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 & Monica's [en route]_441
*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ᐧ강민지
#1. 차를 노리는 트롤과 붉은 손을 가진 레닌
지난주 아내의 생일(12월 24일)에 호스트이신 유혜자 선생님의 차를 타고 이동 중에 공사로 길이 막힌 길을 우회하자 다리 아래 끝 구석에 한 괴물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왼손에 폭스바겐 비틀을 움켜진 외눈박이 괴물이었다. 설명문을 보니 이 지역, 프리몬트(Fremont)의 예술위원회에서 예술을 통해 지역의 소속감 강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공모를 했고 지역 주민들이 후보작 투표를 통해 선정하고 자원봉사자들이 도와 철근 콘크리트로 제작했다고 했다. 오로라다리(Aurora Bridge) 아래의 이 공공 조각상의 이름은 '프리몬트 트롤(Fremont Troll)이다.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전설의 거인족 괴물인 트롤은 거인족, 요툰(Jötnar)의 후손으로 신들과 대등한 힘을 가진 자연의 혼돈을 지배하는 괴물이다. 신들과 전쟁에서 패한 뒤 동굴로 숨어들어 마을을 습격하거나 인간을 잡아먹는다.
프리몬트 사람들은 합의를 통해 이 흉측한 괴물을 다리 아래에 설치한 다음 이 트롤이 지나가는 차를 잡아먹는다,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냈다.
이 트롤에게 자동차가 제압당하기 전에 재빨리 벗어나 두 블록쯤 가면 팔에 빨간 페인트를 묻힌 큰 조각상이 나타난다. 레닌 동상(Statue of Lenin)이다.
무게 7톤에 높이가 5m에 가까운 이 동상은 책을 들고 있거나 손을 흔들거나 연설을 하는 모습들과는 달리 총과 불꽃에 둘러싸인 모습으로 레닌의 폭력적 혁명성이 묘사된 유일한 조각이라고 한다.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동상이 왜 프리몬트의 중심부에 있는가?
동지가 지나고 맑은 날이 잦아졌다. 어제(12월 28일)도 해가 모습을 드러냈지만 기온은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1°C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집을 나섰다. 햇살이 아까워서였다. 시애틀에서 가장 시애틀 다운 감성과 정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우리 생각에 그곳은 지나는 차를 노리는 트롤이 있고 볼셰비키 혁명 지도자가 있는 프리몬트라고 여겼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먼저 레닌 동상을 찾았다. 프리몬트 상공회의소에서 세운 이 조형물에 대한 간략한 역사와 논의가 서술된 표지판이 청동상 옆에 서있다. 워낙 오랫동안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만큼 이 지역 사람이 아니라도 '프리몬트 레닌 동상'의 기묘한 사연은 시애틀 사람 대부분이 알고 있다. 레닌이 이 동네를 알린 셈이다.
슬로바키아의 조각가 에밀 벤코프(Emil Venkov)가 제작한 이 청동상이 1988년에 포프라드(Poprad)에 세워졌지만 1989년 벨벳 혁명 이후 레닌 동상들은 철거되는 운명을 맞았고 이 동상도 그 운명을 따랐다. 포프라드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던 시애틀 동쪽 이사콰(Issaquah) 출신의 루이스 카펜터(Lewis Carpenter)가 고철더미속에서 이 동상을 발견하고 독창성에 매료되어 포프라드시와의 협상을 통해 구입했다. 그는 이사콰의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동상 구입비보다도 많은 비용을 들여 미국으로 가져왔다. 그러나 자신이 운영하려던 레스토랑 앞에 전시할 계획이었지만 이사콰시가 허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함에 따라 그 계획들은 무산되었다. 가족들이 매물로 내놓았지만 둘 곳이 없어지자 프리몬트의 주물공장으로 보내졌다. 이 주물공장의 설립자이자 프리몬트 예술가 피터 베비스(Peter Bevis)가 이 동상이 녹여질 위기에서 구조해 현재의 위치에 세웠다.
이사콰에서 수용을 거부한 공산주의 지도자의 동상이 미국의 자유주의적인 보헤미안 동네에 등장한 이후 정치적 상징과 예술작품이라는 의견이 격돌했다. '폭력의 상징'으로 여기는 우크라이나와 동유럽계 주민들은 철거를 요구했고 예술계 쪽에서는 '역사적 유물의 철거는 기억을 지우는 것'이며 이것은 해결책이 아니라고 맞섰다. 이런 논란이 프리몬트의 기묘함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종종 붉은 페인트로 훼손되거나 풍자적 오브제로 시즌마다 다양하게 장식되면서 여전히 구매자를 기다리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동상의 안내판에는 가격을 25만 달러로 표기하고 있다. 주민들은 이 동상이 팔리면 이 자리를 무엇으로 대체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했고 구매자가 나타나 구입을 확정하면 존 레넌 조각상으로 대체할 예정이라는 내용도 안내판에 포함하고 있다.
#2. 기괴함을 정체성으로 삼은 보헤미안 바이브
길을 건넜다. 우리를 멈춰 세운 것은 프리 라이브러리(Little Free Library) 상자였다. 개인이 집 앞에 세워 누구나 책을 가져다 읽게 만든 무료 도서 나눔 상자. 어떤 책이 있을까 싶어 문을 열고서야 그것이 책상자가 아님을 알았다. 엽서와 집 모형, 파스타면이 놓여있었다. 문을 닫고 보니 'Little Free Art Gallery'라고 표기되어 있다. 자신의 작품 한 점을 놓고 한 점을 가져가는 용도로 설치되었지만 언제부터인지 예술작품과 함께 배고픈 자를 위한 음식물이 함께 놓이는 듯했다.
몇 발자국 앞의 입간판이 다시 우리를 가게 안으로 이끌었다. 퀴어 서점, Charlie’s Queer Books. 시애틀의 많은 독립서점들을 방문했지만 LGBTQ+ 작가와 퀴어 테마 도서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독립 서점은 처음이었다.
퀴어 문학 전 분야와 저널, 퀴어 굿즈들이 분홍색과 보라색 공간에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다. 의자에 앉아 몇 권의 책을 뽑아 읽는 것만으로 이 세계의 많은 궁금증이 해결되었다. 퀴어 정체성과 다양성을 담은 그림책을 소개하는 ‘어린이 코너(Children’s nook)’도 있다. 2층은 작가 낭독회와 워크숍이 개최되는 곳과 북클럽 공간이 할애되어 있다. 시애틀 LGBTQ+ 커뮤니티를 위한 서드 플레이스(Third Place)로 기능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시애틀의 처음이자 유일한 오프라인 퀴어서점입니다. 트랜스젠더 남성인 Charlie Hunts 씨가 2023년 11월에 문을 열었어요."
직원의 설명이다. 특정 책의 목록을 구매하면 교도소 수감자들과 워싱턴의 농장 노동자와 농촌 지역사회의 이주 청소년들에게 책을 보내주는 기금으로 사용하고 LGBTQ+ 청소년(10~22세) 커뮤니티 센터인 램버트 하우스(Lambert House)를 위한 모금도 하고 있다고 했다.
프리몬트(Fremont Bridge) 쪽으로 발길을 돌리자 프리몬트 선데이 마켓(Fremont Sunday Market)이 열리고 있다. 매주 일요일 연중무휴로 운영되는 스트리트 마켓으로 지역 아티스트들의 핸드메이드 작품을 비롯해 빈티지 의류, 앤티크, 가구, 공예품들이 주를 이루었다. 여름에는 34th St 일대의 야외 길에서 개최되지만 11월부터 3월까지는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이곳 다리 아래에서 열린다고 했다.
1990년 시작되어 35년의 역사를 가진 마켓으로 유럽의 벼룩시장을 모델의 소규모 빈티지·앤티크 중심으로 시작해 여름에는 150여 개, 겨울에는 100여 개 이상의 벤더들이 모인단다. 시장 방문자들이 다양한 푸드 트럭과 길거리 음식을 통해 세계 각국의 음식을 맛보며 버스커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프리몬트의 문화적 상징이 되었다.
프리몬트 컷(Fremont Cut)의 운하 옆 버크-길먼 트레일(Burke-Gilman Trail)로 산책을 나온 주민으로부터 이 지역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 정체성과 보헤미안 바이브에 대해 물었다.
"1990년대쯤에 구체적으로 가시화되었어요. 예술가들이 앞장서고 커뮤니티에서 호응해 곳곳에 공공조각물들을 세우고 이곳을 '우주의 중심(Center of the Universe)'으로 선언했어요. 자유정신이 충만한 사람들의 장난기가 예술적 창의성과 결합해 기괴함(strangeness)을 커뮤니티 정체성의 일부로 수용한 것이죠. 이 동네에서는 지루할 틈이 없답니다. 이 구글 캠퍼스는 2006년에 들어왔는데 지금은 2019에 개장한 사우스 레이크 유니언 캠퍼스로 이전한다는 말도 있었지만 하이브리드 근무 모델을 유지한다고 하는군요."
구글은 2004년 커클랜드(Kirkland)에 처음 진출한 이후 프리몬트에 두 번째 지점을 마련했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인 프리몬트 선데이 마켓이 장을 정리하고 있는 프리몬트 브릿지 너머로 Adobe Seattle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커뮤니티에 커피와 맥주가 빠질 수 없다. Charlie’s Queer Books 옆의 프리몬트 커피(Fremont Coffee Company)는 2003년부터 동네의 거실을 자처하고 있다. 프리몬트 브루잉(Fremont Brewing)은 ‘Because Beer Matters(맥주가 중요하니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2009년부터 버크-길먼 트레일을 걷는 사람이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해왔다.
프리몬트는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이 스스로 '기괴함'을 차용하는 방식으로 카운터컬처(counterculture)를 지향하면서 스스로를 해방했다. 그 결과는 예술과 보헤미안에 더해 테크 공동체로 자리 잡게 되었다.
각각 고유한 개성을 가진 외부의 창작자들이나 프리랜서들이 모여들게 만들고 커뮤니티 밖 사람들이 그들을 따라 찾게 만든 프리몬트 사람들은 어쩌면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삶이 너무 무겁다고 느낄 때,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 길을 잃었다고 생각할 때 이 동네에서 잠시 배회하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위로받을 수 있을 듯하다. 어쩌면 자신만의 길을 발견할 수도...
*사진설명
-프리몬트의 레닌 동상. 철거와 예술적 풍자의 대립된 담론이 오히려 이 동네를 예술적 정체성으로 차별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시애틀의 Fremont Sunday Market. 35년의 역사를 가진 이 마켓은 프리몬트의 문화적 상징이 되었다.
-시애틀 유일의 퀴어책방과 프리몬트 커피(Fremont Coffee Company). 각각 개성이 뚜렷한 공간들이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외지인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2006년에 자리 잡은 프리몬트의 구글 캠퍼스. 지척에 Adobe Seattle이 있다. 프리몬트는 예술·보헤미안·테크·공동체가 섞인 동네로 진화해왔다.
#프리몬트 #Fremont #시애틀 #세계여행