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 & Monica's [en route]_403
*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ᐧ강민지
#1
올해 여름, 밴쿠버에서의 3개월 삶에서 만난 것들은 원시의 산과 숲, 맑은 호수와 하늘을 품은 수많은 공원과 그 공원으로 지은 도시에서 어떻게 경계 없이 자연을 닮은 모습으로 함께 살 수 있을까, 하는 마음과 배려, 질서들이었다. 돌이켜보니 숲을 이룬 나무들만큼이나 숱한 말들이 머릿속에 맴돈다.
밴쿠버를 떠나야 할 시간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밴쿠버에 당도하던 3개월 전보다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순전히 이곳 사람들의 마음과 그들이 세운 제도들, 그리고 그 제도들의 공백을 채우는 자발적인 사람들의 솔선수범 때문이었다.
내 발걸음을 멈추어서 게 한 수많은 모습들이 있었지만 그중 하나는 퀸 엘리자베스 공원(Queen Elizabeth Park)으로 오르는 언덕길에 세워진 한 회사의 광고문구였다. "We build beautiful small homes(우리는 아름다운 작은 집을 짓습니다)". 이 문장을 구성하고 있는 'beautiful', 'small', 'home'의 각각 의미에 '집을 만드는 업자'가 아니라 '정서적 공간을 짓는 사람의 태도'가 읽혔기 때문이다.
내 뇌리 속에 오랫동안 남을 밴쿠버는 '호화롭고 우람한 저택'이 있는 도시가 아니라 '작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담긴 가정'이 있는 곳일 것이다.
그 사람들의 마음을 언어로 전달할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없어 금강경의 표현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빌어본다.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라는 마음이 없는 베풂이다. '주는 사람, 받는 사람, 주는 물건이라는 세 가지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보시'의 개념에 딱 어울리는 밴쿠버라이트들의 마음이다.
이 마음들을 발견할 때마다 우둔한 나도 한 걸음씩 좋은 마음 쪽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2
아침에 연어가 올라왔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코퀴틀람강을 다녀오니 존 어르신이 커피를 만들고 있다. 어르신은 매일 아침 원두를 갈면서 생산지를 말해준다.
"잠시 뒤면 커피가 만들어집니다. 지난주의 커피와는 다른 원두에요. 기대해도 좋아요."
"당신이 만들어주시는 커피를 더 오래 즐기고 싶어요. 그런데 당신의 커피를 즐길 날이 엿새만 남았다니..."
"다음 주에 떠난다고요? 그곳엔 더 좋은 커피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어디로 갈 예정인가요?"
"시애틀이요."
"비행기로?"
"버스로요."
"그곳에서는 무엇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나요?"
"아무것도요. 하지만 모든 것이요. 저는 단지 조우(encount) 할 뿐입니다."
"진짜 모험(real adventure)이군요."
#3
지난밤에 밴쿠버에서 시애틀로 가는 버스표를 다운로드하고 미국 입국 필수 서류를 챙기면서 지도를 펼치고 미국의 어떤 루트를 따라 내려가 우리가 다시 닿기를 원하는 과테말라 안티구아까지 육로로 갈 수 있을지를 궁리했다.
이곳에서 우리가 안티구아까지 최단거리 육로는 약 6,100km 정도이다. 하지만 우리는 최단거리를 택하는 대신 그동안 우리의 발길이 닿지 않은 루트를 택할 예정이다.
미국은 Seattle_Portland_Sacramento_Salt Lake City_Moab_Denver_Oklahoma City_Laredo를 예상하고 있다. 멕시코의 Nuevo Laredo로 들어가 Monterrey를 거쳐 멕시코의 남부와 동부를 지나 Belize를 두루 거쳐서 Guatemala로 들어갈 예정이기 때문에 우리가 떠나온 자리로 되돌아가는 여정 자체가 real adventure가 될 것이다.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우리가 무엇을 만날 수 있을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루트는 또다시 어떻게 휘어질지, 모든 것이 미지수이다.
우리는 위의 예정된 루트를 엄수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밴쿠버를 떠난다는 것은 사실 미로 속으로 들어서는 것과 다름없다. 미로로 들어가는 그 길에 안전함만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삶의 최종 목표가 '절대 안전'이 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물론 우리는 위험과 안전의 균형을 맞추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험의 기준은 "Recognizing risk but not letting it control you(위험을 인지하되, 그것이 당신을 지배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침마다 즐긴 존 어르신이 내린 커피는 최고였다. 그러나 "더 좋은 커피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라는 어르신의 말에 마음을 실으니 밴쿠버를 떠나는 발걸음이 좀 더 가뿐하다.
나의 어두운 눈으로 볼 수 없었던 밴쿠버의 더 순수한 아름다움과 나의 둔한 손으로 만질 수 없었던 밴쿠버라이트의 더 짙고 푸른 마음은 다음을 위해 묻고 떠난다.
*사진설명
시종 극진한 염은주 선생님 마음과의 동행이었던 밴쿠버 삶의 데이트
#아듀밴쿠버 #밴쿠버 #시애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