려
찻잔에 띄우는 신선이다
그의 눈빛엔 번역되지 않은 고요가 있다
서재는 숲보다 깊고
서가마다 오래된 바다가 찰랑인다
책 사이에 눌려 있는 이국의 바람들이
커튼 사이로 다시 불어온다
한 이방인이 남긴 말
“현생의 어둠이
커피 한 잔에 가라앉았다”
모티프원은
벽 대신 페이지로 채운 방
시간대신 침묵을 걸어두고
어디로든 가지 않아도
머물 수 있는 여행이다
아쉬운 건,
벽 너머로 흘러든 한 줌의 사람소리
그러나 그 틈조차
세상과 이어진 창처럼 따뜻했다
미러룸 창밖, 초록잎들이
한 편의 풍경화를 흔든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
또 다른 방에서 다시 피어날 기억
모티프원은
지도에 없는 나라
시가 눕고, 바람이 앉고,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곳
신선은 오늘도 거기 있다
한 손에 찻잔, 한 손에 시 한 줄
말없이 문을 열어두고
지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_by 청람 김왕식
https://blog.naver.com/wangsik59/223874025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