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 & Monica's [en route]_402
*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ᐧ강민지
#1
오늘 아침에도 변함없이 존(John Boucher) 어르신이 1층의 개인 공간에서 벨라(Bella)를 안고 2층으로 오셨다. 이 분의 하루 일과 허용 오차 범위는 ±10분 정도이다.
부인께서는 내년의 팔순을 어떻게 기념해 줄지를 며칠 전부터 고민하고 계셨다. 지난주 남편을 모시고 Tailor Shop를 방문했다. 스스로를 위해 평생 새 양복 한 벌을 사보지 않은 존 어르신의 맞춤양복을 짓기 위해서였다.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순순히 자신의 몸에 테일러(Tailor)가 줄자 대는 것을 허용하셨단다.
"이 사람이 죽을 때가 되었는지..."
무심코 이 말을 하고 지숙 어르신은 홀로 웃으셨다.
"사실은 저를 위해 옷을 주문한 거예요. 평생 스리프트 스토어(Thrift store)에서 중고 옷만 사 입은 분에게 새 양복 한 벌 안 해드린 것이 두고두고 후회될 것 같아서..."
벨라를 내려놓자마자 정원 너머 뒷집의 지붕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길 보세요. 서리에요. 올해 들어 지붕이 언 것은 처음이에요."
"첫서리도 내렸는데 한 달째 계속되는 데크작업은 언제 마무리하려고 하세요?"
"걱정 없어요. 첫눈은 아니니..."
#2
존 어르신은 영국에서 나고 자랐고 수확과 철학을 공부한 뒤 잠시 런던에서 컴퓨터 시스템 관리자로 일했지만 그때를 인생 최악의 시기로 기억한다.
"정말 참을 수 없었어요. 항상 똑같은 책상에 앉아서 시스템을 들여다보는 일이라니..."
결국 1년을 넘기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대학 때부터 밴드를 했었다. 드럼 파트를 맡아서 이미 다양한 공연을 소화하고 있었고 일본 초청공연까지 다녀왔다.
실업자가 된 직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전화였어요. 나를 자유롭게 한 전화였으니까요."
그 전화의 발신자는 한 크루즈 회사의 인사부 직원이었다.
"나를 밴드 드러머로 영입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어요. 크루즈십에는 선박 운영과 선상 호텔 고객 서비스 직책 외에도 많은 엔터테인먼트 스태프들이 있어요. 그가 어떻게 나를 알았고 내 연락처를 알았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이지만 나는 기꺼이 그의 제안에 응했죠."
그는 즉시 출항지인 LA로 날아가 크루즈 십의 일원이 되었다. 멕시코 항로, 알래스카 항로를 비롯해 스페인, 브라질을 항해하는 유럽과 남미항로까지 배 위에서의 연주생활은 직업이 아니라 마치 자신을 위한 엔터테인먼트 같았다.
"마침내 내 통장에도 돈이 쌓이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승무원들은 영해인 12해리(약 22.2km) 밖의 공해상에서 일하는 동안은 세금을 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죠. 더 좋았던 것은 승객들이 기항지 관광(Shore Excursions)를 나가는 동안은 내게 자유시간이 주어지는 것이에요. 나는 자전거를 싣고 다니며 기항지 도시에서 내 시간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었죠."
어르신은 나중에 시애틀에 정착해 '워싱턴 대학교(UW ;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교육학 석사를 공부하고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살았다. 하지만 방학 때마다 크루즈 십에 올라 3개월씩 드러머로 일하며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3
어르신은 크루즈십에서 만난 음악가와의 첫 결혼 후 총 3번의 결혼을 통해 자녀를 두지 않았다.
유일한 자녀는 3살의 고양이 벨라이다. 이곳에서 사는 지난 20여 년 동안 세 마리를 떠나보냈다. 한 마리는 시애틀에서 함께 와서 천수를 누린 이별이었고 그다음 고양이는 집을 나갔다가 일주일 만에 임신을 해서 들어와 7마리의 새끼를 낳고 떠났다. 그다음으로 온 한 마리는 집 밖을 들락이며 자유를 구가하다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다음으로 가족이 된 고양이가 벨라이다. 전 고양이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유를 코요테(Coyote)에게 혐의를 두고 있는 존은 벨라가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제일 걱정한다.
벨라에게 집사 이상의 지극함을 보이는 어르신께 벨라와의 관계를 물었다.
"손녀에요. 매일매일 더 사랑스러우지는 손녀!"
어제 아침에는 2층으로 올라오는 시간이 15분이나 늦어졌다. 그것은 이 분의 하루 일과 허용 오차 범위 ±10분을 벗어나는 이변이었다. 이유를 물었다.
"벨라와 함께 방을 나섰는데 정원에 블랙 베어가 있는 거예요. 곰과 마주친 벨라가 비명을 지른 뒤 거의 기절을 해서 벨라를 안정시켜야 했어요."
콘솔 테이블(Console Table)에 놓인 고양이 사진을 열었다. 그것은 작년 존 어르신이 부인 생일날에 드린 생일축하카드였다.
"Bella & I wish you a very happy Birthday.
Thank you for being with us.
_Love from Bella and your humble Husband JB.
벨라와 제가 진심 생일 축하드려요.
우리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_사랑을 담아 Bella와 당신의 부족한 남편 JB가."
이 엽서를 내가 다시 들추어 존 어르신께 보여주며 'humble'이라는 표현이 제일 마음에 든다고 했다.
"아내가 명하면 저는 행합니다. 그것이 제 행복입니다."
존 어르신은 이런 단단한 루틴을 지켜낼 수 있는 노후의 평온한 나날이 세 번째 결혼이 가져다준 행운으로 여기고 있음을 "Thank you for being with us."으로 표현했다.
●"빨리 끝내고 뭘 하려고요?"
https://blog.naver.com/motif_1/224025284827
●은퇴한 교수, John Boucher의 '질문'
https://blog.naver.com/motif_1/223996270607
●"Thank you!"와 "천만에요!"
https://blog.naver.com/motif_1/223984370052
●극한의 노동으로 채운 곳간, "내 것이 어딨어..."
https://blog.naver.com/motif_1/223991065499
#부부 #동행 #은퇴 #밴쿠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