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 & Monica's [en route]_370
*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ᐧ강민지
#1
마침내 밴쿠버에서 몸의 세포들이 비온 후의 들판처럼 싱그럽게 피어나는 것 같다. 그동안 길 위의 숙소에서 식사를 준비해먹을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아 길거리 음식이나 가장 저렴한 식당의 저렴한 메뉴를 골라 매식을 하다가 넉넉한 주방과 식탁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식사가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면 지금의 식사는 육체와 정신의 건강을 위한 것으로 바뀌었다. 먹는 것이 건강하면 몸도 생기가 돌기 마련이다.
이곳의 주방을 보고 아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배추 3포기를 사다가 김치를 담는 것이었다. 중국 이민자들의 커뮤니티와 가까워 우리가 필요로 하는 식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다. 김장용 배추뿐만 아니라 액젓과 고춧가루까지 구비되어 있다.
김치를 만든 기쁨에 더해 돼지고기 목살을 사다가 수육까지 만들었다. 김치를 얹은 담백하고 고소한 수육 한입은 우리가 한국을 떠난 후 한 번도 감각하지 못했던 것을 맞은 미뢰가 당황하는 맛이었다.
“You are what you eat(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우리의 몸은 한국인의 몸으로부터 많이 멀어졌을 것이다. 밴쿠버에서 다시 한국인이 되어가는 회복의 수순을 밟고 있다.
Barnabas Choi 선생은 출석하는 한인교회의 여신도회에서 선교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만들어 파는 배추국을 사서 오곤 한다. 우리가 당도하는 날은 멸치와 다시마 육수에 된장을 푼 된장배추국으로 우리를 맞아 주었고 어제는 양지머리 쇠고기가 듬뿍 들어간 배추국을 사 왔다. 나는 맑고 담백하지만 고소한 육단백질 맛에 숟가락을 놓을 수 없어서 두 그릇을 비웠다.
#2
사실 우리가 한국 밖 도처에서 한국 음식만을 고수하는 것은 아니다. 음식은 그 나라와 지역의 오랜 세월에 걸친 사회적, 문화적 가치를 담고 있는 만큼 가능하면 퓨전이 아닌, 그 지역의 식재료로 만들어진 전통 음식을 먹으면서 지역의 역사, 환경, 생활 방식에 동화되려고 노력한다.
특히 다민족 이민국가인 캐나다 내에서도 50개 이상의 국가에 온 이민자들이 거주하는 다민족, 다문화 비율이 가장 높은 밴쿠버에서는 거의 모든 나라 음식을 경험할 수 있다. 특히 다양한 민족과 국가별 커뮤니티 축제가 잦은 만큼 그 축제 현장에서 저렴하면서도 고유한 음식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평소에는 아내가 즐기는 메뉴로 식탁을 함께한다. 불을 사용하지 않는 조리 없는 메뉴이다. 이는 신선한 채소, 과일, 견과류, 씨앗 등을 씻기만 해서 적당한 크기로 잘라 큰 접시에 올려 좋은 올리버 오일, 식초, 후추, 소금만 뿌려서 조리 과정 없이 바로 섭취하는 것이다. 때로는 콩이나 곡물을 삶아서 올리기도 하고 요구르트를 곁들이기도 한다. 이런 비가공, 비조리 식품은 조리에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은 수도사나 은둔자의 삶을 모델로 하는 우리 여행에서 가장 손쉽고 건강한 식단이다.
밴쿠버는 Raw Food의 천국이다. 채소 마트에서는 물론 파머스 마켓을 통해 산지에서 바로 온 신선 재료들을 구입할 수 있다. 이는 밴쿠버의 여름이 주는 축복이기도 하다.
인위적인 조리나 가공 없이 섭취하는 이런 Raw Food 방식은 최 선생도 평소 즐기던 방식이라 한 식탁을 나누는데 메뉴에 대한 분쟁이 없다.
한 밥상에서 나누는 것은 밥만이 아니다. 서로의 살아온 과거와 지향하는 미래와 추구하는 가치들이 함께 숟가락에 얹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